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당신을 갖고 싶어
“여기서요?”
리아의 가녀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라이언이 웃음소리를 냈다. 놀라는 모습이 귀여웠다. 좀 더 장난을 치고 싶었다. 이럴 수가! 검은 사자가 장난을 치고 있다니! 웃긴다는 것을 잘 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급하다며?”
“그,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금방까지 리아의 입속을 휘젓던 뜨거운 혀가 이번에는 그녀의 턱 끝에서 목선을 훑으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리아의 살결은 언제나 달콤했다.
“흐음… 라이언. 그래도 여긴… 응접실이에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리아가 몸을 흔들었다. 라이언은 손으로는 자신의 몸을 잡아당기면서 입으로는 안 된다고 중얼대는 리아가 사랑스러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리아를 번쩍 안아 들어 소파에 앉혀놓은 뒤 그가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를 자랑하듯 몇 발짝 걷기도 전에 문 앞에 도착한 라이언이 리아를 향해 싱긋 웃었다.
“이러면 되겠소?”
철컥- 유난히도 큰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돌아갔다.
“그건… 너무….”
너무 노골적인 표시가 아닌가! 방 밖의 사람들에게 지금 이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고 대놓고 경고하는 수준이었다.
“어차피 손잡이를 돌려보기 전에는 아무도 잠긴 것을 알지 못해. 그 누구도 들어오는 이가 없을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걱정하니 미리 손을 써 두는 거라오.”
“당신, 정말….”
꼭 지금 여기서이래야겠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사실 리아 역시 그가 필요했다. 라이언의 뜨거운 품 안에서 잠시나마 복잡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이리 와요.”
리아는 타박대신 손을 내밀었다. 숨 막힐 정도로 바쁘게 달려온 시간이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날들이 펼쳐지리라. 아니, 어쩌면 더 복잡하고 더 바쁠지도 몰랐다. 지금 두 사람에게는 여유가 필요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라이언은 리아의 말을 충실하게 따르는 남편이었다. 내민 리아의 손을 향해 그는 직진했다.
라이언은 그대로 리아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두고는 소파에 앉았다.
“살이 빠졌군.”
리아의 허리를 휘감은 그의 손이 바쁘게 위아래를 오르내렸다.
“다시 찌울게요.”
리아는 라이언의 목을 꼭 껴안고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코끝이 스치고 마주 닿은 숨결이 뜨거웠다.
“리아, 당신을 너무 사랑해. 그래서 두려워.”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대로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을 거예요.”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긴 리아였다. 지켜 주겠다고 했지만 늘 중요한 순간에 그녀는 혼자였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고통은 커졌다. 만약 리아가 사라진다면? 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무서운 상상은 하면 할수록 라이언의 심장을 갉아 먹었다.
“날 떠나지 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리아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알게 된 이후 라이언은 혹시나 그녀가 떠나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다시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웠다.
어느새 라이언은 이제 리아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녀와 함께 웃는 평범한 일상이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어 버렸다. 그녀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암흑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곳으로 당신이 떠나 버릴까 봐 무서워. 본래 당신이 왔던 그곳으로 다시 가 버릴까 봐.”
“바보. 나는 아무 데도 안 가요. 왜 그런 걱정을 해요? 난 늘 당신 옆에 있을 거라니까.”
“알아. 당신은 그럴 것이란 걸. 그렇지만 인생은 늘 생각대로 되는 법이 없지.”
적어도 라이언에게는 늘 그랬다. 인생은 가혹했고 행복은 짧았다. 아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
“아니요. 앞으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 거예요. 지금까지 충분히 누군가 만들어 놓은 대로 살았어요. 이젠 내 맘대로 살 거야.”
리아가 라이언의 윗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하고 싶은 건 다 할 거야.”
리아의 수줍은 도발에 라이언의 욕망은 불끈 달아올랐다. 엉덩이를 잡은 손끝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정말 이 자리에서 리아를 탐하고 싶었다.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지금 리아와 키스하게 되면 키스만으로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당신을 갖고 싶어.”
욕망으로 꽉 잠긴 라이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럼 가져요.”
리아는 곧바로 라이언의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리아의 혀가 자신의 혀에 닿는 순간, 라이언은 완벽하게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키스는 달콤했다. 말캉하고 뜨거운 혀는 쉴 새 없이 휘감기며 서로의 타액을 탐했다. 엉덩이를 잡고 있던 라이언의 손은 점점 위로 올라가 흥분으로 예민해진 리아의 몸을 움켜쥐었다. 드레스 위로 몇 번이고 손을 움직이던 라이언이 이번에는 등 뒤 드레스 단추를 허리 중간까지 풀어 내렸다.
“쥬넬을 다시 불러 좀 더 벗기 쉬운 드레스를 만들라고 해야겠어.”
작은 단추가 촘촘하게 박힌 드레스는 아름답긴 했지만, 무척이나 성가셨다.
“일부러 그렇게 만든걸요. 더 애타라고.”
“그렇다면 성공이군. 마구 뜯어 버리지 않은 나 자신이 대단할 정도니까.”
풀린 단추 덕에 느슨해진 네크라인 사이로 뽀얀 가슴이 불룩 솟아올랐다. 라이언은 드레스를 밑으로 더 잡아당겼다.
“아름다워.”
보드라운 가슴은 분홍빛 정점을 오뚝 세우고 있었다. 그가 그곳을 만지자 리아는 눈을 감고 몸을 떨었다.
“하아….”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탐하는 자신이 더럽게 느껴질 정도로 리아는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당신 거에요.”
리아는 라이언의 얼굴을 자신의 위로 잡아당겼다. 그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에 이내 뜨거운 숨결이 감겨들었다.
“흐음….”
황홀함이 중심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왜요?”
여기서 그만두려는 건 아니죠? 라는 질책이 담긴 물음에 라이언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일어서.”
그는 바지 단추를 풀며 리아를 돌려세웠다. 드레스가 너무 풍성해서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 벗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와 멈출 수는 없으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소파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들어 올린 리아의 드레스를 뒤집자 라이언의 눈앞에 아찔한 광경이 펼쳐졌다.
“스타킹을 안 신었소?”
“불편해서요.”
잔소리를 해대는 메리가 없으니 리아는 자유로웠다. 속치마니, 속바지니, 그리고 스타킹까지도. 챙겨입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긴 드레스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을 텐데….
“딱 좋군.”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빨리요.”
리아가 라이언을 재촉했다. 그는 아름다운 광경을 더 눈에 담아 두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하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동시에 신음을 뱉어냈다.
리아는 그를 원했다. 그가 필요했다. 그녀가 엉덩이를 흔들자 그는 이를 악물며 그녀를 꽉 움켜쥔 채 안으로 단번에 밀고 들어갔다.
“헉….”
라이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동물적인 본능만이 그를 지배하며 야수로 만들었다.
두 사람은 황홀함을 온몸으로 맛보았다.
***
“어때요?”
“완벽해.”
금방까지도 정사를 나누던 소파 위는 이제 멀쩡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바지 밖으로 삐져나왔던 셔츠는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고 바지 단추도 잠겨 있었다.
가슴을 온통 드러내며 끌려 내려왔던 네크라인도 원래의 정숙함을 되찾았다. 작은 단추는 처음 모습 그대로 촘촘했고 흐트러졌던 머리칼도 차분해졌다.
다만 황홀했던 정사로 붉어진 두 볼만이 아직 뜨거웠다.
“눈치챘겠죠?”
“글쎄, 모르겠군. 아마도 매튜는 예절교육을 하느라 바빴을 거야. 발레포르가 당신 말은 잘 듣지 않소.”
감히 공작 부부의 잠긴 방문을 열 사람은 없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은 자유였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 것처럼.
“그냥 이대로 당신과 침실로 가고 싶군.”
그렇게 탐하고도 아직 부족하다니. 리아는 밑이 뻐근해짐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그에게 우리의 결정을 알리지 않았잖아요. 결정한 이상 빨리 전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미리 다가올 일들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던컨이 오늘 밤 만찬에 우릴 초대했소. 왕비가 함께하는 정식 만찬이오.”
“왜 그런 얘기를 지금서 해요? 오늘 몇 시에요?”
벌써 시곗바늘은 오후 5시를 훌쩍 넘어 6시로 향하고 있었다.
“8시?”
“하, 진짜 당신 진짜 앞으로 조심해요. 여자는 남자보다 준비할 것이 훨씬 많다고요. 메리도 없는데 나 혼자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왕비가 보내 준 시녀 한나에게는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은 리아에게 더 혼나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을 도와줄 사람을 불렀소.”
아무래도, 자신도 발레포르와 같은 처지가 돼가는 것 같았다. 유난히 리아에만 약한 남자가.
“날 도와줄 사람요?”
“6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라이언이 호출 버튼을 누르고 직접 문으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풀었다. 이내 매튜가 문을 두드렸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전해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라이언이 문을 열자 매튜와 한눈에 보기에도 지쳐 보이는 표정을 한 발레포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왔나?”
“좀 전에 외성 입구를 지난다는 전갈이 왔으니 이제 곧 도착할 것입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리아가 물었다.
“누가 오는 거죠?”
“당신이 보면 좋아할 거요.”
“누구? 혹시….”
준비를 도와줄 사람? 좋아할 거라고? 그런 사람이라면 한 명밖에 없었다.
“메리? 혹시 메리가 와요?”
리아가 흥분해 소리쳤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베드포드 성으로 간 메리.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이 세계에 온 뒤로 가장 의지하고 도움을 받았던 아이였다.
“존을 보내 데려오라고 했지. 당신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소.”
“고마워요. 라이언. 진짜 고마워요.”
리아가 라이언의 볼에 입을 맞추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8시까지 충분히 갈 수 있겠소?”
대답하기도 전에 밖이 소란스러웠다. 메리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마님!”
고개를 돌리자 반가운 메리가 응접실 입구에 서 있었다. 메리는 리아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하고는 좋아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뛰듯이 다가왔다.
“마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괜찮으신 거죠? 아프시다는 소식에 제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요.”
메리는 리아의 주위를 빙빙 돌며 호들갑을 떨었다. 반가움에 입에서 미소가 가시지 않았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메리, 그만. 웃든지 울든지 하나만 해 줄래? 난 괜찮아. 정말 멀쩡해.”
리아가 어지럽다며 메리를 잡아 꼭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메리.”
그런 리아의 행동에 메리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고귀하신 공주님께서 미천한 시녀에게 이토록 다정하게 대해 주시다니. 감격스러웠다.
“그만 울어. 우리 할 일이 있어. 나 8시까지 저녁 만찬에 가야 해.”
“네? 지, 지금 벌써 시간이….”
“그래 벌써 6시야.”
“딸꾹. 딸꾹.”
놀란 메리가 딸꾹질했다. 8시라니!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목욕하고 화장과 머리 손질 그리고 드레스를 입기까지 2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니 2시간도 아니지, 약속 시각에 늦게 도착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
메리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메리는 공작부인의 상태를 살폈다.
머리는 엉망이고. 목욕하고 화장도 새로 해야 해. 가져온 드레스를 주름 가지 않게 다려야 하고….
메리는 디자이너 쥬넬이 왕궁 파티를 위해 만들어 준 드레스를 여러 벌 받아온 참이었다.
“마님, 방이 어디예요? 빨리 준비를 시작해야겠어요.”
메리의 열정이 다시 불타올랐다. 급히 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데 한쪽 끝에 서 있는 댄이 눈에 들어왔다.
“댄!”
메리가 댄을 향해 달려들었다. 말릴 틈도 없이, 반항할 틈도 없이 메리는 댄을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댄. 아니 댄의 모습을 한 발레포르가 소리를 질렀다.
“으악! 이거 뭐야!”
“뭐라고?”
소리치는 발레포르를 향해 메리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누나가 반갑지도 않아? 이게 머냐고?”
그녀는 망설일 틈도 없이 곧바로 발레포르의 머리 위로 몹시도 세게 꿀밤을 때렸다.
“읔!”
처음 느껴보는 묘한 고통! 감히 악마의 머리에 주먹질하다니! 리아에게 얻어터진 이후 처음이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악마를 때려?
발레포르가 부들부들 떨었다. 메리는 그런 발레포르의 귀를 쭉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어쭈, 이게 반항해? 너 죽을래?”
많이 익숙한 상황, 익숙한 향기. 데자뷰인가….
그때 저 앞에서 가만히 있으라며 고개를 흔드는 리아의 얼굴을 발견했다.
아! 이럴 수가. 발레포르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깨달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 참아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