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쓰디쓴 진실
매튜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리아는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녀가 태어난 벨로트 13년 9월 12일 그리고 에이미가 사라진 벨로트 13년 12월 28일.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피를 토하며 고꾸라진 넬슨은 조금이나마 힘이 남아 있는 손가락 끝으로 바닥을 긁어대며 애끓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매튜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 넬슨을 내려다보는 모두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상처는 점점 더 벌어졌고 상태는 심각했다. 손가락 끝을 조금 움직이는 것 이외에는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저자를 일으켜라.”
라이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사단원 둘이 넬슨에게 달려들어 양쪽에서 팔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라이언. 그는 지금 많이 다쳤어요.”
“당신의 상처나 살피시오. 내가 당신을 죽이려 한 자의 상태까지 배려해야 하나?”
라이언의 차가운 목소리에 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났어.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독에 당했다는 사실을 숨겼기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들어 나를 봐.”
라이언이 넬슨을 향해 소리쳤다. 라이언의 일갈에도 넬슨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흐흐흐…흐흐….”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바닥을 향해 숙인 넬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상처는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잘 들어. 당신은 지금 헛다리를 짚은 거야. 누구지? 당신에게 딸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알려 준 사람이?”
중요한 것은 넬슨의 뒤에서 그를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였다. 그에게 잘못된 정보를 사실인 양 알려 주고 복수심을 품게 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헛…다…리? 그…게…무슨… 말… 크흑….”
많이 지친 넬슨은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쿨럭댔다.
“라이언. 이러다가 죽겠어요. 죽으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어요. 우선 치료부터 받게 해 줘요.”
어찌 보면 넬슨도 이용을 당한 것이 아닌가. 리아가 라이언을 설득했다.
입술을 꾹 깨물며 미간을 잔뜩 구긴 라이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매튜를 향해 말했다.
“닥터 애버클을 모셔오게.”
“네. 알겠습니다.”
라이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튜가 뒤를 돌아보자 기사단원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말…해… 잘…못된… 정…보?”
핏줄이 다 터져 버린 넬슨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치료부터 받지.”
“당…장… 말…해…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리겠어….”
넬슨에게는 치료를 받을 때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음을 감수해가면서까지 복수를 감행했는데 아니라고?
“당신의 딸이 벨로트 13년 12월 28일 사라진 것이 맞는다면 그녀는 절대로 에리스에게 희생된 것이 아니야. 에리스를 만날 수도 없겠지.”
“무슨…말이지?”
넬슨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에리스는 벨로트 13년 9월 12일 사망했어. 바로 내 아내가 태어난 날.”
“…거…짓…말!”
“당신은 이용당했어. 그게 누군지 어서 말해.”
이용당했다고? 속았다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해가면서 오로지 복수만을 꿈꿨는데.
아니라고?
“…내가…당신을… 어떻게… 믿지?”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아. 내 아내 레오니 엘리시아는 벨로트 13년 9월 12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날 바로 에리스는 처형되었다.”
라이언이 단호하게 말했다.
“죽은 에리스가 당신의 딸을 납치라도 했다는 것인가? 당신의 딸이 실종된 것은 유감이지만 그건 내 아내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군.”
“…거…짓…말… 거짓…말이야….”
넬슨은 거짓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물론 믿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매튜 가서 결혼증서를 가져와.”
눈여겨보지 않아서 몰랐을 뿐 리아의 생년월일은 결혼증서에 똑똑히 쓰여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는 이가 없이 결혼 이후 그냥 방치되어 먼지만 쌓여가고 있기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매튜는 곧장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리아와 라이언의 결혼증서를 가져왔다.
“이것은 엘리시아의 왕이신 던컨 에드거 4세가 발행한 증서지. 한 치의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 신성한 문서야. 보여 주거라.”
라이언의 명령에 따라 매튜는 넬슨의 눈앞에 리아의 생년월일이 또렷이 기록된 결혼증서를 들이밀었다.
넬슨은 종이에 쓰인 글자를 보기 위해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눈을 필사적으로 깜빡였다.
“어때 확인했나?”
“…아…니야… 그럴…리…가….”
넬슨이 절망하며 몸을 흔들었다. 라이언은 그를 잡고 있는 기사단원들에게 고갯짓하며 풀어줄 것을 명했다.
결박이 풀리자 넬슨은 다시 바닥에 엎드려 기다시피 오열했다. 지금껏 무엇을 위해 악행을 저질렀던가.
문득 그의 머릿속에 지난번 마차사고 때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린 가짜마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실을 말한다면 잃어버린 딸 에이미를 찾아 주겠다. 만약 그녀가 살아 있다면.”
에이미를 찾아 준다는 말에 흔들리던 넬슨의 몸이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소름 끼치게도 그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넬슨!”
리아가 소리쳤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약…속…할 수 있나?”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한 그의 표정은 백 마디 말보다 더 믿음이 갔다. 넬슨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많은 것들이 이상했다.
에이미가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이가 엘리시아의 왕비였고 그것은 넬슨의 판단력을 흐려지게 했다. 그는 그저 딸의 죽음에 미쳐 버린 아비였다.
“내…가… 공작…부인에게… 먹인… 독…약은 해…독제…가 없는…것이라고… 했지… 어떻게… 깨어난…건지…모르지만… 운이… 참… 좋군….”
넬슨의 말에 라이언은 리아를 쳐다봤다. 역시 평범한 감기몸살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혼자 해독을 한 거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우선은 넬슨을 통해 배후를 밝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독약을 준 사람이 누구지? 내 아내를 죽이려 한 사람이 도대체 누군가!”
“오직… 왕실… 금고…에만… 있…는… 독약….”
“지금 뭐라고 했나? 왕실금고라고 했나? 이 엘리시아의 왕실금고 말인가?”
“크흐…흑….”
넬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한 번 피를 내뿜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양이 더 많았다. 아직 닥터 애버클은 도착하지 않았고 라이언과 리아는 애가 탔다.
진실을 말하기 전에 넬슨이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말해. 누구지? 거짓된 정보로 너를 홀려 사주를 한 사람이!”
“그…건… 바로… 크흑…윽….”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넬슨이 기침을 하며 쓰러지더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매튜는 재빨리 다가가 넬슨의 상태를 살폈다.
숨을 쉬지 않았다. 급히 넬슨을 눕힌 매튜는 그의 심장을 누르며 온 힘을 다해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인공호흡까지 감행했지만 멈춘 심장은 다시 뛰지 않았다. 한참을 노력하던 매튜가 결국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망했습니다.”
넬슨은 죽었다. 등의 상처도 상처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더 컸다. 그 모든 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칼을 휘두른 매튜의 잘못도 진실을 말한 라이언의 잘못도 아니었다.
넬슨이 죽었다는 말에 라이언은 직접 손을 뻗어 피로 얼룩진 넬슨의 목을 짚었다. 그의 동맥은 조용했다.
죽음. 넬슨은 결국 이용만 당하다가 비참하게 죽고야 말았다. 어쩌면 이용당했다는 것을 모른 채 죽는 편이 나았을까? 아니면 혹시라도 딸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죽어서 다행일까?
넬슨은 눈조차 감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핏줄이 다 터져 버린 빨간 눈동자가 라이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라이언은 직접 넬슨의 눈꺼풀을 감겨 주려고 했지만 부릅뜬 그의 눈꺼풀은 내려오지 않았다.
“각하. 그냥 두십시오. 각하의 손이 더러워집니다. 이용당했다고 해도 그는 살인자입니다. 이전에 강가에 떠오른 시체를 잊으셨습니까?”
때마침 닥터 애버클이 식당 입구에 도착했다. 그는 몹시 놀라며 황급히 누워 있는 넬슨에게로 달려왔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의사의 확실한 사망선고가 내려질 뿐이었다.
“방으로 올라가시오.”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리아를 향해 라이언이 차갑게 말했다.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 평소와는 다른 매서운 라이언의 얼굴에 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눈빛에도 냉기가 뚝뚝 흘렀다.
리아는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벗어나 방으로 향했다.
***
넬슨의 시체는 치워졌고 식당 문은 굳게 닫혔다. 바닥에 스며든 핏자국을 닦아내고 새 단장을 하기 전까지는 다른 곳에서 식사하게 되리라.
닥터 애버클은 이미 한참 전에 공작부인의 치료를 다 끝냈다고 알려왔다. 라이언이 재빨리 잡아당긴 덕분으로 상처는 미미했고 꿰맬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연고를 조금 바르고 붕대를 감았을 뿐이다.
라이언은 서재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리아가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진실이 무엇일까? 이미 독에 대해 알고 있었고 혼자 해독까지 했다고? 리아는 분명 숨기는 것이 있었다. 라이언은 그녀가 숨기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생각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리아. 그리고 넬슨을 조종한 배후까지.
분명 넬슨은 오직 왕실금고에만 있는 해독제가 없는 독약이라고 했다.
매튜에 정보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에리스가 선대 왕비를 살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라페스타의 독약이었다.
르셀 샤르트 궁의 비밀 금고에만 남아 있다는 독약! 그것은 넬슨의 말과 일치했다.
라이언은 넬슨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을 곱씹었다. 그는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했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오로지 왕과 왕비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왕실의 비밀 금고. 그 안에 보관된 독약을 가져다준 사람.
넬슨의 배후에 있는 자는 둘 중 누구일까?
왕? 아니면 왕비?
리아를 꼭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자는 왕과 왕비 중 누구일까?
***
침대 끝에 걸터앉은 리아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또 한 번 내쉬었다.
자신에게 독약을 먹인 범인은 넬슨이었고 그는 죽었다. 그리고 데이지가 사라졌다.
데이지는 왜? 넬슨과 데이지가 한편이었을까?
갑자기 친절하고 순종적으로 변한 데이지. 그래서였을까? 넬슨의 명으로 독약을 먹이기 위해?
한 편의 추리소설이나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결말을 알려 주지 않은 채로 끝이 나버린.
“내가 죽길 바라는 왕실의 사람.”
리아 역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왕과 왕비 둘 중 범인이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라이언이었다. 그는 화가 났다. 몹시도 많이.
몇 번이나 하인을 시켜 호출했지만, 그는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직접 서재로 내려가 볼까도 하다가도 막상 그러려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두려웠다. 라이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디까지 다 밝혀야 할까?
만약 전부를 이야기한다면 그는 믿어 줄까?
전생의 죽음부터 지금 레오니의 몸속에 들어오게 된 이유까지.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그것을 믿어 달라고 하기에는 사실 모든 것들이 너무 허무맹랑한 일이었다.
만약 리아 자신이 라이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콧방귀를 뀌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발레포르! 망할! 발레포르 나와!”
정말 라루체의 능력은 전부 사라졌는지 아무리 불러도 발레포르는 나타나지 않았다.
“꼭 이럴 때만 없다니까. 나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발레포르라도 있다면 물어볼 텐데. 라이언에게 진실을 이야기해도 좋을지. 다 말하고 나면 그가 미친 여자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닐까?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때!
철컥- 하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