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서로의 품에서
“제 험담하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자신의 등장과 함께 조용해진 응접실의 분위기를 살피며 매튜가 웃으며 말하자 갑자기 발레포르가 나섰다. 자신이 댄의 모습이란 것을 또 깜빡 한 채로.
“오! 매튜! 저녁 다 된 거냐?”
욕구에 충실한 악마답게 발레포르는 배고픔을 참지 못했다. 인간인 댄의 몸 안으로 들어간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반말을 내뱉은 발레포르를 향해 매튜가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잘못 들은 것이겠지. 오 매튜? 된 거냐?
“되, 된 거냐? 댄?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댄! 너무 배가 고파서 이상해진 거니?”
리아의 날카로운 눈빛에 발레포르는 투덜대며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저녁준비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주방이라….”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왕실에 관한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괜찮으니 여기 앉아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공작님보다는 매튜가 아는 것이 더 많겠죠.”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아는 것이라면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매튜가 자리에 앉자 발레포르가 살살 눈치를 보며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리아는 다시 한 번 발레포르를 향해 매섭게 눈빛을 보냈다. 한 번 더 실수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의 눈빛을.
“매튜. 바벨로프 공작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줘요. 공작님께 듣기로는 제시카 왕비가 사생아라고 하던데. 어떻게 왕비가 된 거죠?”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라이언은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만약 리아가 아니라면 왕성을 자진해서 방문하는 일 따위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왕을 만나기 전에 가능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했다. 왕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 여러 가지 경우를 두고 대비해야 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왕과 왕비의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직 왕실에 대를 이을 왕자님이 없으신 것도 크게 한몫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죠.”
결혼 10년째 여전히 태어나지 않은 왕자. 후계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혼돈을 불러온다.
“그렇지만 왕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합법적으로 후궁을 맞이할 수 있는 상태가 되셨으니 앞일은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바벨로프 공작과 제시카 왕비가 초조한 것일 겁니다. 사이도 좋지 못한 데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니까요.”
“바벨로프 공작을 따르는 이가 많은가요?”
“대신들 대다수가 바벨로프 공작의 편입니다. 왕께서는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으시지요. 뭐 그렇다고 해서 반역을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앞일은 모르는 것이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갑자기 왕께서 후궁을 들이시거나 뭐 다른 행동을 하게 되신다면 바벨로프 공작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위인은 아닙니다.”
“매튜는 왕비를 의심하고 있군요?”
중립을 지키는 듯 보이지만 매튜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왕의 입장에서였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왕께서 그런 일을 저지를 이유는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말이죠. 왕비라면 몰라도… 던컨 왕은 누구보다 조력자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게 나다?”
가만히 지켜보던 라이언이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백 프로지 뭘 그렇게 고민해…요?”
발레포르가 또 눈치 없이 나서자 리아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저걸 그냥 콱!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그렇잖아. 딱 견적 나오지 않아요? 왕이랑 왕비는 사이가 좋지 않다. 왕은 힘이 없다. 대신 왕비는 힘이 있다. 왕이 이런 상황에서 베드포드 공작 부부를 불러들였다. 왕비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싶어진다. 아주 악독한 방법으로! 이거 아닌가…요?”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다들 예상했던 내용.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 그건 심증일 뿐이야.”
“뭐 두고 보면 알겠지.”
발레포르가 입술을 삐죽대며 바닥을 탁탁 걷어찼다. 상황파악이 어려운 사람은 매튜였다.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꼬마 댄과 공작부인이라니. 그걸 보고도 뭐라 하지 않는 공작까지!
그러는 사이 저녁이 준비되었다. 혼란스러운 매튜를 두고 모두 식당으로 향했다. 그 누구도 매튜의 혼란을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기엔 설명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왕궁에서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
왕궁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다. 예상대로 왕에게선 아무런 기별도 오지 않았고 아델궁을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반겨 주는 이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꾸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일찍 자는 것이 좋겠군.”
라이언이 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내성 안에 함께 들어온 기사단장 둘이 번갈아 가며 경비를 서기로 했다.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왔던 시녀와 시종들은 한나만을 남기고 각자의 궁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머물 여분의 방이 아델궁에는 없었다. 간신히 간이침대를 놓아 매튜와 댄의 잠자리를 마련했을 정도였다.
라이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리아는 말이 없었다.
“내일은 던컨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리아의 기분을 알아챈 라이언이 그녀를 위로했다.
“그냥, 좀 허무해요. 왕성 안에만 들어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나 봐. 어리석게도 말이죠. 이렇게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고작 첫날이지 않소.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많아.”
“오지 않는 것이 좋았을까요?”
이곳에 오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문제는 훨씬 더 복잡했다.
“평생 피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로 살 수도 없고. 당신의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그냥 두고 싶지도 않으니.”
“미안해요. 나 때문에.”
리아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어 내리며 라이언이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무엇이 미안한 거지?”
“당신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한 거? 여기까지 오게 한 거?”
라이언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리아가 아니었다.
“나 때문이오. 지금 이 사태가 발생한 이유는 모두 나 때문이지.”
욕심 때문에 왕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했다. 모엘르 검을 찾고 싶다는 욕심, 그 하나 때문에. 그래서 결혼했다.
만약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리아가 이곳에 왔다면, 그녀는 어쩌면 처음부터 이곳 왕궁 안에서 더 빠르고 더 완벽하게 적응했으리라.
“돌이켜 보면 지난날의 나는 무척이나 이기적이었소. 사실 결혼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지.”
“그런 말 말아요. 그 덕분에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있었는걸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미안하다는 말은 말아.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말이오.”
리아는 천천히 라이언의 이마로 손을 올렸다. 많이 자란 머리카락이 이마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다.
“아프지 않아요?”
“전혀.”
“다행이에요.”
끝이었다. 리아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랬다. 어째서 다쳤는지, 모엘르 검이 어떤 의미이기에 그토록 찾고 싶어 하는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라이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리아와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깜깜한 어둠을 밝히며 지나갔다. 이제는 그녀에게 지난날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녀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 것처럼. 그 역시도 숨기고 싶었던 지난 과거를 털어놓을 때였다.
“모엘르 검이었어.”
“네?”
라이언이 이마에 올려진 리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이 흉터 말이오.”
리아가 놀라며 손을 떼어냈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그의 흉터를 살폈다.
“모엘르 검에 베인 거란 말이에요?”
검에 베였다고 하기엔 흉터가 무척이나 엉망이었다. 모엘르 검이 흉터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직접 그 검에 의해 다쳤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모엘르 검의 손잡이에는 사자 머리가 조각되어 있지. 검날에 베었다면 난 죽었을지도 모르오.”
라이언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칼날에 베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군.
“그걸 말이라고 해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리아는 라이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듯 손끝으로 흉터를 어루만졌다. 뭉툭한 검의 손잡이에 의해 생긴 상처라니 얼마나 아팠을까.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해도 그 고통이 상당했을 것이다.
“어머니였소. 나에게 검을 휘두른 사람은.”
“헉.”
리아가 놀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난날 그가 잠결에 흐느껴 울며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던 것이 떠올랐다. 그저 악몽이 아니었구나.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지. 안타깝게도.”
“라이언.”
리아가 이마에 두었던 손을 내려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살짝 미소 짓고 있는 라이언의 얼굴이 더 슬퍼 보였다.
라이언은 자신의 지난 과거를 숨김없이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아버지 아놀프와 어머니 테사, 그리고 렌포드로 향하던 길에 만났던 망나니 패트릭에 대해서.
어째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는지, 어째서 오래된 흉터에 통증을 느꼈는지도.
고통스럽고 끔찍했던 과거를 털어놓는 데는 허무하게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혔던 과거의 기억들이 고작 말 몇 마디에 흩어져 버렸다는 사실에 라이언은 허탈한 감정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당신 웃어요?”
“털어놓으니 좋군.”
“난 화가 나요. 너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아.”
“그러지 말아. 다 지난 일인걸.”
“당신 부모님은 정말….”
리아가 라이언을 쳐다봤다.
“최악이에요. 분명 지옥에 갔을 거예요. 기분 나쁘다면 미안해요.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해서.”
“난 괜찮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모엘르 검을 찾은 거군요?”
이마의 상처를 부여잡으며 엉망으로 베드포드 성을 도망쳐 나온 이후로 라이언은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상처가 아물고 몸은 자랐지만, 그날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모엘르 검으로 아들의 이마를 짓이겨 놓은 어머니 테사와 그런 아내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모엘르 검을 휘둘러 베어 버린 아버지 아놀프.
라이언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은 그 검을 없애 버려야 끝이 난다고 믿었다. 아놀프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모엘르 검.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 검을 두고 왕이 거래를 제안했을 때 그가 두말할 것 없이 승낙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필요 없소. 내겐 그보다 더 좋은 치료제가 있으니.”
라이언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리아의 눈가를 문질러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니에요. 라이언. 당신은 그 검을 가져야 해요. 이제 내게는 치유능력 따윈 없는걸요.”
라이언의 불면증과 흉터에 통증을 사라지게 하였던 것은 그녀의 몸속에 있던 라루체라는 신비의 보석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라루체는 없다. 언제 다시 그의 고통이 반복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라지지 않았어.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가 내게는 치유제라오. 당신과 함께라면 다시는 악몽 따윈 꾸지 않아. 오래된 흉터가 아파져 오는 해괴한 일 따위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이런 날 사랑해 줘서.”
울먹이는 리아의 대답에 라이언이 그녀의 이마로 손을 올려 툭 하고 두드렸다.
“그런 말은 하지 마.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니까. 왜 이렇게 울보가 되어 버린 거지? 씩씩했던 내 아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모르겠군.”
“나도 씩씩했던 내가 그립네요. 그래도 라이언. 당신은 검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우리 함께 없애 버려요. 다신 당신을 괴롭힐 수 없도록.”
“그래, 그러지. 그렇게 하겠소. 당신과 나의 미래를 위해.”
“당장 내놓으라고 할 거니까 나 말리지 말아요.”
“마음대로. 내가 당신을 어떻게 말리겠어.”
라이언이 리아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리아는 그런 라이언의 품을 파고들었다. 지금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세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서로에 대해 숨김없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밤. 아픈 과거를 털어놓은 라이언이 고맙고 안타까웠다.
리아 역시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던 기억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학대를 당하지는 않았다.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조금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라이언의 품 안에서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리아는 결심했다. 세상을 돌고 돌아 힘겹게 만나게 된 만큼 더 열렬하게 사랑하겠노라고. 숨기지 않고,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사랑하겠노라고.
서로를 품에 안고 애틋함을 나누며 왕궁에서 보내는 첫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