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이상한 만찬
적절한 시간에 도착해 준 메리 덕분에 리아는 완벽하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메리는 앤 공주의 생일파티에 입을 드레스를 포함한 여러 벌의 의상을 가져왔다. 물론 모든 것은 라이언의 배려였다.
“메리, 정말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난 아마 엉망이었을 거야.”
“그런 말씀 마셔요. 마님은 늘 아름다우신걸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나 역시 메리 네가 보고 싶었어. 참! 베드포드 성은 어때?”
리아는 베드포드 성이 그리웠다.
이 세상을 마주했던 곳. 라이언과 처음 만났던 계단. 첫 키스의 추억이 담긴 장미 덩굴. 그곳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모두 마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마님이 안 계시니 가뜩이나 넓은 곳이 더 텅 빈 듯 허전해요.”
“돌아가야지. 이곳 일이 마무리되면 바로 베드포드 성으로 갈 거야.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
베드포드 성을 떠올리니 코끝에 장미 향기가 은은하게 맴도는 느낌이었다. 떠나올 때는 몰랐다. 이토록 그곳이 그리울 줄은.
“장미 비누는 어때?”
서신을 통해 비누제작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리아가 직접 해야 했던 일이었다. 모든 것을 메리에게 미뤄둔 것만 같아 미안했다. 그녀에게 많은 부담을 지게 한 것 같아서.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마님께서 일깨워 주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이런 시도는 하지 못했겠죠? 장미 비누는 정말 완벽해요.”
메리가 르셀까지 급히 온 이유 중 하나는 앤 공주에게 선물할 장미 비누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이언은 매튜와 함께 장미 비누를 세상에 공개할 시기를 조율 중이었다. 많은 귀족이 모인 왕궁의 파티만큼 완벽한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모두 메리 네 덕분이야. 너를 만난 건 내게 큰 행운이야.”
진심 어린 말에 메리는 감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참아보려 해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리아는 그런 메리의 눈물을 모른 척해 주었다.
“그만 가야겠다. 이러다 늦겠어.”
리아의 말에 메리가 정신을 차리며 눈물을 닦았다. 마님을 늦게 만들 수는 없지. 메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리아를 살폈다.
“완벽해요. 마님 정말 완벽해요.”
연한 에메랄드빛 엠파이어 드레스가 리아의 가녀린 몸 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틀어 올려 우아함을 더했고 목걸이나 귀걸이를 따로 착용하지 않은 뽀얀 피부는 그 자체로 빛이 났다.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리아의 외모는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랄 만큼 붉었던 빨간 머리도 이제는 점점 옅어져 금빛이 섞여들었다. 물론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전혀 없는 엘리시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새빨간 느낌이었지만 분명 처음과는 달랐다.
변한 것일까? 아니면 익숙해진 것일까? 리아는 이제 더는 거울 속에 서 있는 여자가 낯설지 않았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을 점점 잊어가는 것일까? 어쩌면 그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
리아는 잡생각을 떨쳐내며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왕과 왕비를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순간이 다가왔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은 안다.
리아는 이 모든 것을 빨리 끝내고 라이언과 함께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원하는 전부였다.
***
- 왕비궁
“오늘 만찬이 있다죠?”
바벨로프가 제시카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맘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딸이었다. 처음 던컨의 눈에 들어 그의 총애를 받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남자 마음 하나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꼴이라니.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 말씀드릴 소식이 있어요.”
제시카는 연신 웃고 있었다. 로비의 말에 따르면 넬슨의 밑에 있던 하녀가 중요한 임무를 충실히 마쳤다고 했다.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물론 좋은 소식이겠죠?”
“베드포드 공작이 던컨을 의심하고 있을 거예요. 둘 사이가 가까워질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확실한가요?”
“네. 그럼요. 확실해요.”
확신에 찬 제시카의 대답에도 발레포르는 그녀가 미덥잖았다.
“오늘 만찬에 나도 참석을 해야겠어요.”
“네? 그, 그것은.”
바벨로프는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가족 만찬이라면서요. 이 아비는 가족이 아닙니까? 충분히 자격이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따님?”
제시카의 말을 그냥 믿을 수는 없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왕과 베드포드 공작의 사이가 어떠한지를. 만약 베드포드 공작이 정말 왕을 의심하고 있다면 그 분노는 쉽사리 숨길 수 없을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적대감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마도 긴 저녁이 될 것 같습니다.”
바벨로프는 지금 큰일을 계획 중이었다. 어차피 지금도 엘리시아를 다스리는 것은 허수아비 왕인 던컨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보면 알게 되겠죠. 계획하신 일이 정말 성공했는지는. 진정 저는 따님의 계획이 성공하셔서 지금 그 자리를 오래 지키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아비의 마음을 잘 아시겠지요?”
제시카는 드레스 자락 사이로 주먹을 꼭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들었지만,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자리를 오래 지키기를 바라고 있다고? 계획이 실패했다면 당장 왕비의 자리에서 내치겠다는 말이겠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 말입니다.”
바벨로프는 에리스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있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에리스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상사병에 걸려 속앓이를 했었지. 그때 에리스를 만나 본 남자라면 누구라도 그러했듯이.
“그만 가시죠. 왕비께서 만찬에 늦으셔야 되겠습니까. 모름지기 주인이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먼저 앞장서 나가는 바벨로프를 바라보며 제시카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말하는 주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던컨일까? 아니면 그 자신일까?
***
- 샤르트 궁, 만찬장
“전하, 무척 수척해 보이십니다. 어디 아프신 것은 아니십니까?”
바벨로프가 뻔뻔한 얼굴로 던컨을 향해 물었다. 던컨은 말도 없이 바벨로프를 동행한 제시카를 쳐다봤다.
“마침 아버님께서 궁을 방문하셨다기에 제가 함께 와 주시길 부탁드렸어요. 괜찮으시지요?”
“마침 궁을 방문하셨다. 뭐 어쩌겠소. 이렇게 벌써 와 버린 것을.”
던컨의 뼈있는 말에도 바벨로프는 모른척하며 딴소리를 했다.
“사랑스러운 앤 공주의 생일파티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무슨 고민이 그리 많으셔서 살이 빠지셨습니까? 아무래도 왕비 마마께서 신경을 많이 쓰셔야겠습니다.”
“제가 제대로 보살펴 드리지 못한 탓이에요. 전하께서 워낙 바쁘셔 곁을 안 주시니….”
던컨이 제시카의 말을 막았다.
“그만.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전하, 어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하십니까. 마마의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후계가 바로 서야 왕실의 힘이 바로 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가? 재상의 생각마저 그러하다면 내 빨리 노력을 해야겠군. 왕비가 왕실에 들어온 지 몇 년이지? 벌써 10년이 넘었던가?”
제시카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던컨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제시카가 아니었다. 무어라 따지려고 입을 옴싹 대려는 순간, 만찬장 문이 열렸다.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과 레오니 엘리시아 베드포드 공작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라이언과 리아가 때맞춰 도착한 것이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라이언과 리아가 던컨을 향해 인사했다.
“어서 오게.”
이미 한 차례 만났지만, 던컨은 여전히 리아의 모습이 낯설었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은 또 새로웠다.
“오랜만이에요. 레오니 공주.”
제시카가 리아에게 아는 척을 하며 방긋 웃었다.
“네, 왕비 전하. 오랜만이에요.”
“변한 모습이 좋아 보이네요. 무척이나 새롭군요. 마치 다른 사람처럼.”
“감사합니다.”
리아가 모른 척 감사 인사를 하며 제시카의 옆에 서 있는 바벨로프를 쳐다보았다.
“아, 엘리시아의 재상이자 저의 아버지이신 바벨로프 공작을 소개하겠어요.”
바벨로프는 제시카가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모르고 리아의 얼굴을 살피느라 정신없었다. 빨간 머리에 새하얀 피부. 황금빛 눈동자. 에리스의 딸임을 증명하듯 그녀는 아름다웠다. 베드포드 공작이 사로잡혔다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누가 에리스 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을까! 에리스와 닮은 듯하면서도 어찌 다른 모습.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눈앞에 있는 여인이 매우 아름답고 유혹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만찬에 참석한 목적도 잊은 채 바벨로프는 리아의 얼굴에 빠져들었다.
“바벨로프 공작? 무슨 일이 있는 거요?”
던컨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바벨로프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지만 혼란스러움은 잦아들지 않았다. 20여 년 전 에리스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충격. 그때와 똑같은 음심이 그의 마음속에 미친 듯 치솟았다.
에리스의 딸이 돌아왔다. 바벨로프의 가슴이 미친 듯 두근거렸다.
그만 저녁을 먹자는 던컨의 말에 모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이언, 불편한 것은 없소? 아델궁이 협소하여 부족한 것이 많을 텐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도록.”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그렇지 않아도 왕비님께서 친절하게 요리사와 시종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왕비가?”
던컨이 제시카를 쳐다봤다.
“네. 당연히 제가 챙겨야지요. 전하께서는 조금도 염려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고 있답니다.”
특이하게도 만찬장에 놓인 테이블은 동그란 식탁이었다.
가장 상석에 던컨이 앉고 제시카와 바벨로프, 라이언과 리아가 그 양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로서로 표정을 너무나도 잘 파악할 수 있는 구조였다.
던컨은 제시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다시 라이언에게 질문을 던졌다.
“라이언, 듣기로는 레오니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제는 괜찮은가?”
던컨이 지난 사고를 언급하자 제시카가 초조한 듯 테이블 밑으로 손을 꼭 말아쥐었다. 무언가 아는 것은 아니겠지?
“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래서 흉수는 잡혔는가?”
라이언은 던컨이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제안에 대한 답을 알려 달라는 것이겠지.
“아직입니다. 그렇지만 유력한 용의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 용의자가 있어? 그럼 망설일 것이 무엇인가. 한시라도 빨리 그 흉수를 잡아들여야지.”
지켜보던 제시카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용의자가 있나요? 그게 누구인가요?”
초조해 보이는 제시카의 모습에 라이언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게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추측일 뿐이라. 다만 의심했던 용의자 한 명을 최근 용의 선상에서 제외했습니다.”
던컨은 라이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용의 선상에서 제외했다니. 그 말은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네. 아마도 머지않아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 전하께서 살펴주신 덕분입니다.”
제시카는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뜻이지?
“전하,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남편과 저는 좀 더 오래 왕궁에 머물고 싶어요.”
이어지는 리아의 말에 던컨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시카밖에 없었다. 바벨로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둘 사이가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나쁠 정도로 가까워지다니.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던컨은 시종을 불러 샴페인을 가져오라 명했다.
“당연히 허락해야지. 우린 한 가족이 아니더냐. 오늘 우리의 만남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어야겠다. 왕비, 왕비도 잔을 드시오.”
던컨은 조력자가 생겼다는 기쁨에 흥겨웠고, 라이언은 이제 닥쳐올 앞날을 걱정했다. 리아는 제시카의 표정 변화를 살피고 있었고, 제시카는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당황한 것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바벨로프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을 직감했다.
그렇게 모인 다섯 명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