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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95화 (95/116)

95화. 울부짖는 영혼들

어둠이 짙게 깔린 깊은 새벽. 뿌연 안개가 온 왕궁을 뒤덮었다. 아델궁 1층 응접실 한편에 놓인 간이침대에 잠이 든 발레포르는 점점 강해지는 음기에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으… 좋다….”

리아가 사는 세계에 온 뒤로 이토록 강한 음기는 처음이었다. 마치 지옥에 있는듯한 느낌. 매우 익숙하고 짜릿했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음기를 느끼던 발레포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상하단 말이야.”

그냥 평범하게 넘길 수준의 음기가 아니었다. 그때 문득 낮에 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레오니가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던 이유가 바로 유령 때문이었다고 했었지?

“제길!”

발레포르가 쏜살같이 응접실을 뛰쳐나가 2층 계단을 내달렸다.

그 시간 리아와 라이언은 나란히 누워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그들은 고통받고 있었다. 우는 것인지 아니면 웃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흐느낌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으며 온몸을 압박했다.

리아는 마구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온몸에 털이 쭈뼛하게 서는 느낌. 그 기분 나쁜 가운데 식은땀만 그녀를 적시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무거운 무언가가 그녀 위에 올라앉아 뜨거운 입김을 불어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손가락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느낌은? 지금 가위에 눌린 것일까?

짙은 안개는 창틈을 넘어 방 안까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그때 벌컥 하고 방문이 열렸다.

“꺼져!”

강한 음기에 이상함을 감지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감지하고 리아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것은 바로 발레포르였다.

발레포르의 외침에도 방안의 기운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이것들이 미쳤네. 리아 정신 차려! 그냥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침대로 직행해 리아의 몸을 흔들자 음산한 기운이 조금 흐트러졌다. 리아는 간신히 신음을 내뱉었다.

“라…이…언….”

“지금 이 와중에도 라이언이야? 일어나 봐. 정신 든 거야? 와… 이거 장난 아니네.”

리아를 흔드는 발레포르의 주위로 음기가 휘몰아쳤다. 댄의 작은 몸이 휘청댔다.

“아이여. 방해하지 마라. 드디어 에리스의 딸이 돌아왔다.”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귓가를 윙윙 울려댔다.

“꺼져 이것들아! 완전 미쳤구만 날 못 알아봐?”

그럴수록 발레포르는 더 크게 소리쳤다. 아무리 어린 소년의 몸 안에 들어가 기운을 갈무리했다지만 그래도 악마였다. 지금 아델궁을 점령한 것은 그냥 유령이라기보다는 악귀에 가까웠다. 그런 그들이 악마를 못 알아보다니!

“레오니. 에리스의 딸. 내 피를 마시고 자란 아이여.”

발레포르의 외침을 무시한 채 유령들의 음성은 리아에게 향했다. 키득대는 웃음과 구슬프게 흐느끼는 울음이 섞여 기괴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발레포르가 리아의 몸에 기운을 불어넣자 그제야 그녀를 압박했던 가위가 풀리면서 눈이 뜨였다.

“헉….”

“정신이 들어?”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뿌연 덩어리가 방 한쪽 구석에 모여들었다.

“발레포르? 이게 무슨 일이야?”

정신을 차린 리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바보야. 그렇게 정신을 못 차려? 너 큰일 날 뻔했다고!”

“라이언은?”

리아가 죽은 듯 누워 있는 라이언을 흔들었다.

“그냥 둬. 일부러 재웠으니까. 눈물겹다 눈물겨워! 구해 준 건 난데! 깨어나자마자 라이언을 찾는 거야?”

발레포르의 말에 리아가 라이언을 흔들던 손을 거둬들였다. 막 잠에서 깨어난 몽롱한 정신이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묘한 방 안의 분위기를 감지한 리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딛고 섰다.

“레오니. 에리스의 딸. 내 피를 마시고 자란 아이여.”

“악! 뭐야?”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놀란 리아가 휘청대는 순간 뿌연 연기가 그녀의 온몸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꺼져 이 망할 것들아!”

발레포르가 고함을 질렀지만, 그들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점점 발레포르의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악마 발레포르를 몰라본단 말이야?

“으아! 이거 유령이야?”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리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뿌연 연기가 닿는 곳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레오니가 무서워했던 유령이 바로 이들이란 말인가?

발레포르가 리아의 몸을 향해 손을 뻗어 기운을 흘려보내자 뿌연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리아 이리 와. 이것들 악귀야 악귀!”

“악귀?”

“기운이 심상치가 않아. 평범한 유령은 아니야. 너에 대한 악의가 가득하다고.”

유령들도 발레포르가 평범한 소년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는지 순간 형체를 감췄다. 다시 방안은 고요해졌다.

“레오니가 무서워 한 게 저거야?”

“아마도?”

“라이언은? 괜찮은 거지?”

리아가 라이언이 누워 있는 침대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냥 자고 있는 거야. 뭐 좋은 거라고 깨워. 그냥 자게 둬. 그편이 좋아.”

“사라진 거 아니야? 이제 안 보이는데.”

발레포르가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숨어 있는 거야. 완벽하게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문이 덜컹대며 흔들렸다.

“레오니. 에리스의 딸. 내 피를 마시고 자란 아이여. 너를 기다렸다. 오직 너만을 기다렸다.”

기분 나쁜 음성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아의 온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얼굴 하나가 훅하고 다가왔다가 사라졌다.

“꺄악!”

리아가 놀라 소리치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리아! 괜찮아? 이것들이 진짜!”

“와, 진짜 놀랐어. 뭐야? 얼굴에 그거 피였지?”

발레포르는 리아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어딘지 모를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나와!”

발레포르가 뻗은 손 아래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방 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기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악마다. 악마야. 도망쳐. 도망쳐.”

웅성대는 소리가 방안을 맴돌며 빙글빙글 돌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안개가 걷혔다.

리아는 달라진 기운에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공기가 차가웠다.

“간 거야? 사라진 거지?”

“그런 것 같은데. 망할. 잡았어야 했는데.”

“잡긴 뭘? 유령을 잡는다고?”

“악귀야. 너한테 달려들었던 거 잊었어?”

갑자기 달려든 피 칠갑을 한 얼굴. 기괴한 모습이긴 했다. 별별 일을 다 겪은 리아도 깜짝 놀랄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기절을 하거나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때의 레오니처럼.

“죽이려 했던 것일까?”

가위에 눌린 경험은 몹시 괴로웠다. 그리고 이 방에서 머무는 며칠간 또다시 그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모르겠어. 그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하감옥에서 꽤나 많은 소녀들이 죽었다고 들었어. 그중 몇이나 악귀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

“그렇지만… 그들은 레오니를 죽이지 않았어. 그저 겁만 줬을 뿐이잖아.”

발레포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곤한 소리 그만하고 다시 잠이나 자. 아직 새벽이야. 이 꼬마 몸에 들어앉아 있으니 인간이랑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잠을 자야 한단 말이지. 아주 귀찮아 죽겠다고.”

발레포르가 투덜대며 방을 빠져나가려고 하자 리아가 그를 붙잡았다.

“그냥 갈 거야?”

“그냥 안 가면? 걱정 마. 걔들 오늘은 더 안 나타나. 한두 시간 지나면 해가 뜰 텐데. 올 리가 없지. 조금이라도 자둬. 너도 힘들잖아. 굳이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라이언도 아침까지 푹 잘 거야.”

발레포르는 손을 훠이훠이 흔들며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짧은 시간에 일어난 정신없는 사건들로 리아는 머리가 아팠다. 발레포르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라이언은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 든 상태였다. 유령의 출연이라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겪었는데 발레포르는 태평했다.

“지는 악마라 이거지.”

좀처럼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리아는 침대에 다시 누우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잠들어 있는 라이언의 이불을 다시 잘 덮어 주고 그녀는 그대로 창가에 섰다.

방안의 이질적인 기운은 다 사라졌지만 아직 밖은 뿌연 안개가 가득했다. 저 멀리 왕성의 종탑 꼭대기에 켜 놓은 불빛만이 이따금 반짝일 뿐이었다.

리아는 가만히 지난 인생을 돌아봤다.

“내가 이 나라의 진짜 공주라는 말이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이 배 속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채 죽어가던 아이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아이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아 다시 제 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돌아왔다고 끝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 시작이었다.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왕, 그리고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적.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심해야 하는 것인지!

라이언은 모두를 의심하라 했지만, 리아는 왕을 믿고 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핏줄의 당김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에게 어떻게 지난 일을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믿어 줄까?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당신이 그런 게 아니길 빌어요.”

뿌연 안개 너머, 샤르트 궁으로 추정되는 쪽을 향하여 리아가 속삭였다.

“저게 뭐지?”

샤르트 궁 쪽을 쳐다보던 리아의 시야에 작은 불빛 하나가 보였다. 불빛은 멀리서 시작되어 점점 아델궁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짙은 안개 때문인지 제대로 된 형체가 보이지 않지만 흔들리는 모양새가 누군가 들고 있는 등불인 듯싶었다.

“누구지?”

분명 불빛은 아델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누구일까? 리아는 혹시나 얼굴이 보일까 싶어 흔들리는 불빛을 뚫어지라 쳐다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잠시, 아델궁 바로 직전에 이르러 불빛이 사라졌다. 다시 창밖은 안개뿐이었다. 잘못 본 것일까? 다시 살펴보아도 사라진 불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똑똑똑-

“각하, 저 매튜입니다.”

리아가 창밖을 쳐다보며 서성대는 사이 매튜가 방문을 두드렸다. 보통 일이 아니고서야 매튜가 이 시간에 라이언을 깨울 리가 없었다. 리아는 서둘러 라이언을 흔들었다.

“라이언, 일어나 봐요. 매튜가 당신을 찾아요.”

발레포르의 말처럼 리아가 몇 번을 흔들자 라이언은 이내 깨어났다.

“리아… 무슨 일이지? 왜 일어나 있는 거요?”

“정신이 들어요? 지금 문밖에 매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매튜가?”

라이언이 몸을 일으키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무척이나 험한 꿈을 꾼 느낌이었다.

똑똑똑-

“각하! 죄송합니다. 급한 일입니다.”

리아는 서둘러 로브를 걸치고 라이언에게도 건네주었다. 정신을 차린 라이언이 리아를 살피며 방문을 열었다.

“매튜. 도대체 무슨 일이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에요?”

“누군가?”

라이언이 리아의 손을 잡으며 매튜를 향해 물었다. 리아는 생각했다. 아까 보았던 그 불빛이 착각이 아니었구나. 누군가 아델궁을 찾아왔어.

“왕께서… 왕께서 두 분을 만나고자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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