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라이언의 고백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부터 라이언에게는 모든 것이 후회였다. 왜 그렇게밖에 답할 수 없었을까? 어째서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을까?
리아가 했던 말들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로 믿지 못하는 자신 역시도.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이 빨라졌다. 혼자 있고 싶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각하. 마침 내려오시는군요.”
갑자기 나타난 매튜의 물음에 라이언이 계단 끝에 멈춰섰다.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매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매튜.”
“그렇지않아도 각하께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다행입니다.”
공작부인이 쉬고 계시는 침실까지 찾아가야 할까 봐 걱정했는데 매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 보게.”
“지시하신 대로 사라진 시녀 데이지를 추적하고 있는데 좀처럼 행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작정하고 숨어 버린 모양입니다.”
넬슨이 죽어 버린 지금, 데이지는 유일하게 남은 용의자였다. 그녀를 찾아야만 이번 사건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군.”
데이지를 당장 찾아내라고 다급히 명령을 내릴 때 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매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어두웠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또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못하신데.”
“아무 일도. 그냥 조금 피곤하군.”
매튜는 더 자세히 캐물으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자기 일어났다. 그 역시도 피곤을 느끼고 있는데 공작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우선 수색조를 내보냈으니 작은 단서라도 발견하면 바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난 서재에 있을 테니 자네가 신경 좀 써 주게.”
말을 마친 라이언이 곧장 돌아서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튜는 뒤돌아 걸어가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위층에 있을 공작부인을 떠올렸다.
어째서 함께 계시지 않고 내려오신 거지? 다른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괜한 걱정이지.”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한 법이니까. 그것이 위대한 검은 사자 일지라도 말이다. 라이언의 뒤를 쫓던 매튜의 시선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지금 가장 할 일이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
매튜의 의아한 얼굴을 모른척하며 서재로 들어온 라이언은 곧장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지금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도대체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처음부터 결론은 하나였다. 가만히 지난날을 떠올려 봐도 그랬다.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를.
그날 베드포드 성의 계단에 서 있던 아내의 모습은 라이언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 전혀 다른 사람. 그게 바로 리아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달라졌고 변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다만 변한 그녀의 모습이 좋았기에 크게 문제 삼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래 좋았다.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다른 세계에서 온 여인.”
라이언이 작게 중얼댔다. 정말 한참 만에 내뱉은 말이었다. 어스름한 저녁부터 새벽 동이 틀 무렵까지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이 사랑한 여인은 진정 누구였을까?
그리고 얻은 답은 하나였다.
“리아. 나의 아내.”
그건 바로 리아였다. 쉽게 믿겨 지지 않았지만 믿어야 했다. 돌아가는 모든 상황이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녀는 미친것도 헛소리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진실로 가득했다. 다만 흔들렸던 이유는 그녀의 말을 그가 믿어 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서였을 것이다.
갑자기 숨이 찼다. 리아가 보고 싶었다. 자신이 방을 떠나온 이후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두려워하고 있겠지.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겠지.
돌아보면 가장 힘든 것은 리아였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 그녀가 가장 대단했다.
라이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이럴 시간이 없었다.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동안 그녀를 노리는 검은 그림자는 더 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믿고 그녀와 함께 앞일을 준비해야 했다.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지 않은가.
라이언은 마음이 급해졌다. 처음부터 결론은 하나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리아의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옆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고 아직도 누군가가 그녀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믿기로 했다.
***
라이언이 고민하고 있던 그 시각 방에 남은 리아 역시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깨어 있었다. 몹시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다 털어놓고 나니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고,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감정의 기복은 한 시간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했다. 당장 라이언이 있다는 서재로 뛰어 내려가고 싶은 마음과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자고 하는 마음이 부딪히며 충돌했다.
발레포르를 불러대며 이 사태를 해결해 달라고 투정을 부리다가도 이건 아니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발레포르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롯이 라이언과 자신 둘의 문제였다.
리아 자신이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평생을 모른 척 살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사실 리아의 성격상 전생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평생 그를 속인다는 것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그녀를 괴롭혀댈 것이 뻔했다. 레오니의 삶을 빼앗았다는 자책과 함께.
만약 라이언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때 발레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늦지 않는다.
리아는 자꾸만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연거푸 심호흡했다.
“고민이 길어지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고 그녀가 내뱉은 말들은 이미 주워 담을 수조차 없었다.
“차라리 속 시원해.”
그래 한편으로는 속 시원했다. 더는 속이지 않고 더는 찝찝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가끔 부르는 레오니라는 이름에 깜짝깜짝 놀라지 않아도 된다.
그가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고민하는 것을 이해했다. 만약 지금 서로의 상황이 반대였다면 리아 역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하는 말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누가 그걸 쉽게 믿을 수 있겠어.
“황당하겠지. 그런 말을 어떻게 믿어.”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배도 고프지 않았다. 오늘 밤 안에는 그의 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기다림은 한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방안을 수십 바퀴 돌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여러 번.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걱정은 늘어갔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초조함에 방을 한 바퀴 더 돌고 난 리아는 다리가 아파 침대 끝에 주저앉았다. 그에게 시간을 주겠다고 그를 믿겠다고 했지만, 긴 밤이 지나고 이제 곧 아침이었다.
그냥 떠나 버린 것은 아니겠지? 피도 눈물도 없는 죽음의 사자. 갓 결혼한 신부를 3년이나 내버려 둔 남자. 그게 바로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가 아니었던가.
“설마…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말은 하면서 벌써 몸은 문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당장 내려가서 라이언이 집 안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마음은 벌써 계단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한걸음에 문 앞에 도착한 리아는 빠르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철컥-
다급하게 열린 문 앞에… 라이언이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라이언의 모습에 놀란 리아가 한 발짝 물러서며 소리쳤다.
“라이언?”
“리아.”
갑자기 열린 문에 놀란 것은 라이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막 문을 열려던 참이었다.
리아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부여잡았다.
“들어올 건가요?”
리아의 물음에 당황한 라이언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예요. 안으로 들어올 거냐고 물었어요.”
까칠한 리아의 목소리에 라이언은 천천히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지난밤부터 조금도 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안색은 파리했고 눈 밑은 어두웠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밤사이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사정없이 구겨진 드레스는 보기 흉했다. 심지어 그녀는… 맙소사 맨발이었다.
드레스 자락 밑으로 작고 하얀 발이 솟아 나와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까칠한 목소리도 투덜대는 입술도 찡그린 이마도 꽉 움켜쥔 두 주먹과 꼼지락대는 발가락까지.
리아의 성격상 더는 못 참고 뛰쳐나온 것이 분명했다. 슬리퍼조차 신을 정신도 없이 갑자기 욱했겠지.
“왜 말이 없어요?”
“피곤해.”
“네?”
“자고 싶군.”
“그게 무슨….”
당황해하는 리아를 단번에 안아 들고는 라이언은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라이언!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신도 한숨도 못 잤을 거 아니오.”
물론 그의 말이 맞았다. 그렇지만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야.
“그렇다고 이렇게….”
이불을 걷어낸 라이언은 리아를 내려놓고 그 옆에 자신도 함께 누웠다. 그리고 그녀를 어깨를 끌어안고는 다시 이불을 덮었다.
“우리에게는 지금 휴식이 필요해.”
“라이언… 우리는 아직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어요. 그건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리아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냥 이렇게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말을 꺼낸 이상 결론을 내야 했다.
“리아.”
라이언이 흐트러진 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당신을 믿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날…믿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내 품 안에서 잠드는 것이라오. 남은 이야기는 자고 일어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내가 당신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건 언제까지나 변함없을 것이니.”
“라이언 나는….”
“사랑해. 사랑하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믿을 수밖에 없지. 당신이 다른 세계에서 온 여인일지라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라이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리아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 눈물 때문에 내 가슴이 다 젖어 버리겠군. 이제 그만 잡시다. 당신은 쉬어야 해. 나도 마찬가지고.”
다시 리아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더더욱 확실해졌다. 어떤 상황이 온다 해도 자신은 그녀를 믿는다는 것을.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나는 당신이 도망간 줄 알았어요.”
리아가 라이언의 가슴을 두드리며 투정을 부렸다. 믿는다는 라이언의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그는 리아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단 한 명. 그게 바로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투덜대며 우는 리아의 머리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얼마나 혼자 수많은 생각에 힘들었을까? 초조했을까?
“미안해. 내가 당신을 힘들게 했지?”
어리광을 받아 줄수록 리아의 울음은 더 커졌다.
“울지 마. 당신이 울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오. 어리석은 나를 용서해. 제발 울지 마.”
라이언은 리아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의 심장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당신 말이 맞아. 나도 당신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이상한 걸 알면서도 달라진 당신이 좋아서.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가 좋아서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간 거였지.”
리아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라이언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의 당신이야. 내 옆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내 아내. 리아 당신.”
“라이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 결혼도 마찬가지고 말이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결혼을 했고 아내가 된 여자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어. 생각해 보면 그때의 레오니는 지금의 당신과 무척이나 달랐지.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힘들어했어.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공포뿐이었지.”
리아는 담담하게 지난 이야기를 꺼내 놓는 라이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금 레오니와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었다.
“사실 레오니와는 기억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어. 그녀는 나를 싫어했고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지. 뭐랄까? 싫어했다기보다는 좀처럼 좁혀질 수 없는 공포와 혐오였어. 그래서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 깜짝 놀랐지. 외모의 변화도 그러했지만, 그것보다 더 날 놀라게 했던 것은 당신의 눈동자에 담긴 호기심이었지.”
첫 만남을 떠올리는 듯 라이언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마 그 눈빛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게 아닌가 싶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죠?”
어느새 울음을 그친 리아가 라이언을 향해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그는 여전히 눈물이 번진 얼굴로 싱긋 웃는 리아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손끝으로 그녀의 코를 살짝 문질렀다.
“당신의 고백을 들으니 알겠더군.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당신은 레오니가 아니야. 그녀와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지. 그리고 맞소. 그날 계단 위에 서 있던 당신과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당신에게 빠져버렸다오.”
라이언은 옆으로 누운 리아의 몸을 위로 끌어올려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 여전히 나는 당신에게 빠져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말했다시피 우리는 쉬어야 해.”
라이언은 자신의 코를 리아의 코에 문지르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코끝에 한 번 더. 그다음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장 입술을 덮었다.
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우선은 그를 느끼고 싶었다.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을. 자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서로가 함께 있음을 감사하며.
그렇게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그들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