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던컨과 발레포르
던컨은 쉴 새 없이 투덜대는 라이언의 어린 종자를 쳐다보았다. 버릇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듯한 아이는 연신 불평을 내뱉고 있었다.
“조용히 해라.”
위엄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명령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니 언제까지 이 안에 숨어 있을 거냐고.”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이냐?”
어째서 밀실 안에 몸을 숨겼는지도 잊을 정도로 던컨은 당황했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왕아. 우리 여기 나가자. 그냥 다 죽여 버리자. 와 진짜 답답해 죽겠네. 그 자식은 왜 날 여기다가 밀어 넣어서.”
미친 아이일까? 던컨은 가만히 댄이라는 종자의 얼굴을 살폈다.
“정체가 뭐지?”
“누구? 나?”
“베드포드 공작이 나와 함께 가 달라고 네놈에게 부탁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넌 누구지?”
자신에게 아이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아이와 라이언이 동시에 미친 것이 아니라면 분명 무언가 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 편이네. 역시 남매라 이건가.”
“남매라니?”
계속되는 던컨의 질문에 발레포르는 작은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아 몰라. 난 말 못 해. 인간사에 깊이 끼어들고 싶지도 않고.”
마음 같아서는 밖에 있는 전부를 쓸어 버리고 리아만 데리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꾹꾹 참는 중이었다.
“인간사?”
“어리석은 인간아. 제발 조용히 해. 도대체 얼마나 엉터리 왕이면 이딴 일이 일어나냐고. 제대로 못 할 것 같으면 그냥 욕심부리는 놈한테 넘겨줘라. 차라리 그편이 좋겠다.”
모욕적인 언사에 던컨이 주먹을 꽉 쥐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게 그를 괴롭혔다.
“하긴 내가 엉터리는 맞지.”
왕의 밀실을 사용한 최초의 왕. 그게 바로 던컨 자신이었다.
“알면 됐네. 그럼 이제 어쩌려고? 여기서 계속 숨어 있을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다. 이제 어쩌면 좋을지.”
“내가 오랜 경험으로 아는데 숨어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어.”
발레포르는 지난날 리아와 함께 차원의 세계에 숨어 있었을 때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죽을 수 없다. 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야. 내가 죽으면 그럼 이 나라가….”
“아니까 구구절절 설명하지 마. 그리고 왜 목숨이 안 아까워? 좀 아껴. 인간들은 하여간에 죽으면 그냥 끝나는 줄 안다니까. 그때부터 또 고난 시작이라는 걸 왜 모르나 몰라.”
발레포르는 의자에 쌓인 먼지를 탁탁 털어내고는 그 위에 앉았다.
“죽지 마. 목숨도 아끼고 나라도 지켜. 너 죽으면 내가 욕먹을 게 뻔하다 뻔해. 지금도 너 지키려고 여기 들어와 있는 거잖아.”
“날 지킬 수 있나?”
“어려운 일도 아니지.”
발레포르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던컨의 눈에는 작은 꼬마 아이가 장난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미쳤구나. 네놈이 아니라 내가 미친 게 분명하구나.”
던컨이 허탈하게 웃었다. 갑자기 닥친 상황이 그를 한계로 몰아가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토록 바보 같은 왕이 또 있을까.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늘 굳건하게 나라를 지켜낸 아버지 벨로트를 떠올리며 던컨이 자책했다.
“이토록 부족한 왕이라니. 정말 나는 왕 자격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위로해 달라는 건 아니지?”
던컨의 얼굴에 떠오른 절망을 보며 발레포르가 인상을 썼다. 그냥 뒀다가는 스스로 자멸할지도 모를 정도로 던컨의 기운은 좋지 않았다.
“한 번 더 묻지. 넌 누구지?”
에라 모르겠다. 여기저기 다 들켰는데 한 명 더 안다고 뭐 어떻게 되겠어. 발레포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저놈을 지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써 보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가서 버벅대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느니 미리 경고해 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지.
“내가 누구냐고? 그게 그렇게 궁금해?”
발레포르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
“여긴 안전하지 못해요.”
병사들이 르셀 전역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쥬넬은 밖을 오가며 상황을 살폈다.
“그나마 공작님과 내 사이가 친밀하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어 다행이에요. 그들은 귀족들의 저택부터 뒤지기 시작했어요.”
귀족들의 집 다음에는 백성들의 집을 수색할 테고 그다음에는 쥬넬의 의상실이 될지도 몰랐다. 결국은 르셀 전부를 뒤질 것이니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벨로프의 독기만 오를 뿐이겠지.”
“귀족들이 거의 다 르셀에 모여 있는 참이라서 소문이 금방 퍼졌어요.”
“되도록 빨리 공격해야 해.”
라이언의 말에 매튜가 대답했다.
“오늘 밤이면 기사단원들도 근처에 도착할 것입니다. 제 생각도 더 시간을 두지 말고 빨리 공격을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증폭제 효과가 다 사라지기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다행히도 이미 단원들 대부분이 증폭제를 경험해 본 터라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단 한 번밖에 기회가 없다. 내 아내의 위치가 파악되면 바로 움직일 예정이다.”
왕궁에 침투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리아를 구하는 것이 가장 먼저였고 그다음이 바벨로프였다. 던컨은 발레포르가 지켜 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증폭제를 먹은 병사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 그들에게는 단숨에 죽여 주는 것이 더 좋을 테니.”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증폭제를 먹은 이상 결과는 죽음이었으니 되도록 편히 가도록 단번에 숨통을 끊어놓는 편이 좋았다.
“좀 이르긴 하지만 지금 드려야겠네요.”
쥬넬이 라이언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부인께서 맡겨 주신 물건이에요. 제게 포장을 부탁하셨죠.”
라이언은 쥬넬에게서 받아든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리아가 맡겨둔 물건. 무엇일까?
“공작님의 생일에 맞춰 가져다 달라고 하셨거든요. 미리 가지고 계시면 들킬지도 모른다면서요. 깜짝 선물을 원하셨는데 참으로 깜짝 선물이 되었군요.”
상자 안에는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라이언은 한참 동안 시계를 쳐다보았다. 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시계를 샀을까? 어떻게 전해 주려고 했을까?
“내가 죽을 것 같나?”
라이언이 쥬넬에게 물었다. 미리 선물을 준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죠. 다만 저는 공작님께서 그 시계를 보며 더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시기를 바라며 드린 겁니다. 사랑스러운 부인과 함께 말이죠.”
“고맙군.”
라이언은 동그란 회중시계를 집어 들어 재킷 앞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리아를 느끼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시계를 집어넣은 주머니를 손으로 꾹 누르며 라이언은 리아를 떠올렸다.
***
낡은 철문이 삐걱대며 열렸다. 리아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재빠르게 문 앞에 다가가 앉았다.
열린 문 사이로 음식이 놓인 쟁반이 들어왔다.
“저녁을 가져왔어요.”
한나의 목소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오직 한나만이 탑의 출입이 허락되었다. 덕분에 그녀는 무거운 쟁반을 들고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렸다.
“말씀하셨던 물건을 챙겨왔어요.”
한나가 점심을 가져 왔을 때도 리아는 별다른 말 없이 음식을 가져가고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을 불러 줄 뿐이었다.
다행히 한나는 약간 경계를 푼 상태였다.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릴 일도 없거니와 음식을 주고받는 구멍은 주먹 두 개가 오갈 정도로 작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한나는 편한 옷가지 몇 벌을 곱게 접어 몇 차례에 걸쳐 구멍으로 들이밀었다.
“고마워. 나 때문에 한나가 고생이네.”
다정한 리아의 말에 한다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계단이 너무 많아서 오르내리기 힘이 들지? 조금 쉬었다가 가. 그들에게는 내가 힘들게 했다고 하면 되잖아.”
리아는 한나를 살살 구슬렸다. 잡아 두고 이것저것 말을 걸다 보면 그녀도 모르게 쓸 만한 정보를 이야기해 줄지도 몰랐다.
“기다렸다가 쟁반을 가져가. 다시 올라오는 수고할 필요 없고 편하잖아.”
무척 솔깃한 말이었다. 내려갔다가 이내 또 그릇을 가지러 올 생각을 하니 아찔했던 것은 사실이다.
공주를 탑에 가둬 둔 것은 비밀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한나 혼자만이 모든 일을 해야 했다. 덕분에 그녀는 무척 지쳐 있었다.
“내가 금방 먹을게. 메리 어서 저녁을 먹으렴.”
리아는 한나를 안심시키며 더 호들갑을 떨었다. 외부와 연결된 끈이라고는 한나가 유일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구슬려 정보를 얻어야 했다.
밖이 조용해지자 리아는 고개를 숙여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떨어진 바닥에 한나가 앉아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왕궁에 오자마자 마주쳤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레오니의 기억이 남아 있어 그런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레오니는 단 한 명의 시녀도 기억하지 못했다. 듣기로는 한나가 레오니를 근처에서 모셨던 유일한 시녀라고 하는데 전혀 기억에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본 걸까? 리아는 베드포드 성에서부터 렌포드까지 그동안 만났던 사람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한나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분명 본 적 있는 얼굴이라는 확신이 더해졌다.
“한나.”
리아가 한나를 부르자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
“그, 그게 저는 잘….”
“장례식은 어떻게 되었어?”
바벨로프는 던컨이 죽었다고 했다. 그 말이 진짜라면 지금쯤 국상이 치러지고 있을 것이다. 물론 거짓말이라고 예상하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장례요? 누구 장례식이요? 위독하시다고 들었는데….”
한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왕비 제시카는 한나에게 공주와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순식간에 한나의 표정이 달라졌지만 리아는 이미 답을 얻었다. 던컨은 죽지 않았다. 위독하다는 말이 신경 쓰였지만 살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리아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발레포르를 반복해서 여러 번 불렀다. 라루체는 사라졌다. 그래도 워낙에 강력한 보물이었으니 그 흔적이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지는 않을까?
‘발레포르 제발 응답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