106화. 한나
수색은 순조롭지 못했다. 백성들은 베드포드 공작의 반역을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왕성에서 나온 병사들에게 순순히 협조하지 않았고 비난했다. 벽보에는 왕의 인장이 없었고 왕의 인장이 없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백성들은 정치적인 싸움은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들을 진정으로 지켜 준 이는 베드포드 공작이라는 것뿐이었다. 그 덕분에 전쟁에서 이겼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귀족들은 몸을 사렸다. 아직 왕이 죽은 것도 아니었고 라이언이 잡히지도 않았으니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두려워 서둘러 르셀을 벗어나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바벨로프는 날이 지날수록 점점 더 예민해졌다. 금방이라도 라이언을 잡아 죽일 듯 달려나갔던 총사령관 피어스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증폭제의 효과가 유지되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계속해서 용병을 모집했지만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제시카는 왕의 밀실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밀실이라지만 입구가 있을 터인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찾지 못하면 내쳐질 것 같은 두려움에 그녀는 더 필사적이었다. 아버지 바벨로프에게는 쓸모 있는 딸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왕비의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괜찮았지만 이젠 그것도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렸으니 왕의 밀실을 찾는 일에 더욱 간절했다.
바벨로프가 반역을 일으킨 지 다섯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리아는 침대에서 뒤척댔다.
“마님 불편하시죠?”
바닥에 누워 있던 메리가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한 것은 메리였다. 그리 넓지도 않은 침대에서 자신이 모시는 주인과 함께 잠을 자자는 것은 잠을 자지 말라는 말과 같다며 제발 그러지 말라고 사정을 하는 통에 리아도 더 우겨대지 못했다.
“맞아!”
리아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손뼉을 쳤다. 지난 며칠간 그녀를 괴롭혔던 묘한 기시감에 대한 정답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놀란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나 말이야. 내가 아무래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랬잖아.”
“생각이 나셨어요? 결혼 전에 마주친 적이 있었던 거죠?”
리아의 사정을 모르는 메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나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음…. 한 30대 초반으로 보이던데.”
“35살 정도 되었으려나.”
“하긴 저희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여자는 결혼을 안 하면 좀 덜 늙는대요. 제가 이따 물어볼까요?”
지난 며칠간 한나와는 서로 몇 마디씩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철문 안에 갇혀있는 리아와 메리가 한나에게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메리. 한나 말이야 넬슨과 닮지 않았어?”
“네? 음…. 그게….”
메리가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뒤늦게 넬슨과 데이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메리로서는 넬슨을 떠올리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리아의 질문이기에 싫은 기억이나마 되짚으며 넬슨과 한나의 얼굴을 비교했다.
“머리카락 색이 같긴 하네요. 그렇지만 갈색은 흔하잖아요. 저도 그렇고. 아! 그러고 보니 눈썹이랑 눈매가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리아는 메리의 말을 들으며 넬슨의 얼굴을 떠올렸다. 풍채가 좋은 몸에 둥근 얼굴.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검은색이 섞여 있던 눈동자. 짙은 눈썹이 눈에 띄는 얼굴이었다. 어딜 콕 집어서 비슷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나와 넬슨은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넬슨이 품에 지니고 있었던 사진 속 어린아이. 그 천진한 아이가 나이 들었다면 딱 한나와 같은 얼굴일 것이다.
한나 역시도 옅은 갈색 머리였고 눈동자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비슷한 색이었던 것 같다. 특히나 짙은 눈썹은 인상적이어서 또렷하게 생각이 났다.
만약 한나가 넬슨의 딸 에이미라면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 넬슨이 제시카를 통해 레오니를 오해하게 된 일이 말이다. 제시카가 넬슨이라는 이용하기 쉬운 인물을 찾아낸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나가 에이미일까? 만약 그렇다면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리아에게는 기회였다. 지금 상황에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한나가 유일했고 그녀를 통해 밖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궁금해하는 메리에게 리아는 미처 말하지 못했던 넬슨의 이야기를 전부 해 주었다. 어째서 넬슨이 베드포드 성의 집사가 되었는지 어째서 데이지와 손잡고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그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까지 전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놀라서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메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이었다.
“넬슨이 불쌍하니?”
“분명 그는 나쁜 사람인데 정말 나쁜 사람이고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는데, 불쌍해요. 마음이 아파요.”
넬슨은 좋은 집사였다. 사용인들에게 늘 공평했고 관대했다. 그랬기에 메리는 넬슨이 저지른 죄를 들었을 때 더 놀랐었다.
“넬슨이 죽은 후 그의 소지품에서 딸의 사진이 나왔어. 공작님께서 금방 치워 버리셨기에 오래 보지는 못했지만, 한나와 무척이나 닮은 아이였어. 한나를 봤을 때 익숙했던 느낌은 그래서였나 봐. 계속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
“마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그래요. 착각이 아니겠죠?”
리아는 고개를 들어 저 높은 곳에 작게 달린 창문을 쳐다봤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작은 틈 사이를 비집고 햇볕이 쏟아졌다.
“만약 사실이라면 한나에게 넬슨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까?”
리아는 망설이고 있었다. 한나가 넬슨의 잃어버린 딸 에이미라면 정말 좋은 기회였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한나가 받게 될 충격은 얼마나 클까.
“마님. 제가 그 상황이라면 저는 알고 싶을 것 같아요. 원수나 다름이 없는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거든요. 많이 힘들고 아픈 일이겠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쪽을 택할래요.”
그 순간 철문이 덜컹댔다.
“아침 식사를 가져왔나 봐요. 좀 이른 시간인 것 같은데.”
시계가 없으니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일정한 시간에 식사를 가져오는 한나에게 의지할 뿐이었다.
리아는 급히 가운을 걸쳐 입고 철문 아래쪽 구멍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공주님 아침을 가져왔습니다.”
한나가 열린 구멍 사이로 식사를 밀어 넣었다.
“한나. 오늘은 좀 이른 것 같은데.”
“저, 저도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서요. 잘은 모르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면 방문객이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방문객? 바벨로프 그 늙은이가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일까? 그날 밤 이후 바벨로프는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당장 어떻게 할 것처럼 야욕을 드러내는 모습과는 상반된 행동이었다.
그나마 안심이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리아는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메리가 나섰다.
“한나 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직 서른은 안 되셨죠?”
“그렇게 보여? 아니야. 서른은 무슨….”
“그럼요? 몇 살이신데요? 그보다는 어려 보이시는데.”
분위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메리가 재빨리 반문했다. 한나는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다가도 순식간에 입을 다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문 앞에 주저앉으며 메리의 질문에 웃으며 답을 했다.
“올해 35살이야. 많지? 나도 내 나이가 놀라워.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지.”
한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리와 리아가 눈빛을 교환했다. 35살. 기다리던 답이었다. 넬슨의 딸 에이미가 15살에 실종되었고 그 뒤로 20년이 지났으니 나이는 일치했다. 더 떠볼 시간이 없었다. 만약 한나가 에이미라면 한시가 급했다.
“에이미.”
낮게 깔린 리아의 목소리가 작은 구멍을 통해 한나의 귀에 들어갔다. 구멍을 통해 바라본 한나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그게.”
“에이미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 아니에요.”
주저앉아 있던 한나가 벌떡 일어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나가 에이미가 맞다면 전해 줄 말이 있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야.”
이어지는 리아의 말에 한나는 아니라며 문을 닫는 것도 잊은 채 이따 그릇을 가지러 오겠다고 말하며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갔다.
리아는 한나가 에이미라는 것을 확신했다.
“마님 어쩌면 좋아요. 이대로 내려가서 왕비한테 다 전하면 큰일이잖아요.”
“기다려 보자. 분명 다시 올 거야. 아버지라는 말에 많이 당황한 표정이었어.”
리아의 말은 적중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한나가 숨을 헉헉대며 계단을 뛰어올라 왔다.
“어떻게 아셨어요?”
거친 숨을 고르며 한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미가 어떻게 한나가 되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다만 그 때문에 에이미의 아버지에게 힘겨운 일이 있었다는 것은 알려 주고 싶어.”
한나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잊고 살았던 과거. 차마 미안해서 찾아보지 못한 가족들. 그저 자신의 급료를 보내는 것만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을 뿐이었다.
“아버지를 아세요?”
“왕비를 믿어?”
한나와 리아가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한나.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은 한나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어. 그래도 들어 보겠어?”
“제 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나요? 거, 건강하게 잘 계시다고 했는데.”
오랜 세월 가족을 등지고 살아왔다고 하기에는 한나의 표정은 절박했다. 리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누가? 누가 그런 말을 했지? 혹시 제시카 왕비야?”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연락하고 있는 거야? 한나가 솔직하게 말해 줘야 나도 내가 아는 사실을 알려 줄 수가 있어.”
한나는 입술을 달싹댔다. 말을 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것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나를 믿지 않아도 되지만 기회는 줄 수 있잖아. 어차피 나는 이 안에 있고 내 말을 믿는 것은 한나의 자유야. 그저 듣기만 해도 괜찮아.”
“왕비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가족에게 제 급료를 보내고 있어요.”
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망할 제시카. 그녀는 넬슨뿐만 아니라 한나도 속이고 있었다. 넬슨을 그렇게 이용해 먹었으면서 한나의 급료를 가족에게 보내 주고 있다고?
“제 아버지를 아시나요?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죠?”
한나가 다시 물었다. 리아는 천천히 지난 일을 떠올렸다. 넬슨이 저지른 일과 남긴 말들을. 넬슨이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