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깨어난 공작부인
혼돈이 가득했던 하루는 발레포르의 주문과 함께 막을 내렸다. 마법의 보석 라루체는 리아의 몸속에 퍼져있는 독들을 모두 흡수하고 사라졌다.
새벽 동이 틀 무렵 리아는 깨어났다.
간밤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꿈은 아닐까? 갑자기 몸이 아팠던 것도 발레포르와 나눴던 라루체에 대한 대화도.
꿈이라고 느껴질 만큼 변한 것은 없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치유능력이 사라졌다고 해서 바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니까.
사라진 라루체가 앞으로 리아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살아났다. 지금 이 순간 리아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막 잠에서 깨어나 몽롱했던 정신이 점점 선명해지자 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해는 아직 완벽하게 떠오르지 않았고 방안은 어두웠다.
몸을 움직이려는데 한쪽 팔이 묵직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느껴지는 온기에 리아의 고개가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라이언이 있었다.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그 위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고 누워 잠이 든 라이언.
그런 라이언을 쳐다보고 있자니 어느새 리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 감정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감동인 남자. 그게 바로 라이언이었다.
이제 라이언은 리아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아픈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리아는 알 수 있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 번에 밀려들었다.
“라이언.”
리아는 살며시 라이언을 불렀다. 자면서도 온 신경이 그녀를 향해 있었던 까닭일까?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언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세웠다.
“리아!”
잠에 빠져 멍했던 정신이 돌아온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리아에게 몸을 숙이며 그녀를 살폈다.
“리아. 미안해. 내가 잠이 들었군.”
말과 동시에 그의 손이 그녀의 이마 위로 올라왔다.
“괜찮나? 이럴 수가! 열이 식었군.”
“난 괜찮아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싱긋 웃었다.
“왜 여기서 자고 그래요. 불편하게.”
“맙소사. 당신 정말 괜찮은 건가?”
놀란 라이언은 리아의 이마 위로 올린 자신의 손을 내려 이번에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간밤에 얼음처럼 차가웠던 냉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따스한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 흘러들었다.
“존! 존! 밖에 있다면 당장 닥터 애버클을 모셔오게!”
라이언의 목소리가 온 저택에 울려 퍼졌다.
***
똑똑-
“넬슨님!”
다급한 데이지의 목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 곧바로 방문이 열렸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아침 일과를 시작하려던 넬슨이 데이지의 방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평온해졌다.
죽었군. 그는 데이지가 이렇게 이른 아침에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공작부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거나 그 차이만 있을 뿐. 독약을 먹은 자의 끝은 결국 죽음이었다.
“장례준비를 해야겠군.”
입꼬리가 살짝 비틀려 올라간 채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넬슨이 말했다. 그러자 데이지가 굳은 표정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깨어났어요.”
“뭐?”
“공작부인께서 깨어나셨어요.”
“뭐라고?”
넬슨은 데이지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깨어나다니? 잠시 의식을 찾았다는 말인가? 저녁까지만 해도 왔다 갔다 했던 정신이 밤이 깊어가면서부터는 아예 희미해졌다. 그랬기에 금방 끝이 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깨어났다고?
“목숨줄이 매우 길군. 그렇지만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거다.”
넬슨은 작게 중얼댔다.
“그게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깨어나셨다고요. 아픈 곳이 전혀 없이 멀쩡하시단 말이에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시겠다고까지 하셨어요.”
좀처럼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딴소리를 하는 넬슨을 향해 데이지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무조건 죽는다더니 어째서 깨어났단 말인가!
“아픈 곳이 없다고? 그럴 리가.”
데이지를 향해 넬슨이 의심이 섞인 눈길을 보내자 그녀는 발끈했다.
“저는 분명히 시키시는 대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모조리 다 따랐습니다. 공작부인이 깨어난 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을 탓할까 걱정된 탓에 데이지는 초조했다. 그녀의 초조한 기분은 깨어난 마님의 시중을 들으라며 자신을 불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의식조차 차리지 못했던 공작부인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멀쩡했다. 아니 멀쩡해 하다못해 평소보다 더 쌩쌩했다.
데이지는 평소와 똑같이 아침 시중을 들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는 것뿐.
배가 고프다는 공작부인을 위해 주방장을 깨워 아침준비를 시킨 후에 데이지는 곧바로 집사 넬슨을 불러오겠다며 계단을 뛰어 올라온 것이다.
“가 봐야겠어.”
“이제 저는 어쩌죠? 들키는 일은 없겠죠? 약속하신 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닥쳐. 가서 내 두 눈으로 확인부터 해야겠다.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군. 어째서 살아난 거지?”
흥분한 넬슨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그는 곧장 데이지를 밀치고 아래층을 향해 내려갔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났다고? 그것도 멀쩡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넬슨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막 계단을 내려와 1층 홀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향하는 넬슨을 마침 그곳에 서 있던 닥터 애버클이 불러세웠다.
닥터 애버클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지난밤 귀가하지 않고 이든로즈홀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라이언의 요청이기도 했다.
“오! 넬슨 씨. 소식을 들으셨군요.”
“닥터 애버클.”
돌아선 넬슨의 표정이 험악했는지 애버클이 다시 말했다.
“아직 못 들으셨습니까? 공작부인이 깨어나셨어요! 그것도 전혀 아픈 곳이 없이 멀쩡하게 말입니다!”
애버클은 환하게 웃으며 넬슨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쁨을 감출 수 없는듯한 표정이었다. 넬슨은 황급히 표정관리를 했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내려온 참입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의식이 없으셨는데…. 금방 깨어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게 바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위대하신 공작님께서 워낙 나라를 위해 세운 공이 많으시니 하늘도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 지난 밤까지만 해도 무서운 생각마저 들 정도로 정신이 없었는데. 이렇게 깨어나시다니!”
애버클이 눈꼬리를 찍어내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를 냈다. 매번 최악의 순간에 공작부인은 거짓말처럼 깨어났다. 자신의 의술로도 어쩌지 못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멀쩡하게 털고 일어나는 리아의 모습은 그에게는 마치 하늘이 내려준 기적처럼 느껴졌다.
“진찰은 해 보셨습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공작님께서는 부인이 깨어나자마자 절 부르셨습니다. 곧바로 진찰해 본 결과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건강하세요. 아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애버클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확신에 차서 소리쳤다.
“공작부인께서는 아주 멀쩡하십니다.”
그런 애버클을 보며 넬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은 절망이 가득한데 입을 열었다가는 속마음을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독약을 먹고도 살아나다니! 넬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 어쩌란 말인가!
하늘은 어쩌면 이토록 자신에게 무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늘 빗겨나가는 계획과 매번 깨어나는 여자. 그래도 이번에는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이다. 이제 죽기만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애버클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자신의 두 눈으로 그 끔찍한 광경을 보아야만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에리스의 딸을 지금 당장 봐야 했다.
“…공작부인께서는… 지금 식당에 계십니까?”
“그럼요. 지금 식당에서 아침을 드시는 중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하시더군요. 상태가 너무 양호하여서 곧바로 식사하셔도 무리가 없다는 판단에….”
애버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넬슨이 몸을 돌렸다. 급하게 움직이는 넬슨의 뒷모습을 보며 애버클은 환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넬슨의 진짜 속마음이 어떤지도 모른 채.
“저렇게나 좋으실까.”
***
괜찮다는데도 라이언은 한사코 옆에 달라붙어서 직접 리아의 시중을 들었다. 아픈 곳이 전혀 없다고 말해도 미심쩍은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요.”
직접 음식까지 떠 넣어 주려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과보호도 이런 과보호가 없었다.
“내가 괜찮지 않아. 어제 당신이 얼마나 아팠는지 잊었어?”
“그냥 감기몸살이었다니까요. 별거 아니었어요.”
라이언의 손에 들린 포크를 다시 뺏어오며 리아가 눈을 흘겼다. 벌써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당신은 더 쉬어야 해.”
“선생님이 보시고 괜찮다고 하신 거 못 들었어요? 오히려 너무 건강한 상태라고 하셨잖아요.”
리아는 닥터 애버클이 했던 말을 다시 읊으며 라이언의 몸을 쿡 찔렀다. 바로 옆에 딱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황당했다.
그의 챙김이 좋긴 했지만, 뭐든 과한 것은 지치는 법.
“믿을 수가 없어.”
“그냥 믿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잖아요. 그럼 내가 아팠으면 좋겠어요? 왜 못 믿겠다는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이 아팠으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라….”
리아가 당황한 라이언의 말을 자르며 웃었다.
“알아요. 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누구보다 더 바라는 사람이 라이언 당신이라는 걸요. 전 정말 괜찮으니 이제 좀 앉아요.”
심지어 라이언은 리아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 중이었다. 공작의 체면이고 뭐고 집어 던진 지 오래였다.
티 없이 맑은 리아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 의자에 앉아서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후하고 내쉬었다.
“이제 좀 안심이 돼요?”
“아니. 여전히 무서워.”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당신을 잃을까 봐.”
그는 너무 솔직했다. 그리고 리아의 귓가에 닿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늘 당신 옆에 있을게요. 그러니 걱정 마요.”
“부디 부탁이오. 아프지 마.”
라이언은 지난밤과는 다르게 온기가 도는 리아의 손을 잡아들어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살며시 눈을 감고 이 순간을 만끽하는 라이언의 표정을 보며 리아는 마구 차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행복했다. 그와 함께 있음이. 지금 그의 곁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아 있음이.
넬슨은 식당 입구에 서서 마치 세상에 둘뿐인 듯 행복한 부부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꾸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는 에리스의 딸을 더 이상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늘이 죽음을 방해한다면 이제 그가 직접 결론을 내야 할 때였다.
더는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는 여자를 참아줄 수 없었다. 그것도 행복에 겨워 몸부림치는 것을. 이제 계획이고 명령이고 뭐든 상관없었다.
그때 갑자기 금방까지도 험악했던 넬슨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 그는 리아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돌려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