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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101화 (101/116)

101화. 다가오는 위기

“오늘밖에 기회가 없어.”

“네?”

만찬장을 빠져나오며 바벨로프는 이를 바득 갈았다.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대로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냐!”

제시카에게 분노의 화살이 돌아갔다.

“그, 그것이….”

제시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로비의 말대로라면 베드포드 공작 부부는 분명 던컨을 범인으로 알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만찬이 진행되는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언제부터 공주를 챙겼다고 살가운 척하는 던컨이 가증스러웠다.

“던컨이 이미 베드포드 공작과 비밀스레 만났다고 하였지?”

아델궁으로 보냈던 한나가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이른 새벽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던컨이 시종 한 명만을 대동한 채 공작을 찾아왔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움직였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만남은 아니었다.

그래서 급히 일을 꾸민 것인데. 로비는 분명 계략이 성공했다고 호언장담했다.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며. 더군다나 사건을 밝혀낼 수 있는 유일한 증인도 처리해 버렸다고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긋나버린 걸까?

“바로 오늘 새벽이에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닙니다.”

“어리석은 것. 벌써 그들 간에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것을 모르겠느냐! 베드포드 공작이 한동안 왕성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그 뜻이거늘.”

“그저 성에 머문다는 것뿐이잖아요. 아무리 베드포드 공작의 위세가 드높다 해도 아버님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에요.”

손톱 끝을 깨물며 제시카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를 쳐놨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던컨에게 무시당하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두려운 것은 아버지 바벨로프를 실망시키는 일이었다.

“기회는 오늘뿐이다. 그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뒤를 쳐야 해.”

“무, 무슨 말씀이세요?”

바벨로프는 주위를 둘러봤다. 쉽게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었다. 궁에는 바닥에도 귀가 달렸다고 했다.

“우선 네 궁으로 가자. 준비할 것이 많다.”

고딘 빈센트 바벨로프 공작. 엘리시아의 재상이자 왕의 장인.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온 그는 권력이 커질수록 숨길 수 없는 커다란 욕심이 생겼다.

‘어째서 나는 왕이 될 수 없는 것인가!’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한참 부족한 왕 던컨에게 고개를 숙일 때마다 가슴 한쪽에서 울컥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지만 반역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왕은 허수아비였고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바벨로프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변함없는 것은 없다. 젊은 왕은 점점 나이가 들었고 욕심이 많아졌다. 바벨로프는 이제 더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바벨로프는 사병을 키우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왕실의 총사령관도 그의 편이었다. 그렇지만 오늘 만찬에서 왕은 말했다. 베드포드 공작에게 총사령관을 맡기고 싶다고. 왕실의 군대를 모두 라이언의 손아래 두겠다는 말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조만간 권력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왕의 눈빛만 보아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왕이 베드포드 공작을 부른 이유. 그에게 궁에 머물 것을 권유한 이유. 총사령관직을 주겠다는 이유. 모든 것들의 이유는 바벨로프 자신이었다.

더는 기회가 없다. 총사령관 자리까지 넘어가게 된다면 더더욱 방법이 없었다.

그는 오늘 무력으로 왕을 칠 작정이었다. 베드포드 공작도 함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그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른 채 편히 쉬고 있을 때 공격을 하리라.

이제 왕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적어도 베드포드 공작, 라이언이 그의 뒤에 있는 한은.

시간이 없었다. 내일이 바로 앤 공주의 생일파티였다. 왕은 분명 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라이언을 내세워 공표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귀족 중 일부는 베드포드 공작의 편에 설 것이다.

왕비 궁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걸어 잠근 제시카는 아버지 바벨로프를 향해 참아왔던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무얼 그리 걱정하느냐. 이제 너는 왕의 부인이 아니라 왕의 딸이 될 것인데.”

“바. 반역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너도 곧 내쳐지게 될 것이다. 왕이 베드포드 공작과 손을 잡았다. 많은 귀족이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게 되겠지.”

제시카는 아버지 바벨로프의 결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그냥 진실을 밝히면 되는 것이잖아. 잊어버리신 걸까? 처음 베드포드 공작과 레오니 공주를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을 때 나눴던 대화를.

“우리에겐 그걸 막을 수 있는 카드가 있잖아요.”

바벨로프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시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그 방법을 쓰려고 했었다. 오늘 만찬장에서 공주를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 때문에 둘을 결혼시킨 것이었잖아요.”

“그 방법은 쓰지 않기로 했다.”

악녀 에리스의 딸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된다면, 공주를 곁에 두기 어려워진다. 왕위를 찬탈한 후 남겨진 공주를 취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붉은 머리에 새하얀 피부. 색기가 가득한 입술. 공주를 떠올리자 바벨로프의 심장이 미친 듯 요동쳤다. 오늘 이 계획에 기필코 성공하여 공주를 가지리라.

“왜? 내가 실패할 것으로 생각하느냐?”

아무리 방심하고 있다고는 해도 상대는 검은 사자 베드포드 공작이었다. 던컨 혼자가 아니었다. 물론 확률은 반반이었다. 무턱대고 반역을 일으키지는 않을 테니까. 아버지 바벨로프 공작이 이토록 당당한 이유는 필시 준비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제시카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던컨과의 사이는 엉망이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아무리 딸이라지만 제시카는 왕비였다. 바벨로프는 그동안 그녀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그렇지만 이제 존칭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벌써 준비는 끝이 났다. 내가 명령만 내리면 1시간 이내에 병사들이 샤르트 궁을 둘러싸게 될 것이다. 아까 너도 듣지 않았느냐. 베드포드 공작에게 총사령관을 맡기겠다는 말을.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이런 기회는 오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이미 그들은 자신을 적으로 판단했고 경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밤이 끝나고 새날이 밝아오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그,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반역이 성공하고 나면 왕과 왕실의 가족들은 모두 같은 운명이었다. 보통의 경우는 그러했다.

“내가 너까지 해칠까 걱정되느냐?”

솔직히 말해 그랬다. 부녀간의 정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그는 앞날에 걸림돌이 된다면 자식도 버릴 사람이었다.

“오직 왕과 베드포드 공작. 둘만 죽일 것이다.”

바벨로프의 계획은 이러했다. 모든 반역에는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반역을 일으키는 것은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어려웠다.

오늘 밤 반역을 일으킨 것은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으로 기록될 것이다. 반역을 일으킨 검은 사자와 그를 막다 죽음을 맞이한 왕.

왕을 죽인 검은 사자를 처단한 것은 고딘 빈센트 바벨로프. 자신이 될 것이다. 우매한 백성들은 지어낸 소문을 마치 진실인 양 믿을 것이 뻔했다.

“검은 사자를 죽일 수 있을까요?”

라이언은 전쟁의 신이었다. 그런 그를 쉽게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덫을 놓아야지.”

바벨로프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만 지나면 엘리시아와 공주 둘 다 모두 자신의 손아래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과분한 욕망은 무모함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

“무엇이 그리 급한지.”

만찬장을 빠져나가는 바벨로프 공작과 제시카 왕비의 뒷모습을 보며 던컨은 혀를 끌끌 찼다. 후식이 나오기도 전에 일찍 쉬어야겠다며 자리를 일어선 두 사람이었다.

“뭐 우리끼리 있어야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눈치는 있는 모양이군요. 알아서 피해 준 걸 보면.”

“그런가? 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사라지니 내 속도 편하긴 하군.”

던컨은 눈썹을 꿈틀대며 바벨로프와 제시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후식은 내 서재에서 먹는 것이 어떻겠나? 여긴 너무 넓어서 말이지.”

라이언과 리아의 답을 듣기도 전에 던컨은 시종을 불러 자리를 옮길 것을 명했다. 리아는 라이언을 쳐다보았다. 던컨은 라이언더러 총사령관을 맡아 달라고 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던컨에게는 라이언이 필요했고 어떻게든 옆에 그를 묶어 놓을 구실이 필요했으니.

총사령관을 맡게 된다면 당분간 왕성을 떠나기는 힘들 것이다.

시종 한스의 안내를 따라 던컨의 서재에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범인은 왕비군.”

왕인 그가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었다면 남은 것은 왕비뿐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지. 내가 아니면 제시카밖에 없으니.”

의문은 어째서 왕비가 공주를 해치려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난 통 모르겠네. 어째서 왕비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이유 없는 미움도 존재하는 법이지요. 사실 왕비가 우릴 감시한 것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닙니다. 제 아내를 공격한 집사는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왕비의 명으로 접근한 것이죠.”

던컨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처음 라이언과 공주의 결혼을 명령했을 때 제시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자네를 막기 위해 결혼을 명했네. 아주 이기적인 결정이었지.”

제시카가 옆에서 바람을 넣기는 했지만, 결정한 것은 던컨 본인이었다.

“자네는 백성들의 영웅이었지. 백성들은 나보다 자네를 더 믿고 의지했고 나는 두려웠네.”

이미 라이언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모엘르 검을 포로 삼아 억지로 결혼을 요구한 이유를.

“그 결정을 내리신 것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드립니다.”

원망이 아닌 감사의 말이 돌아오자 던컨은 의아해하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것은 리아뿐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감사 인사라니.

“감사하다고?”

라이언이 결혼한 이후 던컨은 여러 날을 죄책감이 시달렸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오니와 라이언이 맺어지도록 협박을 했다니.

돌아가신 어머니 앤에게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떠난 동생에게도.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선대 왕인 벨로트는 앤과 던컨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몇 번이고 태어날 아이가 딸이라면 베드포드가에 시집보내겠다는 말을 했었다. 라이언의 아버지 아놀프 베드포드와 벨로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우였다. 그렇지만 벨로트의 말은 지켜지지 못했다.

배 속의 아이는 딸이었으나 태어나기도 전에 죽임을 당했고 왕비 앤도 죽었다.

그 아이가 죽지 않고 태어나 자랐다면 지금 라이언 곁에는 레오니가 아닌 그 아이가 서 있었겠지.

“그때 그런 결정을 내리시지 않으셨다면 제가 제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라이언의 대답에 던컨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는 두 사람을 보니 더했다.

공주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난 과거를 완벽하게 잊기는 어려웠다.

“자네가 왕실의 일원이 되는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끝이 났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던컨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이어졌으니 말이다. 라이언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던컨은 고개를 흔들었다.

“뭐 별것이 있겠나. 자네가 레오니와 결혼한 것이 운명이라는 말이지.”

“이제 그만 앞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어요? 벌써 밤이 깊어가고 있어요.”

살짝 하품하며 리아가 끼어들었다.

“정말 라이언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실 건가요?”

리아의 황금색 눈동자가 던컨에게 향했다.

“현 총사령관은 바벨로프 공작의 사람이지. 빨리 교체해야만 해. 지금까지는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지. 라이언 자네보다 더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총사령관은 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왕실에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면 왕의 명령이 없더라도 본인의 판단으로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라이언에게 그 자리를 맡길 생각이다. 우선 내일 파티에 모인 귀족들 앞에서 내 곁에 라이언이 함께할 것이란 것을 알려야겠지.”

“혼란스럽겠군요. 바벨로프 공작에게 붙어 있던 귀족 중 상당수가 마음을 바꾸겠죠.”

라이언의 말에 던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바벨로프를 쫓아내긴 어려우니 서서히 일을 추진해야겠지. 우선 우리의 동맹을 위해 한잔하지 않겠나?”

던컨이 붉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고맙네.”

던컨은 참으로 오랜만에 얼굴 가득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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