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해독제
이든로즈홀은 조용했다. 그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집안의 분위기는 음울했다.
어둠이 찾아왔지만, 리아는 아직도 앓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원인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런 리아를 지켜보는 라이언의 속은 타들어 갔다. 어디가 아픈 것인지 알기라도 한다면 치료법을 찾겠지만 그것조차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아픈 리아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고통은 더 했다.
리아는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간혹 길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면 라이언은 심장이 덜컹하고 끝도 없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병명을 찾기 위해 근방의 의사들이 모두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애썼지만 애석하게도 그들 중 누구도 명확한 원인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닥터 애버클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공작부인의 증상에 머리를 싸매고 두꺼운 의학서적을 뒤졌지만,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든로즈홀은 어둠에 잠겼고 사방은 고요했다.
리아가 누워 있는 침대 머리맡에 의자를 두고 라이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종일 그랬던 것처럼 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손발은 차가웠고 피부는 창백했다. 그리고 열은 내리지 않았다. 더 심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위안 삼아야 할까?
이마 위에 올려진 물수건이 뜨거워지자 라이언은 손수 다시 차가운 것으로 갈아 주었다. 3시간마다 해열제를 먹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다른 누구에게 맡겨두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은 리아가 깨어났을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외롭지 않도록.
리아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온종일 라이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물수건을 갈아 주고 다시 의자에 앉은 라이언이 차가운 리아의 손을 움켜잡았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온기를 나눠 주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병인 걸까? 온몸에 열이 나는데 손발은 차갑다. 그리고 열로 인해 붉어지기는커녕 점점 하얗게 질려만 가는 피부.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희귀한 병이었다. 여느 감기몸살과는 사뭇 다른 형태.
그는 고개를 숙여 리아의 손에 자신의 볼을 가져다 댔다.
“리아. 나의 아내. 제발 힘을 내시오.”
라이언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벌써 그의 곁에서 쓰러진 것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은 마차사고라는 뚜렷한 이유라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것도 아니었다.
그때 스르륵 라이언의 눈이 감겼다. 눈이 감긴 것은 라이언뿐만이 아니었다. 공작부인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던 여러 명 역시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리아….”
라이언이 기대고 누운 반대편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리아 눈을 떠봐. 정말 너 때문에 미치겠다구.”
발레포르였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악마 발레포르. 그가 나타났다.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리아를 바라보던 발레포르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시커먼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리아 이마 위에 놓인 물수건을 집어 던졌다.
리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대화를 나눌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물수건이 사라진 자리로 이내 발레포르의 손이 내려앉았다.
리아의 몸이 뿜어내는 열기보다 더 강한 기운이 발레포르의 손을 통해 리아의 몸속으로 스며들자 방안을 환하게 비출 정도의 빛이 그녀의 몸에서 쏟아져 나왔다.
“리아 내 목소리 들려?”
발레포르는 리아의 잠든 의식을 깨웠다.
“…발레…포르?”
“도대체가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쳐?”
리아가 부름에 답을 하자 발레포르가 갑자기 호통을 쳤다. 마차사고에 이어 이번에는….
“발레포르 나 아파. 아무래도 죽을병에 걸렸나 봐.”
리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죽을병은 무슨. 너 당했어.”
발레포르가 혀를 끌끌 찼다. 그 역시도 처음에는 평범한 감기인 줄로만 알았다. 워낙 기운이 미세했고 별다른 증상도 없었기 때문에.
닥터 애버클이 리아의 손발이 이상하리만치 차갑다는 것을 밝혀냈을 때 비로소야 리아의 증상이 일반적인 감기몸살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묘하게 드는 이상한 기분에 발레포르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미세하지만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리 악마래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몹시 미약한 기운.
“당해? 뭘 당해?”
“독.”
“뭐?”
발레포르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리아가 되물었다. 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독! 독약 말이야. 먹으면 죽는 거!”
“나 죽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발레포르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저 의식을 깨워 나누는 대화는 표정을 볼 수가 없으니 더했다. 도대체가 위급한 순간에도 제정신은 아니라니까.
“죽고 싶어?”
“미쳤어?”
“그럼 가만히 있어. 이러다가 진짜 죽는 수가 있으니까.”
온몸에 퍼져있는 독 기운을 해결할 방법은 딱 둘뿐이었다. 독에 잠식되어 죽든지 해독제를 먹고 살아나든지.
물론 후자의 경우가 가능하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나 감기 아니야? 독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 난 독을 먹은 적이 없단 말이야!”
가만히 있으라는 발레포르의 말이 무색하게도 리아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독을 먹었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이미 중독상태야. 그리고 문제는 리아 네가 먹은 독은 해독제가 없어.”
발레포르는 악마 중에서도 나름 약물에 능통한 악마였다. 그의 능력 중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는 마법 약을 잘 다루는 것이었는데 그런 발레포르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지독한 독약이었다.
“해독제가 없다고? 그럼 나 진짜 죽어?”
리아의 외침이 처절했다. 또 죽는다는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끔찍했다. 더군다나 이번 생은 사랑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는데 또다시 죽는다니. 그것도 누군가에게 독살을 당한다니.
“잘 들어.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어.”
이미 독약에 중독되어 죽음을 앞둔 리아를 살릴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발레포르의 능력으로는 리아의 몸속에 퍼진 독약을 해독할 만한 해독제를 만들어 낼 수 없었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라루체.
바로 리아를 레오니의 몸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마법의 보석 라루체였다.
“맨 처음 내가 널 그 몸속에 넣어 줄 때 같이 스며들었던 보석 기억하지?”
“라루체.”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라루체가 독을 흡수하게 될 거야.”
“그럼 빨리 해 줘! 방법이 있는데 왜 그냥 있는 거야?”
급하게 구는 리아를 향해 발레포르가 다시 말했다.
“그 전에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라루체가 독을 흡수하게 되면 이제 더는 네 몸속에 남아 있지 못해.”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그렇게 된다면 네 몸속에서 라루체가 사라진다는 뜻이야.”
라루체가 사라진다? 그 보석 때문에 레오니의 몸속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리아는 도무지 발레포르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독약에 중독되어 죽기 직전이라는 것부터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인데 라루체가 그 독약을 흡수하고 사라져 버린다고?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사라져? 쉽게 설명해 줄 수는 없어?”
리아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걱정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야. 레오니는 이미 소멸했어. 라루체가 네 몸속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리아 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그 몸은 리아 네 것이야.”
리아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발레포르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다. 완벽하게 소멸해 버린 레오니가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건 발레포르가 아닌 그 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죽음을 향한 레오니의 열망은 강력했고 그녀의 영혼은 라루체에 흡수됨과 동시에 스스로 소멸해 버렸다.
“다만….”
“다만? 그게 끝이 아니야?”
리아는 몰랐겠지만 라루체는 지금까지 리아의 몸속에 있으면서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삐쩍 마르고 볼품없던 레오니의 몸이 단기간에 사람 꼴을 하게 된 것도 알고 보면 다 라루체 덕이었다.
약해빠졌던 레오니의 몸이 조금의 잔병도 없이 튼튼해진 것도 말이다.
“넌 모르고 있었겠지만 라루체 덕분에 너에게는 치유능력이 있어.”
“치유능력?”
“네가 잘 챙겨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했다고 해서 레오니의 몸이 그렇게 쉽게 건강해졌다고 생각해?”
그게 아니었어? 리아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잘 먹고 잘 쉬고 운동도 빼먹지 않았기 때문에 변했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었어?”
“그래. 모든 것은 마법의 보석 라루체 덕이었다. 라루체가 네 몸을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지.”
그런데 치유능력?
설마… 혹시… 그래서 라이언도 그랬던 걸까?
발레포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종종 흉터가 아프다며 그녀의 손을 끌어다가, 이마 위에 올려놓고는 했던 라이언.
그녀의 옆에 누우면 불면증도 악몽도 모두 사라진다던 라이언. 늘 곁에서 편안한 표정을 하던 라이언!
“그래서였어. 그런 거였구나….”
라루체의 치유능력이 라이언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던 것이었구나.
“물론 라루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리아 너에게 갑자기 큰일이 생기거나 그러지는 않아.”
아니, 리아에게는 큰일이었다. 이제 라이언이 그녀 곁에서 편히 쉬지 못할 수도 있었다. 라이언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에는 그 묘한 능력도 분명 영향을 끼쳤을 거였다.
“치유능력이 사라지는 것뿐이지 너는 그대로일 거야. 다만 평범한 사람처럼 아프고 다칠 수도 있지. 지난번 마차사고에서 별다른 이상 없이 깨어난 것과 같은 기적은 이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 그러니 몸조심해야 해. 그리고 한 가지 더.”
더? 치유능력이 사라지는 것 말고도 또 있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말이야. 말해봐. 또 뭐야?”
리아가 체념한 듯 작게 중얼댔다.
라루체가 사라져 버린 몸으로는 라이언의 고통을 덜어 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도 죽어 버리는 것보다야 살아 있는 편이 좋았다. 살아서 라이언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제 더 이상….”
발레포르는 치유능력과 함께 사라지는 또 한 가지를 떠올리며 묘한 감정이 들었다. 좋아해야 할까? 아쉬워해야 할까?
“더는 뭐? 자꾸 그렇게 겁줄 거야?”
“앞으로 다시는… 못 해….”
발레포르가 숨을 꾹 참으며 감정을 조절했다. 잘못했다가는 웃음이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니 아쉬운 건 아니었나 보다.
그렇지만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다. 그걸 리아에게 들켰다가는 어떤 응징을 당할지 몰랐다.
“뭘 못한다는 거야? 나 공작부인 못 해? 나 더 이상 이대로 못 살아? 도대체 뭐야? 그냥 죽는 편이 더 좋다는 거 아니지?”
“다시는 머릿속으로 나 못 불러! 이제 네가 불러도 나한테 안 들린다고! 푸핫!”
잘 참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놀란 발레포르는 이를 앙다물었다. 그렇지만 벌써 리아는 모든 것을 눈치챈 후였다.
“너 죽을래? 나는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 서 있는데 좋냐? 그렇게 내가 불러대는 게 지겨웠나 봐? 그래 봤자 늦게 알려 줘서 내 말에 대답한 건 몇 번 되지도 않는데….”
“아…아니….”
발레포르의 목소리가 땅바닥을 기어 다녔다. 이상하게도 여전히 그는 리아에게 약했다.
무서울 것이 하나 없는 한낱 약해빠진 인간일 뿐인데. 첫 만남이 중요하다고 처음부터 기선제압을 당해버려서 그런지 늘 그녀에게는 기를 못 폈다. 뭐 이런 것도 애정의 한 종류라면 그런 거겠지.
발레포르는 리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여느 인간에게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리…리아… 그만! 시간이 별로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못된 독약은 네 몸을 갉아 먹으며 지옥행 급행열차의 속력을 높이고 있다고!”
“시끄러워. 천국이겠지. 내가 너야? 죽으면 지옥 가게? 난 천국 갈 거야.”
지옥이든 천국이든 어차피 지금은 안가겠지만.
“너 우선 내가 살고 나서 보자. 치유능력만 사라지는 거지? 또 기억을 잃거나 이 몸에서 빠져나가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
“걱정하지 마. 라루체의 힘이 사라지는 것뿐이야. 워낙 강력한 독약이라서 라루체를 희생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그런데 발레포르. 누굴까? 나에게 독약을 먹인 사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가장 의심이 가는 것은 그나마 데이지였는데, 데이지가 그런 무서운 독약을 구해서 먹일 만큼 자신을 증오했던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 독약을 구할 만큼의 능력도 없는 아이였고.
“나도 모르지. 이제 알아내야지.”
“어떻게?”
“네가 깨어나면 알게 될 거야. 무시무시한 독약을 먹였는데 가뿐히 털고 일어나면 범인도 당황하겠지. 범인을 알아내기 전에는 집안사람 그 누구도 믿지 마.”
발레포르는 라이언까지도… 라는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그의 눈에 여전히 리아의 손을 잡은 채로 잠들어 있는 라이언의 모습이 들어온 탓이었다.
발레포르가 보기에도 리아를 향한 라이언의 애정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라이언까지 의심하는 고통을 리아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리아. 깨어나면 그저 감기몸살로 하루 앓고 일어난 것처럼 행동해. 그럼 너에게 독약을 먹인 그 누군가는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겠지.”
범인을 잡는 것은 깨어난 후의 일이었다. 우선은 빨리 해독부터 해야 했다.
“걱정하지 말고 다시 자. 깨어났을 때는 모든 고통이 사라졌을 테니.”
치유능력도 함께 사라지겠지만 말이지.
발레포르가 리아의, 이마 위로 손을 한 바퀴 돌리자 깨어나 있던 그녀의 의식이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발레포르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 악마 발레포르가 고귀한 라루체의 힘을 빌어 고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