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 누구도 믿지 마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넬슨의 심장이 쿵쿵 쉬지 않고 방망이질을 했다.
그래 결국은 이렇게 끝내게 될 것을. 어쩌자고 이토록 먼 길을 돌아왔던가. 시간이 지나면 조금 잠잠해 질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넬슨은 생각했다.
분명 에이미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들처럼 행복하게 웃으며 살았을 테지. 아니 더 행복했을지도 모를 일이야.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겠지?
그런 끔찍한 일만 없었다면. 살아만 있었다면 말이다.
피어보지도 못한 채 무참히 꺾여 버린 딸의 여린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나 예뻤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 불쌍한 아이가 흘린 피를 에리스의 딸은 받아먹었겠지. 그게 어미의 배 속에서 일지라도 말이다.
딸은 죽었고 그 딸을 죽인 여자의 딸은 살아 있었다. 그것도 그의 눈앞에서.
용서할 수 없었다. 죄를 지은 어미가 죽었다면 살아남은 자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바로 오늘. 자신의 두 손안에서.
에리스의 딸이 행복해질수록 넬슨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을 줄을 모르고 치솟았다. 눈을 감아도 에리스의 딸이 행복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피가 끓어오르고 온몸이 떨렸다.
데이지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여자는 정말 멀쩡했고 그는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아픈 기색이 하나 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끓어올랐던 분노는 마지막을 결심하자 오히려 침착해졌다.
이제 끝이다. 이런 괴로움도. 이런 분노도. 이제 모두 오늘로 끝이다.
독약을 먹고도 멀쩡하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겠지.
처음 왕비 제시카를 통해 딸에 대한 끔찍한 사실을 들었을 때 그는 미칠듯한 감정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 대장간에 가서 직접 단검을 한 자루 만들었다.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다.
천 번, 만 번이고 망치질을 하면서 원망과 분노를 그 작은 단검 안에 쏟아부었다. 그렇게라도 마음을 비우고 싶었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쏟아부을수록 복수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검이 완성되어 갈수록 살기는 짙어졌다.
당장 그 칼로 에리스의 딸을 죽이려고 했었다. 그때 그런 넬슨을 막은 것이 왕비 제시카였다.
“그때 죽였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토록 어려운 길을 걷지 않았겠지. 그때 에리스의 딸 옆에는 공작도 없었다. 혼자 성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여자를 처리하는 것쯤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을 텐데.
눈앞에 웃고 있는 에리스의 딸을 더 지켜보느니 그녀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 편이 좋았다.
딸의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그는 이제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곧장 방으로 들어간 넬슨은 옷장 깊은 곳에 천으로 둘둘 말아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분노로 만들어진 검은 여전히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투박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로운 검. 딸을 향한 애끓는 부정과 원수를 향한 짙은 살기가 한껏 서려 있는 검.
이대로 식당으로 돌진해 여자의 심장에 바로 꽂아 넣으리라. 더는 돌아가지 않으리.
그는 검을 소매 안에 거꾸로 집어넣고는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처음부터 몰래 숨겨서 들고 다닐 작정으로 작게 만든 단검이었다.
이제 무서울 것이 없었다.
검은 사자라 불리는 공작도, 에리스의 딸을 처치하게 되면 곧장 자신의 앞으로 달려올 죽음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단검의 손잡이를 꼭 쥔 채로 넬슨은 다시 방을 돌아 나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이 길로 곧장. 이대로 곧장.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도록 단번에 처리하리라.
데이지는 넬슨이 막 1층 홀에 다다랐을 무렵 그를 발견했다. 그녀는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넬슨님. 제 말이 맞죠? 공작부인께서는 참으로 멀쩡하시지요?”
바로 뒤에서 속삭이는 데이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넬슨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넬슨님?”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고 식당을 향해 걸어가는 넬슨을 이상하게 생각한 데이지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지금 넬슨에게는 데이지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에리스의 딸이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뒤에서 데이지가 말을 거는 것도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것도 모른 채로 식당으로 향하는 넬슨의 심장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황홀함을 맛보며 바쁘게 뛰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토록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된다는 희열로 인하여.
***
같은 지붕 아래 누군가 자신을 죽이러 오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리아는 라이언을 향해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정말 이럴 거예요? 나 아픈 곳 없다니까요!”
아무리 졸라대도 라이언은 단호했다. 그는 조금 전 리아를 향해 왕을 만나러 가는 일정을 미루겠다고 통보했다.
언제까지 미루겠다는 말도, 언제 다시 가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건 가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그저 하루 감기몸살로 앓아누웠던 것뿐이에요. 누구나 흔하게 걸리는 그런 감기 말이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건강하잖아요. 그런데 일정을 미루다니! 당신이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라고요!”
라이언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본능이 위험을 외치고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아픈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르셀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당신의 건강은 아니오.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혹여나 가는 도중에 다시 아프기라도 하다면? 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오.”
“여보. 라이언. 나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앞으로도 아프지 않을 거고요. 이미 출발준비는 모두 끝난 것이 아닌가요? 닥터 애버클을 다시 불러, 날 진찰하게 해도 좋아요. 그는 분명 내가 아주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거에요.”
리아는 라이언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녀는 왕궁에 꼭 가야만 했다.
이제 그 목적이 꼭 왕을 만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독을 흡수하고 사라진 라루체와 함께 소멸한 치유능력. 지금 리아에게는 라이언의 고통을 편안하게 해 줄 힘이 없었다.
라이언이 필사적으로 찾으려 했던 모엘르 검. 원하지 않는 결혼까지 하면서 되찾으려 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었고 리아는 직감했다. 그 검이 라이언이 그녀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트라우마를 해결해 줄 유일한 방책이라는 것을 말이다.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과거는 어두웠고 복잡했다. 그리고 그 어느 부분에선가 이마의 흉터가 생겨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건 분명 모엘르 검과 관계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검을 언급했을 때 본능적으로 흉터를 만졌다.
그저 혼자만의 짐작일 뿐이지만 그 흉터가 그 검에 의해 생겨난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모엘르 검은 그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임이 분명했다.
“당신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나 혼자서라도 갈 거예요.”
“리아. 이렇게 고집부린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오.”
“난 내 조카의 생일을 꼭 축하해 줘야겠어요. 그 아이를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존재조차 몰랐던 조카이니 당연한 말이었다. 우겨대는 리아를 보며 라이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아도 리아지만, 그걸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도 문제였다.
그때 인기척도 없이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넬슨?”
열린 문 앞에는 넬슨이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호출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군. 르셀행은 취소되었어. 우리는 조만간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네.”
“라이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까지 내 말을 듣기는 한 거예요? 베드포드 성이라니요?”
평상시와 다른 넬슨의 표정을 알아보지 못하고 라이언과 리아는 말씨름이 한창이었다. 분명 발레포르는 경고했었다.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라고. 그렇지만 르셀행을 취소한 라이언 때문에 화가 난 리아는 그만 그 경고를 잊고야 말았다.
“내 결정에 대한 번복은 없을 거야. 당신이 더는 아프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면 우리는 곧장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갈 것이오.”
“왜 당신 마음대로 하는 거죠? 좋아요. 그럼 당신은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가요. 르셀은 나 혼자 가겠어요.”
“리아! 제발 내 말을 들으시오.”
고집을 부리는 라이언의 행동에 화가 난 리아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긴 식탁을 돌아 나왔다.
가까웠던 라이언과 리아의 거리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멀어졌다.
“싫어요.”
리아는 식탁 너머 라이언을 향해 싫다며 소리를 빽 지르고는 몸을 돌렸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결론이 나지 않는 언쟁을 계속할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돌아선 리아의 지척에 넬슨이 서 있었다.
넬슨과 리아. 둘 사이의 거리는 불과 1m도 되지 않았다.
“넬슨. 공작님께 아주 차가운 물 한 잔 가져다주겠어? 마시고 정신 좀 번쩍 차리시도록 말이야.”
“정말 멀쩡하군.”
넬슨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작게 웅얼대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그리고 참!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간다는 공작님의 말씀은 못들은 걸로 해 줘. 우린 르셀로 갈 거야.”
“행복한가요?”
갑자기 넬슨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했지?”
“지금 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행복? 그래 행복하지. 공작께서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면 더더욱 행복하겠지만.”
“잘됐군요.”
리아의 대답에 넬슨이 환하게 웃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밝은 표정이었다. 넬슨이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던가?
“그게 무슨 말이야?”
리아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발레포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집안사람 그 누구도 믿지 마.’
리아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지만, 식탁에 몸을 부딪치며 멈춰 서고야 말았다.
아닐 거야. 넬슨이? 넬슨이 범인이라고? 그냥 좀 이상한 질문을 하는 것뿐이겠지.
“넬슨. 난 찬물 따윈 필요 없네. 그저 닥터 애버클을 다시 모셔와 공작부인의 상태를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게.”
그때 라이언이 끼어들자 리아는 고개를 돌려 라이언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난 괜찮다니까요!”
“하…하하….”
갑자기 넬슨이 웃기 시작했다.
리아와 라이언의 시선이 동시에 넬슨에게로 향했다.
“잘됐군. 행복하다니. 불행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참 재미없거든. 에리스의 딸. 지금 이 행복을 잊지 말거라.”
매우 작은 소리였지만 이번에는 그의 말이 정확히 리아의 귓가에 꽂혔다.
“…네…넬슨?”
리아는 손바닥을 뒤로해서 식탁을 꼭 잡고는 몸을 떨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라이언이 리아를 불렀다.
“리아!”
순간 넬슨의 손바닥이 번쩍였다. 라이언은 본능적으로 식탁을 뛰어넘어 리아를 잡아당겼지만, 안타깝게도 그보다 넬슨과 리아의 거리가 더 가까웠다.
한 발짝 다가서서 손을 길게 휘두르면 닿을 거리.
서걱-
찰나의 순간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곧이어 누군가의 비명이 온 저택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