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부인의 비밀 103화. 증폭제
새벽은 고요하게 다가왔다. 마치 지난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어김없이 해는 떠오를 것이다.
매튜는 새벽 내내 열에 시달렸다. 체력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어깨의 상처는 보기보다 더 깊었다. 험한 불길을 헤치고 나온 터라 몸 이곳저곳에 화상을 입었다. 그는 기사도 아니면서 기사 못지않게 몸을 사리지 않고 적과 싸웠다. 심한 부상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엉망인 것은 라이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준비할 틈도 없이 불시에 공격을 당했다. 수없이 많은 적 사이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마치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듯 광기에 절어 있었다.
바벨로프의 병사들이 샤르트 궁을 에워싸고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던컨은 발레포르와 함께 밀실로 몸을 숨겼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탓이었다. 오직 엘리시아의 왕 혼자만 아는 왕의 밀실이었다. 싫다는 발레포르를 억지로 던컨과 함께 밀어 넣은 것은 라이언이었다.
바벨로프는 매튜에게 왕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라이언은 믿지 않았다. 던컨의 생사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왕의 밀실은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만약 그 밀실이 리아의 궁까지 이어졌다면 라이언도 주저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으리라.
라이언에게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은 리아의 상태였다. 애초에 그녀를 혼자 둔 것부터가 잘못된 선택이었다.
깊은 밤 왕을 만나러 가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는 반은 애원이요 반은 협박하다시피 발레포르를 데려가라고 부탁했었다. 그래야 자신이 편히 잠들 수 있다고.
리아는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끝까지 발레포르가 그와 함께해야 안심할 수 있다고 우겨댔다.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라이언은 그 청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왕에게 가는 길에 발레포르와 동행하는 것쯤은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라이언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아는 졸립다고 투덜대는 발레포르를 다그쳐 그에게 딸려 보냈다.
기사단장들에게 리아의 방문 앞을 지킬 것을 명하고 발레포르와 함께 왕을 찾은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길어도 한 시간 이내에 끝날 만남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조금의 전조도 없이 바벨로프의 병사들은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바벨로프가 그런 식으로 그렇게 빨리 반역을 일으킬 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모든 일은 방심에서 벌어진다.
전쟁의 신이라 불리던 검은 사자는 처참하게 당하고야 말았다. 매우 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그가 떠올린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리아였다. 그는 오로지 리아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무런 전술도 없이, 적들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오직 리아에게 가기 위해 칼을 휘두를 뿐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누볐지만 그토록 막무가내로 달려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이기겠다는 생각보다는 오로지 그곳에서 벗어나 빨리 리아를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뿐이었으니 말이다.
다시 불면증은 깊어졌다. 육체의 고통은 정신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뒤돌아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순간이 반복해서 되살아나며 라이언을 괴롭혔다. 진통제를 들이부어도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쥬넬은 깨진 유리창을 정리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밖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성에서 밤새도록 타오르는 불길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메케한 연기가 왕성 주변을 에워쌌다.
해가 뜨기가 무섭게 외성의 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르셀 곳곳을 누비며 벽보를 붙였다.
벽보의 내용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왕께서 위독하신 것도 그러하지만 그 이유가 베드포드 공작의 반역 때문이라니. 베드포드 공작이 반역을 일으켰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엘리시아의 영웅 검은 사자가 반역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벌써 바벨로프 그 늙은 여우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쥬넬이 벽보에 담긴 내용을 라이언과 매튜에게 전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왕을 찾지 못했군. 찾아도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왕을 죽여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매튜가 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밤새 얼마나 앓았는지 눈이 퀭하고 피부는 거칠었다. 핏기가 하나 없는 얼굴로 애써 몸을 일으켜 기대앉은 매튜는 말을 마치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던컨을 죽이고 왕좌에 앉는다고 해서 그냥 왕이 되는 것은 아니지. 물론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는 영원히 반쪽짜리 왕일 뿐이야.”
엘리시아라는 나라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냥 막무가내식은 되지 않는다. 바벨로프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였다. 던컨이 만약 밀실을 들켜 잡혔다면 그에게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살려둘 것이 분명했다. 물론 어떤 식으로 살아 있게 될는지는 장담하긴 어렵지만.
바벨로프에게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은 던컨이 그에게 직접 왕좌를 물려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바벨로프에게는 왕위의 정통성을 증명해 줄 왕가의 물건이 절실할 것이다. 그 물건을 찾기만 한다면 던컨을 죽이고 그가 죽어가며 왕위를 물려줬다고 둘러대면 될 테니까 말이다.
벌써 귀족들 반 이상이 바벨로프 공작에게 포섭된 상태였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언제까지 여기 숨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보아하니 곧 수색이 심해질 것 같은데.”
“바벨로프를 너무 쉽게 봤어. 제대로 대해 줄 생각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받아쳐 줘야지.”
라이언의 눈동자가 몇 년 전 전장을 누비던 그때로 돌아간 듯 번쩍였다. 당장이래도 왕궁으로 달려가 리아를 내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이성을 찾아야 할 때였다.
“단원들은?”
“우선은 흩어져서 각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상시 정해둔 방법으로 단원들은 표식을 남기고 사라졌다. 피해는 있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
매튜는 바벨로프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베드포드 성으로 전서구를 날렸다. 제대로 소식이 도착했다면 베드포드 성에 남아 있던 단원들도 전속력을 다해 르셀로 오는 중일 것이다.
“아무래도 바벨로프의 병사들이 심상치 않아. 정상이 아닌 것 같더군.”
라이언은 자신을 향해 두려움 없이 달려들던 병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초점이 없는 눈동자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각하도 느끼셨습니까? 조심스러운 일이라 저도 쉽게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분명 정상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듯 보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더군. 힘도 강력했어. 바벨로프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 분명해.”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돌아다닌 라이언은 그런 사람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밤 마주친 바벨로프의 병사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감정이 없었다.
“그럼 설마 그들이….”
가만히 듣고만 있던 쥬넬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사들이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짚이는 것이 있었다.
쥬넬이 하려는 말을 알아들은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런 것 같군.”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해독제도 없는 죽음의 약 아닌가요?”
“결국 죽음뿐이지. 그 약을 먹었다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방법은 없어.”
라이언이 수염이 까슬하게 돋아난 턱을 문질렀다. 정말 바벨로프의 병사들이 증폭제를 먹은 것이라면 쉽지 않은 상대였다.
“죽음의 약이라니 그게 뭔가요?”
매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해독제가 없는 죽음의 약이라니.
“한 번 먹으면 되돌릴 수 없는 약이기에 죽음의 약이라 불리지. 피올렉샤에서 전장에 내보내는 병사들의 힘을 증폭시키기 위해 먹였던 약이야. 우린 그걸 간단하게 증폭제라고 불렀지.”
피올렉샤는 엘리시아와 인접해 있는 작은 나라였다. 그들은 늘 엘리시아의 국경지대 마온을 원했다. 몇 번이고 국경을 침략해 마온을 노렸지만 매번 라이언에게 막혀 성공하지 못했다. 마지막 전쟁에서는 증폭제라는 무서운 마약까지 이용했으나 실패하고야 말았다.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병사들에게 증폭제를 주저 없이 먹였다.
증폭제를 먹으면 힘이 두 배로 늘어났으며 고통도 쉽게 느끼지 못했다. 대신 먹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다. 효과는 길면 한 달 정도 유지되었다. 그 후는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자멸한다.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더 컸기에 피올렉샤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증폭제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죽었고 피올렉샤 내에서도 분란이 일어난 탓이었다.
과연 바벨로프의 병사들은 증폭제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 피올렉샤일까?
“증폭제라니 참 무서운 약이군요. 피올렉샤와 관계가 있는 걸까요?”
“더 무섭게 변한 것 같더군. 그래도 그때는 지금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제 마주쳤던 병사들은 아예 자아가 없었어.”
두려움 없이 달려들던 피올렉샤의 병사들을 떠올리며 라이언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바벨로프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이번 바벨로프의 병사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과거 내가 알던 증폭제는 그 효과가 길면 한 달 정도 이어졌다. 약효가 강할수록 유지 기간은 짧지. 바벨로프는 증폭제의 효과가 끝나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할 것이 분명해.”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쓸모없게 되어 버리면 곤란해지는 것은 바벨로프니까요.”
“병사들이 자멸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바벨로프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병사들이 다 죽어 버리면 자신이 불리해질 것이 뻔하니 마냥 시간을 끌지 않을 것이 뻔해.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가 먼저 나서서 우리를 도발하려 할 거야.”
“그럼 각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사단원들이 다 모이는 대로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바벨로프를 칠 생각이다.”
매튜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이 그런다면 그런 것이다. 그의 주인은 전술의 귀재요 전쟁의 신이었고 그에게 하나뿐인 영웅이었다.
“왕께서는 밀실에서 일주일 정도 버틸 수가 있다고 하셨다. 아마 바벨로프의 인내심도 그 정도는 버텨 주겠지. 매튜 자네가 마지막에 목격한 바에 의하면 그가 내 아내를 쉽게 해칠 것 같지 않아서 그나마 안심이군.”
라이언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분노를 억누르는 그의 말투는 무섭도록 음산했다.
“공작부인께서는 분명 무사하실 겁니다. 부인은 끝까지 걱정하지 말라며 저를 안심시키셨습니다.”
라이언은 리아의 용감함을 믿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분명 리아는 안전하게 그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내가 성문을 통하지 않고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 출입구를 알고 있다. 만약 그 출입구가 여전히 건재하다면 우리는 더욱 쉽게 안으로 숨어들 수 있겠지.”
라이언과 매튜는 오래도록 앞으로 닥칠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벌써 전쟁은 시작되었다. 과연 그 끝에 누가 승리자가 되어 서 있을지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만이 알 수 있을 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