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도망친 하녀 데이지
던컨이 떠난 후 라이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혼란스러운 것은 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던컨의 말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었다. 증거도 증인도 없었고 그저 모든 것은 그의 주장일뿐이었다. 물론 본능은 그를 믿으라 말하고 있었고, 믿고 싶었다.
“다시 자기는 어렵겠네요.”
자욱했던 안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아침이었다.
“괜찮겠소? 피곤하지 않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라이언은 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느낌이 어떻소?”
“잘 모르겠어요. 뭐 나쁘지는 않아요. 레오니의 기억 속 그는 몹시 무서운 사람이었거든요. 사실 그녀가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죠. 당신을 포함해서. 근데 내 말 왜 막았어요? 이번 기회에 검 돌려받기로 딱 확답을 받았어야 했는데.”
라이언에게 리아는 참 신기한 여인이었다. 검을 되찾아 주겠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지킬 줄은 몰랐다. 라이언은 어떤 순간에도 언제나 용기 있고 당당하고 솔직한 리아가 좋았다.
라이언의 손길에 리아가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당신은 어때요? 그를 도와줄 건가요?”
“아마도? 던컨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그럴 생각이오.”
“그를 믿나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를 믿고 싶소?”
“네. 마음은 그래요.”
라이언은 자신의 어깨에 기댄 리아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던컨을 가장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은 누가 뭐래도 리아였다.
“그렇지만 그냥 믿을 수는 없잖아요.”
마음은 던컨을 믿으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잘못된 선택은 위험을 몰고 올 것이란 걸 잘 알기 때문에.
신중해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라이언과 리아는 던컨의 부탁에 확답을 해 주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그들의 말을 던컨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답했다. 결정을 기다려 주겠다고
대신 던컨은 생각할 시간을 길게 줄 수는 없다고 했다. 던컨이 준 시간은 하루였다. 내일 앤 공주의 생일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답을 듣고 싶다고 했다.
모든 것은 던컨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라이언의 결정에 따라 앞으로 그의 거취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만약 돕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럼 던컨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루 만에 어떻게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아내죠?”
“우선 매튜가 전해 준 정보와 던컨의 말은 일치하고 있소. 그 외의 것은 그의 주장일뿐이지만.”
던컨과 제시카 그리고 바벨로프 공작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진짜였다.
“절 죽이려 했냐고 물었을 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어요.”
일부러 기습적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던컨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불시에 일격을 당하면 누구나 조금은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리아를 해치려 한 범인이 왕실 비밀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독약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던컨은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거짓이라면 그는 대단한 연기자였다. 심지어 던컨은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비가 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증거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던컨은 제시카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왕실의 비밀 금고를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왕과 왕비 둘뿐이었고, 던컨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제시카뿐이었다.
“던컨은 정보가 너무 없어. 철저하게 혼자인 것이 분명하군.”
던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도 문제였다.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 그 정도의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을 수가 있는가. 리아가 습격을 당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두 드러내 놓고 말을 못 할 뿐이지 베드포드 공작 부부에게 큰일이 생겼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허울뿐인 왕. 그게 바로 지금 던컨의 현실이었다.
“각하.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죄송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매튜였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와 라이언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지?”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라이언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외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달아난 하녀를 잡았다고 합니다.”
“데이지? 데이지가 잡혔나요?”
“그렇습니다. 성 밖에서 대기하던 단원들이 발견해 잡아 두었다고 합니다.”
데이지를 잡았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금처럼 진실이 무엇인지 헤매며 허우적대고 있을 때는 더더욱이 말이다.
“당장 데려와요.”
리아의 말에 매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데려오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워낙에 반항이 심한 터라.”
억지로 끌고 오는 모양새를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것 또한 곤란한 일이었다.
“그럼 지금 하녀는 어디에 있는가?”
“외성 단원들의 숙소에 포박해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직접 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리아는 당장 데이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손수 타 준 차를 마시고 조금씩 독에 중독되어 갔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역시 사람은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녀 데이지를 이곳까지 데려오지 않은 것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내가 말할게.”
매튜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민 것은 발레포르였다. 매튜는 발레포르의 반말이 익숙한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왕비가 보낸 시녀가 수상해.”
리아의 시중을 들고자 아델궁에 혼자 남았던 시녀 한나를 말하는 것일까?
“한나 말이야?”
“이름까지는 모르겠지만 1층에 하나밖에 없는 방을 차지한 그 시녀 말이야.”
덕분에 매튜와 발레포르는 응접실에 간이침대를 놓고 잠을 청해야 했다.
“그래. 그녀가 한나야.”
“아까 왕이 방문했을 때였지. 몰래 아델궁을 빠져나가는 인기척이 느껴지길래 내가 잽싸게 추적했거든.”
발레포르가 한 번에 말을 끝내지 않고 우쭐대며 늦장을 부리자 리아가 다그쳤다.
“빨리 좀 말해 줄래? 그래서 어쨌다고?”
“그 흔적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궁금하지?”
그때 매튜가 끼어들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확인해 본 결과 시녀가 향한 곳은 왕비궁이었습니다. 그녀는 왕비궁으로 들어갔다 왕께서 떠나기 전에 몰래 돌아왔습니다.”
“그럼 벌써 왕의 방문이 왕비에게 전해졌다고 봐야겠군요.”
매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는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발레포르에게 포착되었고 전부 들키고 말았다.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니까. 왕비가 막 배려랍시고 시녀도 보내고 요리사도 보내고 할 때부터 난 눈치채고 있었다고.”
“매튜, 우선 시녀를 그냥 두게. 아직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앞으로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을 것 같군.”
“좋은 생각이에요. 아직은 누굴 믿어야 하는지, 누가 우리 편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데이지를 만나고 나면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겠죠.”
리아는 던컨의 말이 진실이기를 빌었다. 던컨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는 그녀에게 어렵게 돌고 돌아 만나게 된 오빠였다.
***
기사단원들의 숙소에 도착한 리아는 이제 곧 알게 될 진실을 기대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나에게는 산책하고 오겠다며, 그 사이에 아침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온 참이었다. 기사단의 주인인 라이언이 단원들의 숙소를 방문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바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 시간이 무척이나 이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발레포르는 자신이 꼭 필요할 것이라며 끈질기게 리아의 뒤를 따라붙었다. 물론 리아는 그를 두고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하는 짓이 워낙 얄미워 몇 번이고 말을 듣지 않으면 데리고 다니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매튜는 이제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말이다. 어른인 척하는 어린 댄의 모습이 너무 수상하고 공작부인과의 관계도 매우 궁금했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도 라이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 역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발견하였지?”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금발 머리가 워낙 튀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쪽이 더 어려웠을 겁니다.”
만약 데이지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왕성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외성에 남은 단원들은 성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을 감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몰래 도망 다닌 것 치고는 꽤 허술한 결말이네요.”
마치 발견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리아는 뒷말을 안으로 삼켰지만, 라이언도 매튜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우선 만나 보지. 무슨 변명을 늘어놓는지 말이야.”
“그래 봤자 어차피 마지막은 쥐새끼일 뿐이야.”
발레포르는 데이지를 쥐로 만들어 버리겠다며 벼르는 중이었다. 그녀가 어떤 대답을 내어놓든지 간에 리아를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데이지는 살인자였고 살인자의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데이지는 의자에 앉은 채로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대화를 나눠야겠다.”
라이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튜가 데이지의 입에 물려 있던 더러운 헝겊을 빼어냈다. 입이 자유로워진 데이지는 곧바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마님, 마님. 잘못했습니다. 전 정말 몰랐어요. 저는 그냥 넬슨 씨가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독약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저는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해요.”
쉴 새 없이 변명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표정은 애처로웠다.
“몰랐다고?”
“네. 마님. 절 믿어 주세요. 저는 그저 넬슨 씨에게 이용당한 것뿐이어요. 흐흐흑….”
“그런데 왜 도망친 것이지?”
리아는 데이지가 변명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마님이 쓰러지셨을 때까지만 해도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넬슨 씨께서 저를 다그치셨어요. 약을 제대로 탄 것이 맞느냐고. 저는 그제야 그것이 독약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서웠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넬슨 씨께 어떻게 된 일이냐고 화를 내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저를 협박했습니다. 제가 마님을 죽이기 위해 몰래 독약을 탄 것이라고 말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고?”
데이지는 의자가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정말이에요. 나설 수가 없었어요. 그랬다가는 제가 모든 것을 뒤집어쓸 것만 같았으니까요. 그러다 넬슨 씨가 마님을 해치려 한 것을 보고 말았어요. 그 순간 저는 깨달았죠. 결국은 나도 죽겠구나.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한다 해도 소용없겠구나.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살고 싶었어요. 억울해서.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냥 마님께 좋은 약이라고 해서 탄 것뿐이에요. 마님의 건강을 위해서요.”
“넬슨이 누구의 명령을 따른 것인지 알고 있느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라이언이 앞으로 나섰다. 데이지의 억울함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넬슨의 배후였다.
“알려 드리면 저를 살려주실 건가요?”
“감히, 누구 앞에서 거래하려 드느냐!”
호통을 친 것은 매튜였다. 아는 정보를 다 털어놓아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러 놓고 끝까지 뻔뻔하게 나오다니.
“널 죽이진 않을 거야.”
리아가 발레포르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죽이진 않을 것이다. 다만 그보다 더 큰 벌을 받게 될 테지. 리아는 데이지의 변명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보지 못할 리아가 아니었다. 데이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넬슨과 공유했을 것이다. 리아는 누구보다 경험이 많은 연기자였다.
죽이지 않는다는 리아의 말에 안심한 것인지 데이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저를 용서해 주시다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말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알고 있는 정보를 마님께 알려 드리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제가 마님께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무척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 이제 말해 보렴. 넬슨에게 독약을 건네준 것이 누구지?”
“저를 지켜 주셔야 해요. 마님 꼭 저를 지켜주세요. 제가 이 사실을 발설했다는 것을 그분이 알게 되시면 저는 죽을지도 몰라요. 저는 마님을 믿고 털어놓는 것이에요. 너무 무서워요. 마님 부탁이에요.”
데이지의 행동을 보다 못한 발레포르가 끼어들었다.
“거, 진짜 말 많네. 빨리 대답 안 해? 왕이야 왕비야! 그 간단한 걸 뭘 그렇게 뜸을 들이고 그러냐고! 저걸 확 그냥! 너 그러다가 내 손에 먼저 죽는 수가 있어!”
“너나 가만히 있어! 데이지 대답해 줘. 누구야?”
데이지의 대답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두 숨죽이고 데이지의 입을 쳐다보았다.
“넬슨 씨는 그분을 가리켜 엘리시아의 태양이라고 하셨어요. 던컨 에드거 4세. 그분은 바로 엘리시아의 왕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