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왕비 제시카
라이언은 아델궁 앞에 서서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바로 이곳에서 벌벌 떨고 있던 레오니를 데려가 마차에 태웠었다. 무척이나 볼품없이 야위었던 모습. 그 초라한 얼굴에 반을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눈에 담겨 있었던 두려움과 혐오.
그때 그 자리에 이제는 레오니가 아닌 리아가 서 있다. 완벽하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누가 리아를 보고 그때의 레오니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빨간 머리와 황금색 눈동자를 제외한다면 조금도 닮아 있지 않은 같지만 다른 두 사람.
“라이언. 무슨 생각을 해요?”
“기억한다고 했었지?”
“기억?”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던 리아가 이내 라이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
“아… 네.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그날 이 앞에서 마차를 탔었죠.”
라이언이 리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생각했어. 그때 내가 그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러게요. 뭐, 또 모르죠. 그랬다면 더 멋진 남자가 지금 내 옆에 서 있었을 수도….”
장난스러운 리아의 대답에 라이언이 그녀의 코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다행이군. 순간의 선택으로 평생 후회할 뻔했으니. 그때의 나를 칭찬해야겠어.”
리아는 라이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그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옳은 선택을 해 줘서 참 고마워요.”
“나 역시. 내게 와 줘서 고마워.”
기사단원들과 시종들 시녀들이 공작 부부의 애정행각을 보며 애써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지만 단 한 명 예외인 사람이 있었다.
라이언과 리아의 머릿속으로 찢어질 듯 날카로운 고함이 파고들었다.
‘지랄한다! 누구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만 떨어져!’
두 사람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발레포르가 능력을 써서 둘에게만 소리를 질렀다.
고막을 찢을듯한 소리에 이마를 찡그리며 리아가 주위를 둘러보자 발레포르가 팔짱을 켠 채 조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마님, 배고파요.”
눈이 마주치자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리아는 라이언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을 푸르며 이를 앙다문 채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댄. 우리어서 들어가자꾸나. 어린아이는 식사를 거르면 안 되는 법이지. 많이 먹고 빨리 커야지. 기사가 되려면 말이야. 댄, 네가 원하면 이곳에서도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줄게. 좋지?”
훈련이라니! 발레포르의 얼굴에 단번에 그늘이 졌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댄이 아닌 그저 댄의 몸을 빌린 발레포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기사단원들은 좋다며 대답을 했다.
“공작부인! 맡겨만 주시면 저희가 완벽하게 훌륭한 기사로 교육하겠습니다! 댄, 요 꼬맹이 녀석 이리 오너라!”
기사단원 중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눈동자를 마구 굴리며 경악하는 발레포르를 향해 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어디서 소리를 질러! 한 번만 더 그랬다가는 진짜 종일 기사들 시중이나 들고 훈련이나 받게 할 거야!
리아가 소리 없는 경고를 날렸다.
때로는 말보다 눈빛이 더 정확하고 강렬할 수도 있었다. 마치 지금의 리아처럼.
발레포르는 완벽한 빙의를 위해 주술을 썼다. 좀 더 안전하고 빙의된 상태로 손쉽게 악마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덕분에 그는 앞으로 1주일간 댄의 몸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중간에 빙의를 그만뒀다가는 댄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발레포르에게 지금 리아의 협박이 무척이나 손쉽게 먹혀들어 갔다.
발레포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기사단원들에게 시달리는 것이었다. 리아와 같은 마차에 타고 오기 위해 얼마나 비굴하게 그녀에게 사정했던가!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제발 그러지 마! 응? 나 진짜 싫다고!’
발레포르가 아무도 모르게 리아를 향해 사정하자 그녀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 여기까지 와서 훈련하는 것은 좀 그렇겠죠? 정말 아쉽지만 당분간 댄은 제 시종으로 둬야겠어요.”
“댄이 많이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 무척이나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아닌가. 그렇지 댄?”
“공, 공작 각하. 저는 괜찮습니다. 마님께서 절 필요로 하시니 당분간은 마님의 시종으로 지내고 싶습니다.”
말을 더듬는 발레포르를 보며 리아가 까르르 웃었다. 아델궁에 처음으로 웃음소리가 퍼져나간 순간이었다.
***
“보았느냐?”
뛰어왔는지 힘겹게 가쁜 숨을 고르는 시녀 한나를 향해 왕비 제시카가 소리쳤다.
“하아…하아… 네… 마마… 보았습니다….”
“그래? 보았어? 그럼 본 것을 고하거라.”
“그, 그게….”
여전히 숨을 몰아쉬는 시녀를 보며 제시카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못난 것!
“여봐라. 여기 빨리 물을 한 잔 가져오너라.”
서 있던 시녀 한 명이 곧장 제시카의 명령을 따랐다.
물을 마시고 숨을 좀 고르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은지 한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알던 분이 아니십니다.”
“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제대로 설명해 보아라. 그게 무슨 말이지?”
한나는 레오니가 출궁하기 전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시녀였다. 그 당시 레오니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한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한나는 자신이 본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눈을 비벼대며 다시 보았지만 분명 환상은 아니었다. 어떻게 이 정도로 변할 수가 있는 것일까?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정말 완벽하게 달라지셨습니다.”
한나는 호기심이 가득한 제시카를 바라보며 자신이 목격한 광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궁을 한번 쳐다보시더니 이내 베드포드 공작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부부 사이는 무척이나 좋아 보였고 공작은 시종일관 웃으며 공주님을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공주님은….”
“공주는?”
“소문대로 정말 아름다우셨습니다. 하얀 피부에 붉은 머리카락이 눈이 부셨고 에메랄드빛 드레스가 우아했습니다. 표정은 밝으셨고 당당하셨으며 심지어 크게 웃기까지 하셨습니다.”
“웃어?”
“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공주님의 웃음소리가 아델궁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였습니다. 직접 그 광경을 목격한 저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한나는 단 한 번도 공주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이전에는 말이다.
“정녕 네가 본 것이 레오니 공주가 맞더냐?”
제시카가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네. 왕비 마마. 믿어 주시옵소서. 제가 어찌 감히 마마께 거짓을 고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부 사실이옵니다. 분명 확실했습니다. 엘리시아에 그토록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오직 레오니 공주님뿐입니다.”
“소문대로 우아하고 아름답다?”
“무, 물론 왕비 마마의 아름다움에는 발끝조차 미치지 못하옵니다.”
한나가 제시카의 기분을 살피며 바닥에 와락 엎드렸다.
“네가 들은 것이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 맞느냐?”
“분명 그것은 웃음소리였습니다.”
아델궁 앞에 서서 웃었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한나가 금방 들통날 것이 뻔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제시카는 베드포드 공작이 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한나를 아델궁으로 보내 공주의 동태를 살피도록 했다.
넬슨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후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도.
마음에 드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왕은 자신의 편이 아니었고 공주는 달라졌다. 그리고 아들을 낳지 못한 지 벌써 10년째였다.
제시카는 초조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궁을 들이자는 대신들을 차갑게 쳐내며 막아 주던 아버지 바벨로프 공작이 변했다.
아버지이자 엘리시아의 재상인 바벨로프 공작은 며칠 전 제시카를 찾아와 끝끝내 아들을 낳을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더는 다른 대신들의 원성을 막아 줄 수가 없다고 말이다.
바벨로프 공작의 권력욕은 딸을 향한 애정보다도 몇 배나 강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다른 귀족 가의 영애가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는 꼴을 보기 전에 한시바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니 후궁이 될 필요조차 없었다. 당장이라도 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 누구와도 동침할 수 있었고,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과 왕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온 왕궁에 소문난 사실이었고 바벨로프 공작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제시카는 아버지 바벨로프 공작이 계획하고 있는 다른 방법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바벨로프 공작에게는 제시카 말고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생아가 여럿 있었고, 그중에서 적당히 한 명을 골라 후궁으로 들이는 것쯤이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럴싸하게 신분세탁을 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고 그만큼 현재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공교롭게도 공주 레오니가 왕성을 방문하겠다고 서신을 보내온 시점부터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 저주받은 공주 레오니 탓이었다. 제시카는 공주에게 화살을 돌렸다.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것도, 던컨의 사랑이 떠나간 것도, 아버지가 변해 버린 것까지도 모조리 다 공주의 저주 때문이라고.
저주받은 공주가 왕실로 돌아왔기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눈앞에서 공주가 행복하게 웃는 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없애 버려야 했다. 바벨로프 공작은 그런 제시카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
제시카는 며칠 전 바벨로프 공작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베드포드 공작이 거슬린단 말이에요. 행여나 그가 왕과 붙어먹기라도 한다면 큰일입니다. 갑자기 망할 공주 년을 데리고 궁으로 오겠다는 것도 수상하고. 어떻게든 그들을 처치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따님 생각도 그러하죠?”
“처…치요?”
“그가 본격적으로 왕실 일에 관여하기 시작한다면… 베드포드 공작은 쉽게 감당할 수가 없는 상대랍니다. 그건 무조건 막아야 해요. 따님이 이 아비를 도와주실 거죠?”
“마땅한 바…방법이…”
“쯧쯧… 그건 왕비마마님이 고민해 보셔야지요. 지금껏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실 수 있으셨던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이 아비가 따님의 뒤를 봐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따님께서 도우실 차례지요. 따님 저는 따님이 저지르셨던 모든 일들을 이미 다 알고 있답니다. 계속 실패만 하셨으니 이번에는 성공하셔야죠. 어리석은 남자 둘을 이간질하는 것쯤이야 참 쉬운 일이 아닙니까?”
이간질? 둘 사이가 절대 가까워질 수 없도록 오해하게 만든다고?
“아, 알겠어요. 해 보겠습니다.”
“그럼요. 그래야지요. 그래야 저도 우리 왕비마마님이 좀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무실 수 있도록 지켜드릴 것이 아닙니까.”
제시카는 자꾸만 떠오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했다. 지금보다 완벽하고 확실하게.
처음부터 공주와 베드포드 공작의 결혼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공주가 변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째서 변했단 말인가. 죽은 듯 숨죽여 거지처럼 살 것이지. 왜 갑자기 변해서 일을 이렇게 망쳐 버린단 말인가.
에리스의 딸. 요망한 것!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베드포드 공작을 꼬셔서 궁까지 왔을까?
“한나.”
제시카의 음산한 목소리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한나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한나, 너는 계속해서 공주의 동태를 살피거라. 아델궁으로 돌아가.”
“네, 마마. 네 그러겠습니다.”
한나가 덜덜 떨며 몸을 들어 뒷걸음질로 제시카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제시카는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분명한 것은 공작 부부는 넬슨의 배후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만약 넬슨의 뒤에 왕이 있었다고 한다면?
공주가 악녀 에리스의 딸이라는 사실을 폭로해 왕실의 위엄을 훼손하는 방법보다는 베드포드 공작과 던컨. 둘 사이를 갈라놔 척을 지게 만드는 편이 좋겠지?
악녀 에리스의 딸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겠어.
“왕비 마마, 로비 베이트만 경이 찾아오셨습니다.”
“들라 하라.”
로비가 찾아왔다는 말에 제시카가 벌떡 일어났다.
“왕비 마마께 인사를 올립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로비에게 손수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운 제시카가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망측한 광경을 보고 있던 시녀들이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로비. 말해봐. 좋은 소식을 가져온 거지? 제발 그렇다고 해 줘.”
로비는 자신의 팔을 잡은 제시카의 손을 잡아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의 왕비님. 당신께서 기뻐하실 소식을 가져왔답니다.”
“찾았어? 찾은 거야?”
제시카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럼요. 제가 도망친 시녀를 찾아냈습니다. 베드포드 공작보다 먼저 찾아내느라 어찌나 애를 썼는지….”
로비는 제시카의 손을 꼭 잡고 한참이나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구구절절 읊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