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당장 주세요.
어둠과 함께 안개가 내려앉았다. 이토록 짙은 안개는 참 오랜만이었다. 집무실 창가에 서서 던컨은 시종 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한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던컨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확인하였느냐.”
“네. 전하. 로비 베이트만 경은 아직 왕비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한스의 대답을 들은 던컨의 입꼬리가 묘하게 휘었다. 마치 웃는 것처럼.
“좋군. 딱 좋아. 오늘 밤 경계가 느슨해지겠군.”
유쾌한 듯 답했지만 사실 기분은 엉망이었다. 왕비의 눈치를 살피는 왕이라니. 사실 그 상대가 왕비가 아니라 바벨로프 공작이라고 해도 다를 바는 없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왕. 던컨은 그런 자신이 한심했다. 언제부터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렀을까.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외롭고 슬픈 일이었다. 힘이 없는 왕은 허울뿐인 허수아비와도 같았다.
“전하, 바로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가만히 서 있는 던컨을 향해 한스가 물었다.
“밤이 깊어지길 기다려야지.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거라.”
던컨은 라이언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왕비도 바벨로프 공작도 모르게 조용히 그를 만나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낮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기회가 있다면 그건 밤이었다.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면 왕비 제시카였다. 그녀는 요즘 밤마다 던컨을 찾아와 괴롭히고 있었다. 제시카는 합방을 요구했다. 빨리 왕손을 낳아야 한다는 명목을 들이대며. 물론 던컨은 들어주지 않았다. 아이를 자신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제시카에게 그는 이미 오래전에 질려 버린 상태였다.
던컨의 계획을 돕기라도 하듯 제시카는 로비를 불러들였다. 로비 베이트만이 왕비 궁에 들어갔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오늘은 제시카가 던컨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말과도 같았다.
창밖에 자욱한 안개는 이 밤 던컨의 움직임을 더 비밀스럽게 지켜 줄 것이다.
***
라이언과 리아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왕의 용건이 무엇일까? 그것도 이렇게 야심한 밤에 시종 1명만을 대동한 채 찾아오다니. 도무지 그 의중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던컨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쪽 구석에 급히 치워 둔 간이침대가 볼썽사납게 널려있었고 그 앞에 발레포르가 눈썹을 마구 찡그리고 있었다. 응접실 말고 딱히 왕을 맞이할 장소가 없는 탓이었다. 그렇다고 식당이나 침실에서 만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전하를 뵙습니다.”
라이언의 인사에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던컨이 허리를 세웠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
라이언에게 인사를 건넨 그의 시선이 곧바로 리아에게 옮겨갔다. 결혼식 이후 첫 만남이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이미 리아의 변화를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더 놀라웠다. 던컨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제가 많이 달라졌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리아였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던컨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부끄러우니 그런 놀란 표정은 그만 거둬 주시겠어요?”
“마, 많이 변하였구나.”
던컨이 간신히 답했다. 달라진 것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 정도로 변할 수가 있을까? 늘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던 지난날의 천덕꾸러기 공주는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여전히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이 시간에 찾아오셨다 하여 적잖이 놀랐습니다.”
누군가를 방문하기에 적당한 시간은 아니었다. 아직 왕궁 안에 머무는 대부분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를 비밀스럽게 만나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지.”
비밀스러운 만남이라. 라이언은 던컨의 생각을 읽기 위해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전혀 알 수 없었다. 던컨을 살피는 것은 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방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리아의 시선은 줄곧 던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를 깜빡이는 모습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기분이 묘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런 게 바로 핏줄이 당긴다는 것일까?
“앉게. 나만 앉아 있으려니 미안하군.”
라이언과 리아가 소파에 앉자 던컨은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그만 나가거라.”
“네. 전하.”
한스는 여전히 한쪽 끝에 서 있는 발레포르와 매튜를 데리고 방을 나가려고 했지만, 순순히 나갈 발레포르가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궁금해 미치겠는데 나가라니. 잠을 방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쫓아내려고 해?
“왜…요? 당신만 나가라고 한 거지 우릴 나가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
발레포르는 슬쩍 리아를 쳐다보며 반항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애가 타는 사람은 한스와 매튜였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런 투정을 부리는 것인가!
“댄!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말 거라. 저분이 누구신지 알지 않느냐! 반역죄로 잡혀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매튜가 팔뚝을 잡아채며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실랑이를 부리자 참다못한 리아가 나섰다.
“댄.”
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발레포르는 오만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팔뚝을 잡은 매튜의 손을 풀러 내더니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고는 투덜대며 방을 빠져나갔다.
“아직 어린아이라 예법에 무지해요. 용서하세요.”
던컨은 여전히 리아에게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용서할 것이 무엇인가. 저 아이의 잠자리를 방해한 것은 나인데.”
모두가 다 빠져나가고 응접실의 문이 닫히자 라이언이 말했다.
“이제 방 안에는 우리 셋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용건을 이야기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왜 그대들을 불러들였다고 생각하는가?”
“절 죽이려 했나요?”
돌직구를 날린 것은 리아였다. 옆에 앉은 라이언조차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가?”
“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리아는 대답하는 던컨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작은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아닌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아니야.”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리아.”
보다 못한 라이언이 리아를 불렀다.
“잠깐.”
라이언의 말에 놀란 것은 던컨이었다.
“지금 그녀를 뭐라고 부른 것이지?”
던컨은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라이언을 향해 질문했다. 리아라니. 분명 리아라고 했던 것 같은데.
“레오니. 레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상한 던컨의 모습에 라이언이 둘러댔다. 어째서 왕은 리아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것일까?
“그래. 그렇군. 내가 잘못들은 모양이네.”
“이제 말씀을 해 주십시오. 조금 있으면 해가 떠오를 것입니다.”
라이언이 던컨을 재촉했다.
“자네도 내 상황을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네.”
“조금 듣기는 했어요.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모르지만. 우리 부부가 워낙에 왕실과 먼 생활을 하였잖아요.”
대답한 것은 리아였다.
“그래….”
신문에서 읽었던 대로 그녀는 밝고 활기찼다. 또 뭐라고 했더라? 총명하고 유쾌하며 공작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고 했던가? 그 모든 말들은 과장이 아닌 진실이었다. 끊임없이 아내를 살피는 라이언의 모습은 던컨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움이 필요하네.”
이제 와 돌려 말할 필요는 없었다. 던컨에게는 그들이 마지막 보루나 마찬가지였다. 혼자의 힘으로 자리를 지켜내기에는 이미 멀리 돌아와 있었다.
“내게 힘을 실어 주게.”
“제게 정치를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던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전장을 떠돌 수만은 없지 않나? 이제 가정도 꾸렸는데 자리를 잡아야지.”
“전쟁이 끝난 지 벌써 3년이 넘었습니다. 제가 전장을 떠돌지 않은 지 벌써 3년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친히 내려 주신 제 영지에 전하께서 맺어주신 제 아내와 함께 저는 이미 자리를 잡았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리아가 라이언의 귓가에 작게 질문을 했다.
“라이언, 내가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하죠? 통 호칭에는 약해서요. 오빠라고 하면 안 되는 거죠?”
리아의 기습질문에 라이언이 이를 꽉 깨물고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라니. 그게 무슨.
“그럼 뭐라고 해요? 그냥 당신처럼 전하?”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전하라고 하시오. 라이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하.”
리아는 곧장 던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 말하거라.”
던컨은 두 사람의 속닥대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흐뭇하게 느껴졌다.
“도와주면 뭘 줄 거죠?”
“뭘 원하지?”
리아는 금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런데 전하를 믿을 수가 없네요.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기로 유명하시잖아요. 지금은 원하는 것을 다 주시겠다고 하여도 나중에 또 딴소리하실지도 모르죠.”
“도대체가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기로 유명하다고?”
대놓고 하기에는 상당히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던컨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다만 자신이 무슨 약속을 지키지 않았길래 그런 말을 하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모르세요?”
“전혀 모르겠군. 엘리시아의 왕으로서 말하건대 나는 그런 파렴치한 행동은 하지 않아. 약속은 꼭 지킬 것이다.”
“정말요? 정말 약속을 꼭 지키세요?”
대화를 나눌수록 무언가 깊은 수렁 안에 조금씩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라이언은 아까부터 리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를 챈 듯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래. 나는 약속은 꼭 지키지.”
“좋아요. 그럼 당장 주세요.”
무릎 앞에 놓인 테이블을 건너 자신의 눈앞으로 바로 내민 리아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던컨이 황당한 듯 되물었다.
“뭘?”
“제 남편에게 줄 물건이 있으시잖아요.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고 하시니 지금 당장 줄 수 있으시죠?”
“라이언에게?”
그때 던컨의 머릿속이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하, 지금 모엘르 검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모엘르 검을 말하는 것인가?”
“역시 바로 기억하시네요. 맞아요. 모엘르 검. 당장 주실 거죠?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라고 하시니 말씀드린 거예요. 깜빡하신 것 같아서.”
“임신했나?”
“아니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내가 분명 라이언에게 아이를 낳으면 그 검을 주겠다고 한 것 같거든. 아닌가?”
라이언은 던컨의 눈을 피하며 답하지 않았다.
“그건 무효죠. 첫 번째 약속은 분명 결혼 3년 뒤에 주겠다는 거였잖아요. 무슨 한나라의 왕이 그렇게 호떡 뒤집듯 말을 바꿔요?”
“호, 호떡? 무슨 말이지?”
“리아 그만하지. 우린 나눌 이야기가 많아. 지금 검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어.”
다시 라이언의 입에서 리아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분명했다. 던컨이 다시 그 이름에 관해 물으려는데 라이언이 한발 빨리 입을 열었다.
“전하. 우선은 해가 뜨기 전에 아까 부탁하셨던 일을 마저 상의해야겠습니다. 이 시간에 절 찾아오신 이유가 분명 있으실 테고 그렇다면 빨리 이야기를 나누고 이곳을 떠나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맞는 말이었다. 해가 뜨고 자욱한 안개가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밤에 이곳을 찾아온 의미가 없어진다. 던컨은 다시 이름에 관해 물어보려는 것도 잊고 라이언을 마주했다.
“도와줄 텐가? 나는 지금 자네가 간절하다네.”
“정확히 알아야겠습니다. 흘려들은 소문 말고 전하께서 직접 전해 주시는 현 상황 말입니다. 그래야 제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아까 제 아내가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 범인이 왕실 안에 있다는 것만을 알뿐 그게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나도 용의자인가?”
“네. 유감스럽지만 그러합니다.”
“내가 아니라고 한다 해도?”
“죄송합니다.”
라이언은 고개를 숙였다. 정중했지만 선을 긋는 말이었다. 던컨은 그런 라이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운했다.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나를 변호해야겠군. 내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자네뿐이니 말이야.”
던컨은 씁쓸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라이언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고 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진실이 필요했다.
레오니가 떠난 이후 지난 몇 년간의 이야기가 담담한 어조로 던컨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