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부인의 비밀 104화. 욕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제시카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한 듯 물었다. 일은 저질렀는데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던컨은 사라졌고 라이언은 도망쳤다. 공주를 인질로 잡은 것이 그나마 다행일 정도였다.
“왕은 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혹시 그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 것이 없느냐? 여길 빠져나간 것은 베드포드 공작뿐이야.”
사방을 빽빽하게 둘러싼 병사들 탓에 몰래 도망을 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라이언처럼 대놓고 뚫고 나간 것이 아니라면 던컨은 아직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무, 무엇을 말이에요?”
“밀실! 분명히 이 안에 밀실이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찾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바벨로프의 병사들이 밤새도록 개미 한 마리 놓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왕의 침실 및 집무실 등 왕이 숨을 만한 곳을 전부 뒤졌지만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전 모르겠어요. 그는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어요.”
제시카가 비참하게 중얼댔다. 10년이나 부부로 지냈지만 던컨의 마음 한 자락도 얻어내지 못한 그녀였다. 사이가 좋았을 때도 그 애정이 온전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빠져나간 것은 오직 베드포드 공작 혼자였다. 공작의 종자와 왕은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해. 지금 나의 병사들이 온 성안을 지키고 있다. 그 어디에서도 왕은 발견되지 않았지.”
“그럼 그가, 던컨이 이 안에 숨어 있다는 건가요?”
“비상시를 대비해 밀실 하나 만들어놓지 않은 왕가가 있을까. 분명 그는 그곳에 숨은 거겠지. 아무리 밀실이래도 입구는 존재한다. 무조건 찾아야 해. 왕을 찾지 못한다면 이번 거사는 성공하지 못한다.”
제시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폭풍과도 같은 밤이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이미 지나 버린 밤. 되돌릴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숨었다면 찾아내야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게 확실하다면 그는 더 도망칠 곳이 없어요. 아무리 밀실이래도 입구는 있는 법이니까요. 찾기 어렵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제시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이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패는 죽음뿐. 두려움 따위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베드포드 공작이 걱정이에요. 백성들은 그가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눈치에요. 이렇게 시간만 죽이고 있다가 그가 공격이라도 해온다면….”
“레오니 공주. 우리에겐 레오니 공주가 있지 않니.”
레오니 공주를 언급하는 바벨로프의 얼굴에는 욕망이 가득했다. 제시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재빠르게 다시 떴다. 딸 앞에서도 감출 수 없는 욕정이라니. 하긴 그에게 자신이 딸이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제시카는 던컨을 떠올렸다. 그가 조금만 사랑을 주었더라면, 조금만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왕자를 낳지 못한 왕비의 최후가 어떨지 그는 진정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걸까?
“제가 찾아볼게요.”
주먹을 꼭 말아 쥔 채로 제시카가 바벨로프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10년이었다. 던컨과 함께한 세월이. 던컨의 침실과 서재에 가장 많이 드나든 것도 그녀였다.
“앤 공주는 어디 있지?”
바벨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앤을 찾았다. 오늘 열리기로 했던 생일 파티는 취소되었고 앤은 유모와 함께 왕비 궁 가장 깊숙한 내실로 자리를 옮겨갔다.
“유모와 함께 잘 있어요.”
“그 아이를 잘 지키거라. 일이 잘못될 경우 그 아이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 될 수도 있어.”
바벨로프가 눈빛을 번뜩였다.
“앤이 잘못되는 것은 아니겠죠?”
제시카의 음성이 떨렸다. 애정을 준 적은 없지만 그래도 딸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앤의 생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공주는 어머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들떠 있었다.
“내가 왕좌에 앉을 수 없다면 그 아이가 왕가의 유일한 핏줄이어야만 해.”
제시카는 고개를 숙이고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왕이 되려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는걸 진정 모르는 것일까? 죽이고 빼앗는다고 쉽게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것을?
잘못된 욕심임을 알지만 제시카에게는 선택 권한이 없었다. 던컨의 애정을 얻지도 못했고 왕자를 낳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말에 반기를 들고 반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버림받은 왕비로 늙어가느니 무모한 도전일지라도 한 번쯤 쓸모 있는 딸이 되고 싶었다. 쉽게 오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되는 것도 아니잖아.
이쪽도 저쪽도 평탄치 않은 길이었지만 던컨의 눈동자에 서렸던 경멸이 제시카의 결정을 도왔다. 기름을 뒤집어쓰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길이 될지라도 그 경멸만은 잊지 못하리라.
처음부터 던컨을 기만한 것은 그녀였다는 것을 제시카는 몽땅 잊어버렸다.
“곧 대신들이 몰려올 테지.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지난밤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이미 다 보았을 텐데 이리저리 분위기만 살피고 있겠지. 이미 반 이상이 내 편이라 별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언행을 조심하거라. 다들 자기 살길을 찾으려 애쓸 테니 어려울 것도 없을 거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제시카는 표정을 숨기고 공손히 대답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군부의 총사령관 피어스가 들어왔다.
“어서 오게.”
피어스는 바벨로프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이내 상황보고를 시작했다.
“병사들을 시켜 르셀 곳곳에 벽보를 붙였습니다. 앤 공주님의 생일 파티 때문에 귀족들이 이미 많이 모여든지라 이야기가 금방 퍼졌습니다.”
“다들 믿는 눈치인가?”
“믿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벌써 어느 편에 서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겁니다.”
“베드포드 공작은?”
“숲을 전부 뒤졌지만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델 궁 뒤편으로 이어진 담을 넘으면 곧장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그 숲을 전부 뒤졌지만 라이언을 찾지 못했다. 숲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였다.
“아무래도 도시 쪽으로 몸을 숨긴 것 같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시면 즉시 수색을 시작하겠습니다.”
“기필코 그를 죽여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애쓴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된다.”
피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을 죽이지 못하면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시작된 전쟁은 누군가 죽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부상이 심하다고 들었다. 무조건 그를 찾아내도록. 이번 일이 성공하면 자네는 일등공신이 되는 것이네. 새로운 내 왕국에 자네 만큼 믿을 만한 자가 또 있을까.”
“발견 즉시 사살하겠습니다. 그리고 피올렉샤 레반 왕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뭐라던가? 약을 더 보내 준다고 하던가?”
바벨로프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가 조금만 더 도와준다면 지금 이 시련도 금방 끝나리라.
“죄송합니다. 그쪽에서도 금지된 약물이라 쉽게 제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미 많은 것을 도왔으니 약속을 꼭 지키길 바란다는 서신이었습니다.”
피어스의 대답을 들은 바벨로프의 이마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제 와 한 발 빼려 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피올렉샤의 레반 왕자는 증폭제를 주는 대신 국경 지역 땅 마온을 원했다. 땅을 받고 싶었다면 약을 더 넘겼어야지. 바벨로프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작디작은 나라였다. 왕위를 놓고 왕자들의 싸움만으로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엉터리 나라.
적당히 도움을 주고 이익을 취할 생각이겠지. 그러다 성공해서 땅을 넘겨받으면 왕위를 물려받는데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테니. 실패한다면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겠고.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난 벌써 죽고 싶지는 않군.”
피어스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 역시 죽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반역자라 낙인찍혔으니 망설일 것 없다. 당장 수색을 시작하도록.”
“꼭 찾아내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게. 검은 사자도 그저 인간일 뿐이야. 위급한 순간이 닥치면 레오니 공주를 언급해. 그의 가장 큰 약점이 우리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피어스는 즉시 몸을 움직였다. 병사를 정비해서 르셀 전역에 대대적인 수색을 시작해야 했다. 라이언이 다친 몸을 회복하기 전에 찾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
리아는 밤새 눈물을 흘리는 메리의 등을 토닥였다.
“댄은 괜찮을 거야.”
리아의 다정한 위로에 메리가 코를 훌쩍이며 울먹였다.
“죄송해요. 마님께서도 힘드실 텐데….”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메리가 겁에 질린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그녀로서는 동생 댄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니 그 정도는 더했다.
물론 리아는 발레포르를 믿기에 댄이 무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메리에게 전부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댄 몸 안에 악마가 들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난 괜찮아.”
리아가 애써 의연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메리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었다. 왕궁으로 오자고 졸라댔던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웠다. 라이언을 자신의 손으로 괜한 소용돌이에 밀어 넣은 것 같은 죄책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메리. 그만 울어. 이건 명령이야.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만해. 댄은 무사할 거야. 내가 약속할게.”
단호한 리아의 목소리에 메리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공작님께서는….”
바벨로프는 라이언이 던컨을 죽였다고 했다.
“그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노망난 늙은이일 뿐이에요. 저는 다만 공작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메리. 난 내 남편을 믿어. 분명 무사할 거야.”
리아는 자신과 메리가 갇힌 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벨로프는 그녀를 동쪽 탑 맨 꼭대기에 가둬 두었다. 입구는 하나였고 메리를 올라탄다고 해도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 창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던 곳인지는 모르지만 약간의 가구와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왕께서는….”
간신히 울음을 그친 메리가 말끝을 흐렸다.
“살아 있어.”
“네?”
“바벨로프 그 늙은이는 왕이 죽었다고 했지만 난 믿지 않아. 살아 있을 거야. 살아 있어야만 해.”
리아는 던컨과 라이언 두 사람이 모두 무사하다고 믿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벌써 발레포르가 그녀를 찾아왔으리라.
아직은 지켜야 할 게 있기에 발레포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라루체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이렇게 답답해할 필요 없이 발레포르를 몇 번이고 불렀을 텐데.
리아는 밖이 보이지 않는 창문을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지난날을 후회했다.
“마님은 제가 지켜 드릴게요.”
여전히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메리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리아는 잡혀 온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메리. 네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어.”
리아는 메리의 손을 잡으며 손등을 토닥였다.
“울지 마 메리. 우린 꼭 여길 나갈 거야. 금방 다시 댄을 만나게 해 줄게.”
그때 철문 아랫부분이 삐걱삐걱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리아는 황급히 달려가 문 앞에 납작 엎드려 열린 구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철문 밖에는 왕비 궁에서 보냈다며 자신을 소개했던 한나가 있었다.
그녀는 구멍을 막고 있는 리아의 얼굴 때문에 음식이 담긴 쟁반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들고 있었다. 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밖에는 한나뿐이었다. 문밖을 지키는 병사는 없었다.
“병사가 없군.”
“있어요.”
리아의 말에 한나가 재빠르게 대꾸했다.
“그러니 제발 얼굴을 치워 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밑에서 병사를 불러오겠어요.”
“문을 열어.”
한나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리아는 문을 열라며 명령했다. 한나는 그런 리아의 행동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철문은 열쇠가 없이는 절대 열 수 없고 문 안쪽에서는 따로 탈출할 통로가 전혀 없었다. 바벨로프는 리아 가까이에 병사를 두지 않았다. 혹시라도 리아의 유혹에 넘어가 탈출을 도울까 우려한 탓이었다.
에리스의 딸이었다. 어떤 짓을 저지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여자의 딸. 되도록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제게는 열쇠가 없어요. 저는 그저 음식을 넣어드릴 뿐입니다.”
한참 동안 한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재빠르게 음식이 담긴 쟁반이 안으로 들어오고 즉시 열렸던 문이 닫혔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가능한 것이라면 점심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리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부터 느꼈는데 분명 한나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흐릿한 레오니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리아 자신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거지?
“없으시면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만약 생각나는 것이 있으시면 이따 알려 주세요.”
리아가 고민에 빠진 사이 한나는 급히 철문 앞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