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고백
오늘따라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리아는 숨이 가빠졌다.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도 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애타게 불러도 결국 발레포르는 나타나지 않았다.
발레포르는 말했었다. 라루체가 독약을 흡수하게 하려면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고. 만약 생각보다 많은 힘이 필요하게 되면 회복하기 위해 몇 일간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모든 일이 끝이 난 후 그는 몹시 지쳤고 곧바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라루체가 사라져 버린 리아가 아무리 애타게 부른다고 해도 발레포르에게는 이제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범인이 넬슨이고 유력한 공범인 데이지가 사라졌다는 것도 발레포르는 아직 모를 테지. 지금 라이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몸은 괜찮은가?”
침대 끝에 멍하게 앉아 있던 리아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라이언의 물음에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제발 조심! 그러다 상처가 벌어지겠어.”
자꾸만 아프고 다치는 것도 못마땅한데 그 모든 것들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리아의 모습이 라이언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곧장 리아를 안아 들어 침대 위에 눕혔다. 날이 선 말투와는 다르게 그의 품은 포근했고 손끝은 부드러웠다.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정도는 아니에요.”
“도대체 그 정도라는 게 얼만큼이지?”
“라이언….”
언성을 높이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작게 읊조렸다. 화를 내는 그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녀 자신이었다면 진작에 참지 못하고 찾아가 따졌을 테니.
“당신을 어쩌면 좋을지는 모르겠군. 분명 미치도록 화가 났는데….”
라이언이 말끝을 흐리며 손을 뻗어 리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빛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미안해요.”
리아가 볼에 닿은 라이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미안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그를 속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그런 속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라이언으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럼 이제 말해 줄 수 있나?”
그의 말을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다 말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어떻게 이 세상에 떨어지게 되었는지부터 지금 처한 상황까지 모두다.
있는 그대로 전부 말했을 때, 그는 어디까지 얼마나 믿어 줄 수 있을까?
리아는 두려웠다. 만약 라이언이 믿지 않는다면? 그녀를 미쳤다고 생각한다면?
힘겹게 쌓아 올린 그와의 사랑이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렇게 나온 이상 리아의 선택은 이제 둘뿐이었다.
사실을 고백하고 그의 처분을 기다리던가 아니면 언제 들킬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거짓말을 이어가던가.
“뭘 그렇게 고민하지?”
흔들리는 리아의 눈동자를 라이언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빨리 결정해야 했다. 더는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바로 앞에서 그녀를 채근하고 있었고 더는 도망칠 수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리아는 여전히 얼굴에 닿아 있는 라이언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 어쩌면 이미 결론은 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겁이 나긴 하지만 그녀는 그를 더 속이고 싶지 않았다.
레오니 엘리시아가 아닌 리아로. 진짜 자신을 그대로 사랑해 주기를 바라서 일지도 모르지. 그가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리아라는 이름은 레오니의 어릴 적 애칭이라는 핑계가 아니라 온전히 그녀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리아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티 테이블로 다가가자 라이언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요?”
“내가 모르는 당신에 대해서라면. 전부. 나는 당신의 전부를 원해.”
그는 리아가 앉은 자리 앞에 서 있었다. 그런 라이언을 올려다보다 리아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올려다보느라 나 목 아파요. 그만 앉아요. 다 말해 줄게요.”
너무나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라면 믿어 줄 것 같았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의자를 끌어당겨 리아의 바로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말하고 싶은 부분부터 해 주시오.”
이 모든 일을 설명하려면 전생의 죽음과 레오니의 몸으로 환생하게 된 이야기가 먼저겠지?
리아는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제 믿고 믿지 않고는 그의 선택이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아는 모든 진실을 말할 생각이었다.
새로 얻은 인생을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테니. 리아는 그를 믿고 그의 선택을 기다리기로 했다.
“당신이 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놀란다고 해도 이해할게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당사자인 나조차도 믿기 힘든 일이거든요.”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시작은 어려웠지만 꺼내놓기 시작한 이야기는 조금의 막힘도 없이 그녀의 작은 입을 통해 술술 흘러나왔다.
어떻게 죽었는지부터 어떻게 레오니의 몸속으로 환생하게 되었는지까지 순식간에 털어놓은 리아는 그의 반응을 몰래 살피며 나머지 이야기도 계속 이어나갔다.
그중 가장 고백하기 힘들었던 것은 사라진 치유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그녀의 곁에서 그가 편안할 수 있었던 이유가 사랑의 힘 때문이 아닌 그녀가 가진 라루체라는 마법 보석의 치유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빼놓는다면 어떻게 독을 해독했는지,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까지도 속여야 하므로 리아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모든 것을 고백했다.
긴 이야기가 끝이 나고 리아는 온몸에 힘이 빠져 버렸다. 중간중간 알 수 없는 라이언의 눈빛을 바라볼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또 부여잡으며 그녀는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이제 끝이었다. 더는 속이는 것도 속일 것도 없었고 그의 처분만이 남아 있었다.
라이언은 그녀의 말을 전부 믿어 줄 수도 아니면 그녀를 미쳤다고 할 수도 있었다.
“라이언….”
모든 고백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말이 없는 라이언을 리아가 불렀다.
“솔직히… 잘 모르겠군. 그게 도대체 무슨….”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난 그저 어째서 독에 당한 것을 숨겼는지가 궁금한 것이었는데. 당신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그래 어쩌면 당신이 조금은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건… 이런 건 아니야….”
“라이언. 괜찮아요. 나를 미쳤다고 한다고 해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만큼 내가 한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믿겨 지지 않는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나는 다만 더는 당신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믿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진실을 말하고 싶었어요.”
“당신을 레오… 아니 지금 이 몸으로 환생하게 만들어 준 라루체라는 보석이 독을 흡수하고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래서 치유능력도 사라졌고?”
라이언이 조금은 황당한 목소리로 리아가 했던 말들을 다시 물었다.
“네. 맞아요. 그동안 당신이 내 곁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것도 모두 다 그 때문이었죠. 내 곁에 있으면 불면증도 악몽도 사라지고 이마의 흉터까지도 아프지 않은 이유 말이에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은 생각했다. 그래 그도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그녀 곁에 있으면 평온해질까? 하는 고민을 한 적도 많았다. 늘 결론을 내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그 이유가 사랑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사랑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소.”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그랬으면 했고요. 나조차도 마지막에서야 그 보석의 능력을 알게 되었거든요.”
“당신을 믿어야 할까?”
그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리아의 모든 것을 믿고 싶은 마음과 그녀의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이성이 충돌하고 있겠지.
“솔직하게 말해요?”
라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리아는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믿어 줬으면 좋겠어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지라도, 내가 미친 것 같더라도 말이죠.”
“나도 그러고 싶어.”
“그렇다면 믿어요. 날 믿어 줘요. 당신도 날 이상하다고 생각했잖아요. 당신이 결혼했던 레오니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요.”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담담하게 굴려고 했는데….
점점 리아의 목소리에 감정이 섞여 들어갔다.
“리아가 어릴 적 애칭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리아는 내 원래 이름이에요. 당신이 날 레오니라고 부르는 게 싫어서 거짓말을 했어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한번 터져버린 감정은 멈출 줄을 모르고 휘몰아쳤다.
“미안해요.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떤 쪽이든 당신의 선택을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머뭇대고 있는 당신을 보기가 너무 괴로워요. 제발 어느 쪽이든 빨리 결정해 주세요.”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하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라이언의 말에 리아의 심장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찮아. 그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잖아! 강요하지 않기로 했잖아! 괜찮아. 받아들이자. 그렇지만 생각과는 다른 말이 입을 통해 쏟아졌다.
“정말 나를 믿지 않나요? 조금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야.”
“그렇지만 앞으로 그 사랑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겠죠.”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나를 믿지 않는다면 결론은 하나죠.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
라이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아. 제발.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해. 당신이라면 이 모든 것들을 단번에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겠소? 환생? 악마? 마법의 보석? 그게 평범한 것들은 아니잖아.”
눈물로 번진 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라이언이 말했다.
그는 믿고 싶었다.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들을.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도 간단하거나 쉬운 것들이 아니었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두고 미쳤냐고 흔들어 대지 않는 것만 해도 그에게는 꽤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리아의 표정이 너무 진실 되고 간절해 보였기에 라이언은 그녀의 말을 차근차근 다시 떠올리며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라이언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 넬슨은 나에게 독을 먹였다고 했어요. 해독제가 없는 독을 말이죠. 내 말이 거짓이라면 내가 어떻게 혼자 해독을 했겠어요.”
리아가 라이언을 향해 다시 설명했다. 어떤 쪽이든 그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막상 그가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리아는 초조했다. 어떻게든 그를 이해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가 베드포드 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봐요. 그때의 나에게서 예전의 레오니와 같은 점이 하나라도 있었나요? 당신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잖아요. 난 미친 게 아니에요. 그저 당신께 진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죠.”
“여보. 리아. 제발.”
라이언이 리아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부탁이야. 나에게도 시간을 줘. 난 지금 막 모든 것들을 전해 들은 사람이라오. 그것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당혹스러운 사건들을 말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리아를 쳐다봤다. 그녀를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다만 자신이 갑자기 알게 된 일들로 복잡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계속하세요.”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만 내가 그것들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디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군. 나도 당신을 믿고 싶어. 그렇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오.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리아는 곧장 알겠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단번에 자신의 말을 믿기 어려울 것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자꾸만 무서웠다. 혼자 생각을 한 후에도 믿어 주지 않을까 봐.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릴까 봐. 이대로 사이가 어긋날까 봐.
리아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좋아요. 당신에게 시간을 줄게요.”
쉽지 않은 대답이 그녀의 입을 통해 그에게로 전해졌다. 라이언은 그런 리아를 향해 손을 뻗어 힘이 잔뜩 들어간 그녀의 주먹을 잠시 어루만지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있으시오.”
그리고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리아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왜 이렇게 변덕이야. 믿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건 너잖아.”
자꾸만 이랬다저랬다 하는 자신의 갈대 같은 마음에 대고 리아가 화를 냈다. 그가 믿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괜찮지가 않았다. 그저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을 믿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이렇게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이 나간 뒤 꽉 닫혀 버린 방문을 보며 리아는 자꾸만 눈물이 번지는 눈을 꼭 감았다.
“발레포르 네가 필요해. 라이언을 믿게 할 마지막 방법은 너뿐이야. 어서 와서 날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