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불타는 아델궁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왕궁이 아비규환의 지옥이 되어 버렸다. 방심했던 탓이었다. 함께 웃으며 저녁을 먹고 돌아서자마자 이런 짓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당장 오늘 밤 공격을 해 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 잘못이오! 리아!”
라이언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아델궁 앞에 서서 포효했다.
리아가 사라졌다. 그녀를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니었는데. 순간의 잘못된 판단, 잘못된 선택으로 상황은 엉망이 돼 버렸다.
던컨은 생사를 알 수 없었고, 라이언 자신은 반역자가 되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손써 볼 틈도 없이 그들의 계략에 당하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외성에 잠들어 있던 검은 기사단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반 이상이 잡혀들어갔으며 몇 명이나 도망쳤는지 아직 파악도 되지 않았다.
엘리시아 왕국의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공격해 왔기에 단원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던 탓이었다. 그들은 검은 기사단 이전에 왕국의 충성스러운 병사이기도 했다. 단원들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에 나섰을 때는 이미 상황을 되돌리기엔 많이 늦은 뒤였다.
그때 리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간절하게 애원했다 해도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고작 기사단장 두 명과 매튜만을 남겨둔 채 아델궁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 온 용병들일까? 자신을 공격했던 병사들은 분명 평범한 자들이 아니었다. 이제 어쩐단 말인가?
“가, 각하!”
그때 시뻘건 불길 뒤에서 누군가 쩔뚝대며 걸어 나왔다. 매튜였다. 매튜는 한쪽 어깨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얼굴은 엉망이었고 옷은 너덜댔다.
“괜찮으십니까?”
매튜가 라이언 앞에 무릎을 꿇으며 흐느꼈다.
“리아는? 내 아내는 어디 있는 거지?”
“부, 부인께서는….”
“말하거라. 당장 말해!”
라이언은 두려웠다. 아델궁은 뛰어들 수도 없을 만큼 다 무너져 내려 불타는 중이었다. 안에 누군가 살아 있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각하, 우선 여길 떠나셔야 합니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언제 적들이 다시 공격해올지….”
라이언은 그대로 몸을 숙여 매튜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매튜! 말해. 어떻게 된 거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십니다. 부인께서는 살아계십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피해 훗날을 도모해야 합니다.”
매튜는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지금 여기서 라이언이 당장 리아를 찾겠다고 나서게 되면 끝이었다. 사방은 적으로 가득했고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아니, 살아나갈 수 있는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가면,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나면 제가 아는 것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각하! 정신을 차리고 여길 나가야 합니다. 부인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절대 아무 일도 없으실 겁니다.”
“가자.”
라이언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그 역시 많이 지쳤고 다쳤다. 동시에 달려든 용병 다섯을 처리하고 달려온 길이었다.
다행히 아델궁은 왕성의 가장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성벽을 하나 넘으면 곧장 몸을 숨기기에 좋은 숲이 있었다.
리아가 살아 있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란 매튜의 말을 믿어야 했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라이언은 수많은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는 노련한 병사였고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후퇴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에 휩싸인 아델궁 앞은 마치 한낮처럼 환했다. 빨리 몸을 숨겨야 했다. 아침 해가 밝아오기 전에 어둠 사이로 스며들어야 했다.
라이언은 절뚝대는 매튜를 부축한 채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
산속으로 숨으려던 계획을 저지한 것은 매튜였다. 적들이 가장 먼저 수색할 지점은 누가 뭐래도 아델궁과 인접한 숲이었다. 그리고 당장 라이언과 매튜 둘 다 치료를 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 라이언은 쥬넬 버켄의 의상실을 떠올렸다. 쥬넬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르셀 한복판으로 스며들었다. 아직 왕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르셀 거리는 조용했다. 모두 잠든 깊은 밤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대부분을 렌포드에 있는 의상실에 상주해 있는 쥬넬이 현재 르셀에 와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라이언이 부탁한 리아의 드레스 때문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죠?”
의상실 2층에 있는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쥬넬은 레이스가 가득 달린 잠옷을 입은 채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문을 부수고 들어온 건가요?”
소란스럽게 문을 두드렸다가 누구라도 알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문을 부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고쳐 줄게.”
라이언이 의상실 한가운데 놓인 화려한 새틴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오 마이 갓뜨! 지금 그 몸으로 거길 앉다니.”
“쥬넬 시끄러워.”
“버켄 씨. 지금 공작님의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당장 치료를 해야 해요. 의사를 불러와야 하는데….”
그제야 더러운 옷 말고 라이언의 상처가 쥬넬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엉망인 매튜의 상태도.
쥬넬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곧장 다시 침실로 올라가 의료도구를 한 아름 챙겨왔다.
***
“실력이 녹슬지 않았군.”
찢어진 허벅지를 꿰매는 쥬넬을 보며 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용히 하세요. 자꾸 말하면 못나게 꿰매 버릴 거니까.”
“뭐죠? 의사입니까?”
당황한 것은 매튜였다. 라이언이 쥬넬의 의상실에 가면 다 해결된다고 했을 때도 그는 반신반의했었다.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몇 번이나 물을 때마다 라이언은 그럴 필요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엔 그랬을지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꿰매는 거 하나는 예술이지.”
“이제 살갗을 꿰매는 건 취미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여성스러웠던 쥬넬의 말투도 달라져 있었다. 매튜는 쥬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매튜가 아는 쥬넬은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그것도 아주 여성스러운 남자 디자이너.
“매튜. 리아는 어디 있지?”
제대로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고통스러운지 이마를 잔뜩 찡그린 라이언이 매튜를 향해 물었다.
“각하께서 댄과 함께 왕께 급히 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벨로프 공작이 찾아왔습니다.”
바벨로프. 이 모든 일의 원흉이 그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분명 공작부인이 무사하다고 하였지? 어찌 그렇게 장담할 수 있지?”
그들의 목적은 리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던가!
“바벨로프, 그 짐승만도 못한 흉악한 자는….”
차마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내용이었다. 매튜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벌렸다.
“부인을 원하셨습니다.”
“뭘 원해요?”
“헉!”
매튜의 말에 놀란 쥬넬이 손을 떠는 바람에 바늘이 살갗을 깊게 찔렀는지 라이언이 심한 통증을 느끼며 숨을 참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죠? 부인을 원하다니?”
“매튜. 전부 말해.”
라이언의 꽉 잠긴 목소리가 무섭게 내려앉았다.
***
바벨로프는 수많은 병사를 데리고 아델궁을 포위했다.
리아를 방 안에 두고 남겨진 기사단장 둘이 입구를 지켰지만 결국 수적인 공세에 시달리다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끝없이 달려드는 수많은 병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매튜도 마찬가지였다.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리아는 바벨로프의 병사가 매튜를 죽이기 직전 직접 방문을 열고 나왔다. 덕분에 매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만둬요!”
붉은 머리를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채로 분노로 가득한 황금빛 눈동자를 번쩍이며 나타난 리아는 쓰러진 기사단장들을 보고 놀라 휘청댔다. 매튜는 그들이 이미 죽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내 리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매튜! 괜찮은가요?”
“저, 저는 괜찮습니다.”
가까스로 버티던 매튜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매튜를 향해 달려가려던 리아를 가로막은 것은 바벨로프였다.
“레오니 공주.”
“바벨로프 공작. 이게 무슨 짓이죠? 도대체 원하는 게 뭔가요? 날 죽이러 온 건가요?”
마음속으로 발레포르와 라이언을 간절히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라이언 베드포드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안타깝게도 전하께서는 역적 베드포드의 손에 사망하셨습니다.”
“헛소리하지 마.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리아는 콧방귀를 끼며 바벨로프를 비웃었다.
라이언이 반역을? 던컨이 죽었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던컨을 지켜 달라고 싫다는 발레포르를 협박하다시피 보낸 것인데. 발레포르가 제대로 던컨 옆에 붙어 있다면 그가 죽었을 리 없다.
“안타깝게도 사실입니다. 왕께서는 운명하셨고 반역자 베드포드도 곧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내 남편은 당신에게 죽임을 당할 만큼 약하지 않아.”
“베드포드는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용맹하고 명예로운 엘리시아의 병사들이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누가 누구더러 반역자라는 것이지?”
리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댔다. 바벨로프는 당당하게 서 있는 리아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름답군.”
바벨로프는 아주 천천히 리아에게 다가가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단번에 잡아챘다.
“아주 탐이 나.”
“놔! 이 미친 늙은이가.”
이미 다가오는 눈빛에서 추잡한 욕정을 읽은 리아는 바벨로프의 손을 탁하고 쳐내며 그에게 잡혔던 턱을 거칠게 문질렀다. 온몸에 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았다.
“반항하는 꽃을 꺾는 것이 더 즐거운 법이지.”
바벨로프는 리아의 턱에 닿았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반역자의 가족은 몰살을 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듣지 않아도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노망난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고.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리아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서서히 다가오는 바벨로프를 보며 리아가 소리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순순히 당하고 있을 리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양 주먹을 들어 올리며 권투를 하듯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재빠르게 메리가 달라붙어 같은 자세를 흉내 냈다.
“메리!”
“제가 지켜 드릴게요.”
가녀린 여성 둘이 사방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꼴이라니. 리아의 그런 모습은 바벨로프의 욕망을 더 부채질할 뿐이었다.
“공주님. 공주님께서는 아마도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십니다. 그 여린 주먹으로 개미 새끼 한 마리라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바벨로프는 리아를 향해 음험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공주님을 모셔라.”
리아는 바벨로프의 명령으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병사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뻗었다. 진짜 공격할 줄 몰랐던 탓에 방심한 병사는 퍽 소리와 함께 코를 잡고 뒹굴었다.
“이거 곤란하게 되었군요. 되도록 조용히 모시고 싶었는데.”
“난 가지 않아.”
“공주님. 버텨 보셔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반역자 베드포드는 오지 않아요. 제가 공주님이 아끼는 사람들을 다 죽이기를 원하는 건 아니겠죠? 아름다운 두 눈에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무슨 말이지?”
바벨로프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쓰러진 매튜의 목으로 칼날이 겨눠졌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매튜가 힘겹게 말했다.
“공주님께서 순순히 따라 나오시면 살려는 드리죠. 그 뒤에 서 있는 시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아에게는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 이미 기사단장 둘이 자신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더는 누군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은 곁에 없었다. 다만 바벨로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것만이 리아가 품을 수 있는 희망이었다. 아직 라이언은 살아 있다. 살아 있다면, 살아 있기만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매튜는 아델궁에 남겨졌고 끝까지 리아의 다리를 잡고 매달린 메리만이 그녀와 함께 떠날 수 있었다.
바벨로프는 매튜를 아델궁 안에 둔 채로 불을 질렀다. 매튜가 살아나온 것은 하늘의 가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