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드디어
라이언과 리아를 태운 마차가 왕성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커튼을 걷어 창밖으로 보이는 성벽을 확인한 라이언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뱉어냈다.
“후… 결국, 오고야 말았군.”
라이언의 말에 끝나기가 무섭게 빈정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빠지시던가.”
라이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리아가 발끝으로 앞자리에 앉은 댄의 다리를 툭 쳤다.
“발레포르 그만해. 둘이 언제까지 싸울 거야? 그리고 분명 내 남편을 존중해 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싫다고 했잖아. 내가 왜? 내가 어째서 인간 나부랭이를 존경해야 하지?”
“발레포르! 너 입 안 다물어!”
라이언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리아와 어린 댄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함께하고는 있지만, 라이언은 끝까지 르셀행을 반대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호랑이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토끼라니. 지금 자신들의 모습이 딱 그 꼴이지 않은가!
“발레포르. 이제부터 언행을 조심해 줘. 알겠어?”
화가 많이 난 듯한 리아의 목소리에 발레포르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표정에는 심술이 가득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마. 그리고 라이언.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여기까지 왔으면 함께 힘을 합쳐 잘 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리아의 지적에 라이언이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난 가만히 있었소. 누가 딴지를 걸어서 그렇지.”
그 모습을 그냥 보고 넘어갈 발레포르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발레포르는 라이언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남편이랍시고 리아 옆에 딱 붙어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심기가 불편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인간.
“기운 빠지게 먼저 한숨을 푹푹 쉬어댄 게 누군데? 난 네놈이 어째서 죽음의 사자라고 불리는지를 모르겠다. 연약해 빠진 인간 주제에.”
죽음의 사자라니. 함부로 죽음을 입에 올리다니.
“뭐라고?”
라이언 역시도 발레포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아와 투닥대는 모습이 거슬렸다. 뭐 이렇게 친해? 발레포르에게만 보여 주는 리아의 또 다른 모습도 낯설고 이상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질투가 났다. 둘 사이는 너무 편했고 너무 친했다.
악마를 두고 질투라니. 웃기고 꼴사납지만, 감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만! 제발 둘 다 그만 좀 해요! 정말 미칠 것 같아. 아니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어서 며칠 내내 싸우는 거예요? 발레포르 너 자꾸 그럴래?”
리아가 있는 힘껏 소리를 빽 질렀다. 방음장치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 마차라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호위를 하는 검은 기사단과 성안의 병사들에게까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으리라.
라이언이 리아의 말을 믿어 준 이후 두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오니의 몸으로 살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발레포르는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였다.
자신이 아픈 와중에 왜 댄을 찾았는지 설명하면서 마침 돌아온 발레포르를 라이언에게 소개해 주었다. 발레포르는 인간 따위를 어떻게 믿고 사실대로 다 말했냐며 펄쩍 뛰었지만 결국은 리아를 이기지 못하고 라이언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악마라는 말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딘가 미심쩍은 모습을 보이는 라이언에게 발레포르는 깊은 밤 악마 본연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놀라게 했다.
다행히도 그 뒤부터 라이언은 발레포르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아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다.
발레포르는 오로지 리아에게만 관대했다. 그는 악마였고 그에게 인간은 언제나 하찮은 존재였다. 리아의 남편이라고 해서 발레포르의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리아는 그에게 인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 이외에 나머지는 그 어떤 누구라도 모두 같았다.
발레포르와 라이언의 간격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고 르셀로 오는 마차에서 내내 둘은 신경전을 벌였다.
둘을 앞에 두고 리아는 왕을 만나러 가겠다고 선언했다. 반대해도 무조건 가겠다고. 왕과 왕비를 만나겠다고. 범인을 직접 찾겠다고 말이다.
라이언은 반대했고, 발레포르는 찬성했다. 거기서부터 둘은 어긋났다.
리아는 반대하는 라이언을 설득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범인은 누군지 확실하지 않지만, 왕실의 사람이었고 더 나아가 왕과 왕비 중 한 명이었다. 오로지 왕과 왕비만 출입할 수 있는 금고에서 꺼내온 독약.
왕일까? 아니면 왕비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어째서 레오니를 죽이려 하는지 알고 싶었다. 힘겹게 살다가 버려지듯 내쳐진 레오니. 그 불쌍한 아이를 이렇게까지 죽이려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물론 라이언의 검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리아의 치유능력은 라루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졌고 앞으로 라이언에게 또다시 통증이 나타난다면 그때는 그녀도 그의 아픔을 낫게 해 줄 방법이 없었다.
발레포르에게 물었지만, 그도 뚜렷한 답변을 내어놓지 못했다.
검을 되찾는다고 해서 라이언의 문제가 해결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검을 찾기 위해 애써왔는데 이제 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반대하던 라이언의 마음을 돌린 것은 리아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리아는 말했다. 범인이 왕이든 왕비든 왕실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왕실방문을 알고 있을 텐데 그때 처리하지 않고 미리 선수를 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어쩌면 자신에게는 왕성이 가장 안전한 장소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리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일리가 있었다. 실패를 무릅쓰면서까지 다급하게 그녀를 죽이려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범인은 어쩌면 궁에 그녀가 오는 것을 겁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떤 사정 때문인지는 전혀 모르지만.
때마침 나타난 악마라는 녀석은 자신이 곁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큰소리를 쳤다. 물론 지금까지 상황을 봐서는(리아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그 악마도 믿을 것이 못 되지만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 가장 결정적으로 라이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리아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녀의 환생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째서 그토록 왕궁에 가고 싶어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꼭 왕을 만나야 한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하나뿐인 오빠. 하나뿐인 핏줄. 만나고 싶겠지. 그래, 그립고 궁금할 것이다.
모든 사건의 실마리는 그곳에 있었다.
“내가 두 사람에게 하는 마지막 경고예요. 제발 싸우지 말아요.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잊지 말라고요!”
씩씩대며 소리치는 리아를 보며 라이언과 발레포르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서로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눈치는 있었다. 이제 그만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안다.
“그나저나 아직도 데이지를 찾지 못했나요?”
넬슨이 폭주한 날 사라진 데이지는 여전히 그 행적을 알 수 없었다. 어찌나 꼭꼭 숨어 버렸는지 수많은 기사단을 풀었으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데이지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짐작건대 만약 그 아이도 배후를 알고 있다면 아마도 이곳 르셀로 오지 않았을까 싶소.”
아무것도 모르고 주는 대로 받아마셨던 차 속에 독약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만약 라루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쥐새끼 같은 것. 내 눈에 띄기만 해 봐. 진짜 쥐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발레포르가 이를 바득 갈았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리아가 독약이 담긴 차를 마셨다니. 그런데도 몰랐다니. 악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섬뜩한 말에 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진정 좀 해. 누가 너 그러는 거 보면 놀라 자빠지겠어. 근데 정말 쥐로 만들 수 있어?”
“악마의 능력을 우습게 보지 마. 그건 내 수많은 능력 중에 아주 하찮은 한 가지일 뿐이니까.”
“오호.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중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뭔데?”
“가끔 내 말 안 듣고 내 속썩이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도저히 못 참을 때 너한테 말할 테니 동물로 만들어 줘.”
리아가 라이언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라이언이라는 것을 눈치챈 발레포르가 음흉하게 웃었다.
“크큭. 네 부탁은 당연히 들어줘야지. 지금 당장도 가능한데. 어때? 생각 있어? 어떤 걸 원해? 말만 해. 원하는 동물이 뭐야?”
“그 사람과 딱 닮은 동물이 하나 있긴 한데.”
“사자? 안 돼. 그건 너무 크잖아.”
리아가 아니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사자는 무슨.
“아닌데. 사자 아니야.”
“그럼 뭐지?”
이번에 끼어든 것은 라이언이었다. 그도 리아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쯤을 알아채는 눈치는 있었다.
“궁금해요?”
“내가 당신 속을 그렇게 썩였나? 내 생각에는 반대인 것 같은데.”
“지금도 내 말 안 듣고 계속 발레포르랑 싸운 게 누군데 그래요. 어른이 참아야지. 악마랑 똑같이 굴면 어떻게 해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웃음을 참느라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웃었다가는 못된 악마 놈이 또 어떤 발광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야! 너 지금 그거 나 놀리는 말이지?”
발레포르가 짧은 다리를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알면 가만히 좀 있어. 너 진짜 한 번만 더 그러면 가만 안 둬!”
리아가 주먹을 쥐고 협박을 하자 발레포르가 씩씩대며 눈을 감았다. 아! 어째서 리아 앞에만 서면 약해지는가. 정이 문제라니까! 정이!
얌전해진 발레포르를 보며 라이언이 다시 리아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그 동물이 뭐지?”
“정말 몰라요?”
“전혀. 뭐 사자나 곰 독수리 같은 맹수 아닌가?”
라이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하자 리아는 그 모습이 귀여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리 와 봐요.”
리아가 라이언을 잡아당겨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맹수는 무슨… 당신은 토끼예요. 귀여운 모습이 똑 닮았어. 자꾸 내 말 안 들으면 작은 토끼로 만들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닐 거예요.”
“뭐?”
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레포르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야! 다 들리거든! 너 미쳤냐!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구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첫 번째 성문을 지나 내성으로 이어지는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 안은 엉망진창으로 소란스러웠다.
덜커덕-
한참을 달린 끝에 마차가 멈춰섰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델궁 앞이었다.
레오니가 결혼 전까지 살았던 곳. 아델궁은 여전히 조용했다.
결혼해서 출가한 공주가 성을 방문할 때는 자신이 어릴 적 살았던 궁에 머무는 것이 왕실의 예법이었다.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곧바로 왕을 만날 수는 없었다. 왕에게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왕이 불러 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라이언과 리아 그리고 댄이 내렸다.
“쉬고 계시면 왕께서 부르실 것이라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매튜가 곧장 앞으로 나서서 도착과 동시에 전해진 왕의 전갈을 알렸다.
리아는 아델궁 앞에 섰다.
레오니가 끔찍하게 싫어했던 곳.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 결혼을 선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
공주가 머물던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작고 허름했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기억 속의 모습과 다르게 아델궁은 깨끗했다.
넓디넓은 왕성 안, 크고 작은 궁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곳.
작은 정원을 끼고 있는 2층으로 된 건물. 궁이라고 부르기에도 무척이나 소박한 공간. 레오니가 평생을 머물렀던 곳.
악녀 에리스의 지하감옥 위에 지어진 섬뜩한 곳에 드디어 리아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