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93화 (93/116)

93화. 아델궁

에리스의 피로 얼룩진 지하감옥 위에 지어진 궁전.

레오니는 여기 아델궁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고 늘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다. 레오니라면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았겠지. 아니 돌아올 수 없겠지.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좀 허술하군.”

아델궁 전체를 살피고 돌아온 라이언이 리아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기사단원 전부가 궁 안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라이언과 단장 몇 명만이 남고 나머지는 성 밖 방문객 숙소에 머물렀다.

황금의 나라답게 화려한 엘리시아의 왕성 안 여러 개의 왕궁중 가장 초라하고 작은 곳은 바로 아델궁이었다.

선왕 벨로트는 에리스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그녀가 원하는 장소에 궁을 하나 새로 지어주었다. 물론 모든 것은 지하감옥이 필요했던 에리스가 벨로트를 유혹해 받아낸 것이었다. 사랑에 눈이 멀었던 벨로트는 모든 것을 에리스에게 일임했고 그 덕분에 에리스는 마음껏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하감옥을 비롯해 왕비의 궁보다도 화려하고 눈부신 궁을 완성했다.

에리스는 결국 죽었고 그녀의 화려했던 궁도 그녀의 잔인한 지하감옥과 함께 부서졌다.

선왕 벨로트는 에리스가 낳은 아이를 그 어느 궁에도 머물지 못하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성 밖으로 공주를 내보낼 수는 없는 법이라 임시방편으로 작은 건물을 지었고 그 건물이 아델궁이 되었다.

“기억했던 것보다 매우 작군요. 역시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되는가 봐요. 기억 속 이곳은 아주 크고 무시무시했는데. 직접 보니 아주 초라한 2층 건물 한 채일 뿐이네요.”

“우리가 다 머물 방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내성 안으로 같이 들어온 사람이라고 해 봐야 매튜와 기사단장 둘뿐인데.”

“한 명 더 있죠. 무시무시한 우리 꼬마 댄.”

리아가 손을 쭉 뻗으며 한쪽 끝을 가리켰다.

“꼬마 댄. 그나마 댄이 있어 안심이군.”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다르게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골치 아픈 악마였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발레포르가 본연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 발레포르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치며 구박하는 리아를 보고 또 한 번 놀랐었지.

“아무래도 오늘 우릴 부르진 않을 것 같아요.”

늦은 오후였다. 만약 만날 생각이 있었다면 도착과 동시에 일정을 통보했을 것이다. 기다리라는 말은 금방은 기약이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런 것 같군. 해가 지고 있어.”

기다리고 있으면 부르겠다고 했지 그게 언제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공주의 생일파티 전까지 부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건 오로지 왕의 마음이었다. 그는 엘리시아의 왕이었고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뭐 어차피 파티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래도 빨리 왕과 왕비를 만나고 싶어요. 그들의 얼굴을 보면 단번에 범인이 누구인지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죠.”

그때 아델궁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아직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에 머물고 있던 리아와 라이언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라이언은 그와 동시에 재빠르게 리아를 곁으로 잡아당겨 자신의 손아래 두었다.

“인사드립니다.”

한나와 몇 명의 시녀가 동시에 치마를 들며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라이언이 묻자 매튜가 나섰다.

“왕비궁에서 왔다는군요.”

“왕비?”

리아가 고개를 들어 라이언과 눈을 맞췄다. 무슨 의도일까?

“네, 왕비님께서 보내셨어요. 직접 환대하지 못함을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말씀하셨어요. 공주님께서 궁에 머무시는 동안 불편한 점이 없도록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한나가 고개를 들고 뒤편을 보며 손짓하자 여러 가지 물건과 음식을 들고 있는 하녀와 하인들이 줄을 지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에요. 공주님. 다시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한나라고 불러 주세요.”

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망할.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레오니는 주변 인물들에 대해 워낙 신경을 쓰지 않았고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왕이나 왕비가 다였다. 그 외에 스쳐 지나가듯 떠오르는 얼굴 중에도 한나는 없었다.

“공주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개의치 마시고 절 불러 주세요. 지척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오래 비워 둔 터라 워낙 지저분해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청소는 다 해 두었는데 언제쯤 도착하실지는 알 수 없어 음식을 채워 넣지 못했어요. 도착하셨다는 말에 서둘러 준비했습니다.”

“고맙군.”

“조금만 기다리시면 저녁을 준비해 드릴게요. 왕비님께서 아주 훌륭한 요리사도 보내 주셨어요. 솜씨가 정말 대단하답니다.”

어째서 이토록 신경을 쓰는 것일까? 그때 다시 매튜가 나섰다.

“각하 전해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우선 안으로 드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라이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종들이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

“어떻소?”

응접실에 들어서며 라이언이 물었다.

“글쎄요. 사실, 전혀 기억에 없어요. 뭐 그냥 제 감상을 말하자면 공주의 처소치고는 많이 소박하네요.”

리아가 깨어나 살아온 저택들은 사실 그 어떤 곳보다도 웅장하고 화려한 곳이었다. 베드포드 성과, 렌포드의 이든로즈홀까지도 엘리시아에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그런 곳과 비교한다면 이곳 아델궁은 무척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소박? 이게 무슨 소박이야. 이렇게 초라한 공주 궁은 처음이다. 엄청나게 구려. 완전 구려. 내 창고도 여기보다는 좋아.”

귀여운 소년인 댄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발레포르의 빈정대는 말투는 리아와 라이언의 인상을 찌푸리기에 충분했다.

“입 좀 다물어. 여기 우리만 있는 거 아니거든? 누가 듣기라도 할까 겁난다. 제발 조심 좀 해.”

리아가 아직 매튜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발레포르를 타박했다. 발레포르가 다시 투덜댈 틈도 없이 매튜가 들어왔다.

“침실로 짐을 옮겨 두도록 지시했습니다. 깨끗하기는 한데, 무척이나….”

매튜 역시도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낡고 초라하다는 말을 입에 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깨끗하면 된 거죠.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너무 오래 비워둬서 그럴 거예요.”

리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었다. 아델궁의 상태만 보아도 왕국에서 레오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방문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왕과 왕비 그 누구도 아델궁을 챙기지 않았다.

그나마 왕비만이 아주 기본적인 환영만을 한 셈이었다.

“소식이 무엇이지?”

“아, 그게….”

매튜가 굉장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는 듯 주변을 살폈다.

“왕과 왕비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자세히 말해 보게.”

“확실한 정보통에 의하면 사이가 멀어진 지 이미 오래고 후궁을 들일 날도 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왕실의 법도대로라면 이미 오래전에 후궁을 들였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벨로프 공작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지 못했다는 소문입니다. 요즘은 대신들 대부분이 바벨로프 공작의 사람들이라….”

왕실에 관해 아는 것이 없는 리아는 매튜의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매튜가 전해 준 소식이 진짜라면 어쩌면 왕과 왕비가 한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뿐.

“그렇게 된 배경은?”

“워낙에 바벨로프 공작의 힘이 막강한대다가 그에게 대적할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지지기반도 약하시고 의지할만한 가족도 없습니다. 왕비와의 사이도 좋지 못하니 고민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이번에 각하를 초대하신 이유가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와달라?”

“따지고 본다면 가장 가까운 사이가 각하와 공작부인이십니다. 가깝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가장 힘이 될 만한 분들이시죠.”

라이언은 전쟁 영웅이었고 백성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요. 왕과 왕비 모두 직접 만나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조금도 믿을 수 없어요.”

“네. 부인 그렇습니다. 본심이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요.”

“그래, 알겠네. 우선 오늘은 저녁을 먹고 좀 쉬어야겠군.”

지난 며칠간 쉬지도 못하고 달려온 길이었다. 출발일정이 늦어져 그랬던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적에게 애초에 공격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매튜는 저녁준비가 되는 대로 알려 드리겠다며 응접실을 빠져 나갔다. 이제 안에는 라이언과 리아 그리고 댄의 모습을 한 발레포르만이 남았다.

“음…좋아, 아주 좋아.”

“뭐?”

“여기 말이야. 기운이 아주 좋아. 음산하기가 지옥 뺨쳐. 짜릿해.”

“음산? 그게 좋다고?”

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좋지. 아주 익숙한 기운이야. 여기 그 뭐냐 지하감옥 위에 지은 곳이라고 했지?”

발레포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아는 섬뜩한 기운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래 맞아. 잊고 있었어.”

“뭘 말이오?”

“레오니가 왜 이곳을 떠나려고 했는지. 무얼 두려워했는지요. 지금 막 생각이 났어요.”

“그게 무어지?”

“유령. 레오니가 두려워한 것은 유령이에요. 그녀에게만 보였던 한에 사무친 유령들.”

“오호라, 어쩐지 온몸이 찌릿찌릿한 게 기분이 끝내준다 했어.”

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응접실이었다. 진열장 하나, 테이블 하나 그리고 소파까지. 아주 단출하고 별 볼 일 없는 곳이었다.

“왕성에 유령이 나온다는 말은 없어. 아무리 쉬쉬해도 그런 소문은 퍼져나가지. 물론 레오니 공주가 종종 이유를 알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 일했던 시녀들에게서 유령을 보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오.”

“모르겠어요. 다만 두려워요. 안으로 들어오니 더 그러네요. 이제 와 말이지만 레오니의 기억은 형편없어요. 제대로 된 것이 거의 없죠. 이번에도 그럴지 몰라요. 그녀가 환영을 본 것일 수도 있죠. 뭐 이제는 그 기억마저도 점차 희미해져 가니까요.”

리아는 요즘 자신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레오니의 지난 과거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처럼 가만히 집중해 생각해야만 조금씩 떠올랐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곳 엘리시아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다는 방증일까?

“걱정도 팔자다. 잊으면 좋은 거 아니야? 나 같으면 그런 징글징글한 기억은 안 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발레포르가 리아를 살피며 말했다. 얄밉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리아를 챙기고 있었다.

“말해 줘. 이것도 다 정해진 순서인 거야?”

“글쎄, 그것까진 모르지만, 어차피 여기서 살아가야 할 건 너야. 레오니의 기억이 남아 있던 이유는 네가 잘 적응하기 위함이었어. 이제 필요도 없잖아.”

맞는 말이지. 어차피 정확하지도 않은 엉터리 기억이었으니.

“나 역시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바요. 당신의 과거보다는 우리가 함께하는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더 중요해.”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알겠어요. 당장 내 눈앞에 유령이 나타난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죠. 난 레오니가 아니니까. 그리고 지금 얽혀 있는 이 복잡한 것들을 다 해결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거라고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왔잖아. 빨리 왕 나오라고 해. 만나고 끝내 버리게.”

발레포르가 또 나섰다. 말리지만 않는다면 혼자 왕이고 왕비고 다 만나서 해결해 버리고 싶은데. 인간 세상은 뭐가 이리 복잡하기만 한 건지. 눈치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리아는 발레포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매튜가 한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왕과 왕비에 대한 것 말이오?”

“네. 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이요. 바벨로프 공작은 어떤 사람이죠?”

“글쎄, 야망이 크다는 것은 알지. 제시카 왕비는 그의 사생아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 드러내 놓고 아는 척을 하지 않을 뿐.”

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정치란 건 정말 복잡하군요. 거기에 내가 껴있다니. 정말 싫다.”

“공주의 숙명이지.”

“정말 왕이 당신을 필요해서 부른 걸까요?”

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응접실 문이 열리며 매튜가 다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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