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무언가 잘못되었다
1층 홀을 지나던 매튜는 식당 문 앞을 기웃대는 하녀 데이지를 발견했다. 몰래 안을 엿보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지? 도대체 왜 식당을 훔쳐보는 것일까?
매튜는 그런 데이지의 모습이 하도 수상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죠?”
갑작스러운 매튜의 등장에 놀란 데이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상했다. 잘못된 행동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구는 데이지가.
왜 그러나 싶어 식당을 쳐다보는 순간, 매튜는 이상한 것을 보고야 말았다.
공작부인 앞에 서 있는 넬슨. 거기까지는 자주 보았던 평범한 장면이었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손바닥을 뒤로해서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넬슨의 오른손.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으나 이내 알 수 있었다. 넬슨이 움직일 때마다 살짝 보였다가 사라지는 번쩍이는 칼날.
그것은 분명 작은 칼이었다.
칼을 숨기고 있다?
놀란 매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방금까지 옆에 서 있던 데이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홀은 고요했다.
어쩌면 좋을까? 넬슨이 왜 몰래 칼을 들고 서 있는 거지?
그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매튜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넬슨은 지금 공작부인의 바로 앞에 서 있었고 몰래 소매에 칼을 숨겨두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그랬든지 간에 위험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자신이 크게 소리쳐 자극을 줬다가는 혹시라도 큰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매튜는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집사 넬슨과 공작부인의 거리는 가까웠다. 무슨 일을 저지르겠다고 마음먹으면 단번에 저지를 수 있을 만큼 매우.
넬슨이 왜? 라는 생각은 지금 이 순간 사치였다. 우선은 대비해야 했다.
재빨리 생각을 마친 매튜는 빠르게 몸을 움직여 홀 한쪽에 놓여 있는 장식장을 열었다.
그는 안에서 장식용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장식용이지만 제법 날이 서 있는 검이었다. 지금 돌아서서 기사단원들을 부르는 것은 무리였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비록 자신은 지금껏 칼싸움 한번을 제대로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무기일지라도 손에 쥐고 있는 편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에는 좋았다.
매튜가 긴 검을 등 뒤로 숨긴 채 조용히 식당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안에 있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넬슨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무어라 중얼댔는데 공작부인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매튜는 곧장 넬슨의 뒤로 내달렸고 라이언이 리아라고 소리치는 순간 그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
누가 지르는 것인지도 모를 비명이 온 저택을 흔들었다. 라이언은 전장에서 질리도록 맡았던 피비린내가 훅하고 코끝에 맴도는 것을 느끼며 품 안에 리아를 끌어안았다.
방금 일어난 일이 꿈처럼 느껴져 머릿속이 몽롱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괜찮으십니까?”
매튜의 외침에 라이언의 정신이 돌아왔다.
“이게 도대체….”
말을 하다 말고 라이언이 리아의 어깨를 잡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뜨겁고 축축한 느낌.
“리아!”
갑작스러운 넬슨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했는지 안타깝게도 리아의 팔뚝에서 피가 흘러내려 드레스를 적시고 라이언의 손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리아 괜찮나! 리아!”
라이언은 리아를 흔들었다. 너무 놀라 멍했던 리아의 정신이 라이언이 그녀의 몸을 흔듦과 동시에 돌아왔다.
“하아… 하아… 난 괜찮아요. 당신은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카펫을 흥건하게 적실 정도로 흘러내린 검붉은 핏자국 위로 넬슨이 무릎을 꿇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등에는 커다란 검상이 한 줄로 깊이 파여 있었다.
“넬슨….”
넬슨이었나?
‘…집안사람 그 누구도 믿지 마.’
가까운 누군가가 범인일 것이라는 발레포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에리스의 딸이라며 조소하던 넬슨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리아는 몸을 돌려 라이언의 품을 파고들며 눈물을 흘렸다. 이럴 수가. 정말 범인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런데 왜? 에리스의 딸?
“매튜 당장 그자를 결박하게? 죽었나?”
라이언은 최대한 멀리 넬슨에게서 리아를 떨어트려 놓으며 매튜를 향해 명령했다. 매튜가 엎드린 넬슨을 건드리자 그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넬슨이 흘린 피는 바닥을 적시고 흐를 정도로 흥건했고 등의 상처는 무척이나 컸다.
비록 날이 섰다고는 해도 장식용이었기에 보통의 검보다는 투박했고 그런 검으로 있는 힘껏 내려진 상처의 상태는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으으….”
의식을 잃었던 넬슨이 정신을 차렸는지 신음을 내뱉자 매튜는 재빨리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그랬다가는 당장 목이 날아갈 테니.”
힘겹게 몸을 일으킨 넬슨은 무릎을 꿇은 채로 두 팔을 바닥으로 뻗어 다친 몸을 지탱한 채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한쪽 끝에 서 있는 리아를 확인했다.
여전히 살아 있는 에리스의 딸. 넬슨은 절망했다.
실패라니. 죽음을 무릅쓰고 내질렀던 마지막 발악이 실패로 끝을 맺다니. 이제 자신이 죽고 나면 에리스의 딸은 누가 처리를 한단 말인가!
딸 에이미의 복수는 이렇게 끝이란 말인가!
“으아아아아아악!”
넬슨이 온 힘을 끌어올려 포효했다. 무척이나 구슬프고 거친 비명이었다. 그런 넬슨을 보고 있는 리아는 이상하게도 심장이 아렸다.
세상을 잃은 듯 허무해 보이는 넬슨의 표정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죽…이시…오.”
넬슨이 힘겹게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그들 앞에서 조롱을 당하느니 빠르게 죽는 편이 좋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가.
결국, 에리스의 딸을 처리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원통하지만 말이다.
자신을 잡은 라이언의 손을 떼어내며 리아가 넬슨 쪽으로 다가가자 라이언은 그런 리아를 보호하며 뒤따랐다.
소란스러움을 눈치챈 기사단원들은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더는 리아를 해칠 사람이 없다는 판단에 라이언은 리아가 넬슨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그녀를 도왔다.
다행히도 피의 양에 비해 팔뚝에 입은 상처는 크지 않았다. 칼날에 살짝 긁힌 정도.
라이언은 손수건을 꺼내 직접 리아의 상처를 묶었다.
“마지막에 나에게 했던 말이 무슨 뜻이죠?”
리아의 물음에 넬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
“당신이 마차사고를 냈나요?”
넬슨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태가 좋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팔은 흔들렸다.
“나에게 독을 먹인 것도?”
“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독이라는 말에 라이언이 끼어들었다. 그런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나중에 다 말해 주겠다고.
리아의 눈빛을 읽은 라이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
“아까 분명 나에게 에리스의 딸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누구죠?”
“…나? 내가… 누…군지… 궁금… 한가?”
“왜 나를 죽이려고 했죠?”
“…어미의 죗값을… 자식…이 치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자식의… 복수를… 아비가 하는 게 당연한…것처럼….”
처음보다 한결 차분해진 말투로 넬슨이 말했다.
“어미의 죄? 자식의 복수?”
넬슨은 리아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올랐다.
“벨로트 13년… 내… 딸… 에이미가… 사라졌던 그… 추운 겨…울을 난… 지금…도… 잊지 못해…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 아이가 애인…과 야반도주를 했다고… 비웃…었지… 아직 15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두고서….”
어느새 넬슨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다. 리아는 라이언의 손을 꼭 잡고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그 뒤로… 긴 세월을… 난 사람들의… 말처럼 그 아이가 정말… 도망…쳤다고 생각했지…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되려 원망만 늘어갔지… 그렇게 잔인하게 죽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거기까지 말을 마친 넬슨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감정을 추스르려는 것 같기도 하고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한 모습.
“혹시… 그럼 당신의 딸이….”
리아는 떠오른 생각을 차마 입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그건 라이언과 매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미 에리스의 악행을 알고 있었고 넬슨이 말하는 딸의 잔인한 죽음과 어미의 죄를 자식이 치른다는 말로 유추해 볼 때 그가 이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리아를 죽이려 했던 것은 분명했고 사연이 있다고 해서 모두 덮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넬슨이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내 딸… 에이미는 네년의 어미… 에리스에게 잔인하게… 죽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넌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하겠지… 평생을… 그리워하고 원망했던 딸이 이미 잔인하게… 죽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비의… 마음을….”
“그건….”
“그… 사실을 알고도… 내가… 가만히 있어야… 했나? 에리스의 딸은…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다니는데? 그래서… 네년을 죽이려고 했다. 이렇게… 실패했지만….”
실패가 원통한 듯 넬슨은 다시 몸을 숙이며 주먹으로 바닥을 마구 쳤다. 거친 그의 행동에 더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철철 넘쳐흘렀다.
“흐읍…흑….”
다친 몸으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무리를 했는지 넬슨은 쿨럭하며 검붉은 피를 토했다.
그렇지만 그는 바닥을 치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마음의 울분을 풀어내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리라.
“가만히 있어요. 상처가 벌어지잖아요. 그러다 죽을지도 몰라요!”
자식의 복수를 위해 자신을 죽이려 했던 넬슨. 레오니의 어미 에리스가 저지른 악행은 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그때 희생당한 어린 소녀들에게도 가족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땅을 치며 흐느껴 우는 넬슨을 보는 리아의 마음이 복잡했다.
라이언은 그런 리아의 옆에서 넬슨의 말을 곱씹는 중이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거슬리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무엇이지? 그가 했던 말 중 어떤 부분이 이렇게 찝찝한 걸까?
그 순간 라이언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넬슨. 아까 뭐라고 했지? 벨로트 13년 겨울? 그때가 몇월이었는지 기억하나?”
라이언의 질문에 넬슨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던 매튜 역시 생각난 것이 있는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매튜와 눈이 마주친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지금 우리가 하는 생각이 맞는다면 넬슨은 뭔가 잘못 알고 있어.
“딸이 사라졌다는 그 해가 벨로트 13년이 확실한가? 당신이 기억하는 그 겨울이 몇월이었는지가 중요해. 기억하고 있나?”
재차 묻는 라이언의 말에 넬슨은 바닥을 치던 동작을 멈추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미 그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핏물이 번진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입가에는 검붉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공작…나으리…내가…그걸… 기억하지… 못할 것… 같소? 벨로트 13년… 앤 왕비가 둘…째아이를 임신했다고… 나…라가… 떠들썩…했었지… 그래서 똑똑히 기억해….”
“그래서, 당신의 딸이 사라진 날이 벨로트 13년 몇월이지?”
라이언이 다급하게 물었다.
“에…이미가 사라진… 그… 날은… 바로 그… 아이의… 생일이었지… 12월 28일… 에이미는 …그날…태어났다오….”
말을 마친 넬슨이 또다시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라이언은 곧바로 매튜를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튜! 공작부인의 생일이 언제라고 하였지?”
라이언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매튜를 불렀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이 부인의 생일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매튜에게 지시를 내렸었다.
공작부인의 생일을 알아오라고.
“공작부인께서는 벨로트 13년 9월 12일에 태어나셨습니다.”
에리스는 리아가 태어난 그 날 바로 죽임을 당했는데 넬슨의 딸 에이미는 그 한참 뒤인 12월 28일에 사라졌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