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알 수 없는 병
리아는 몸이 무거웠다.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축 처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열이 나는 걸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리아는 간신히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인 호출 벨을 힘겹게 눌렀다.
몸살일까? 집에만 있는데 왜 몸이 아픈 거야. 리아는 덜컥 겁이 났다. 당장 내일이 예정된 출발일이었다. 이렇게 몸이 아픈 것을 알면 라이언은 출발을 미룰 것이 뻔했다.
아픈 몸을 하고서 마차를 탈 수는 없다고 말을 하겠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날인데. 그런 날을 코앞에 두고 몸이 아프다니!
화가 나고 속상했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분명 호된 몸살에 걸린 것이리라. 리아는 머리가 어지러워 이마를 연신 찡그렸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감기에 걸리고 난리야!
끙끙대는 와중에 문이 열렸다. 호출을 듣고 데이지가 온 것이었다.
“마님? 괜찮으세요?”
“…아…파….”
“마님?”
“아무래도… 감…기에 걸렸나…봐….”
힘겹게 눈을 뜬 리아가 앓는 목소리를 냈다.
“아래층에 닥터 애버클이 와 계세요. 일어나실 수 있으세요?”
“데이지 네가… 도와주겠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고개를 끄덕인 데이지는 재빨리 수건에 물을 묻혀와 리아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잠옷을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물 한 잔을 가져왔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독약을 7방울 다 먹은 이후에 증상이 시작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계획대로라면 르셀로 가는 마차 안에서 아프기 시작해 도착 전에 죽어야 하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마님. 물 좀 드세요.”
물이라는 말에 리아는 갈증이 확 올라왔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다시 침대에 누우려던 그녀는 동작을 멈췄다.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지는 그녀의 입가에 물컵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몇 모금 되지 않는 양의 물을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조금 더… 줄래?”
일부러 적게 떠온 물이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컵 안을 확인한 데이지는 드디어 맡은 바 임무를 끝냈다는 것에 감격하며 리아가 원하는 대로 물을 더 가져다주었다.
침대에 다시 눈을 감고 누운 리아를 보며 데이지는 몰래 웃음을 삼켰다. 이토록 확실한 효과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결과였다.
조금 일찍 발현했다는 것을 빼면 증상 역시도 넬슨의 말과 일치했다. 그 누구도 독약을 먹었다는 것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똑똑-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 라이언이 의사와 함께 침실 문 앞에 도착했다. 데이지는 지쳐 누워 있는 리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리아는 노크 소리도 듣지 못한 채로 앓고 있었다. 점점 더 증상이 심해졌다.
“공작부인은?”
문 앞에 서 있는 데이지를 향해 라이언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데이지 너머 침대로 가 있었다.
“감기에 걸리신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옷을 갈이 입혀 드렸는데 힘이 드셨는지 다시 침대에 누우셨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좋지 못하자 놀란 라이언은 곧장 침대로 돌진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살짝 열이 있나 싶은 정도였지 어디가 심하게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안색부터가 파리했다.
“부인!”
라이언이 리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 아파요.”
리아가 힘겹게 눈을 뜨며 말했다.
“어디가? 어디가 얼마나 아프지? 당신을 진찰하기 위해 의사가 와 있어.”
라이언이 손짓을 하자 닥터 애버클이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애버클은 왕진 가방을 내려놓고 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분명 임신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해서 기분 좋게 온 것인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임신증상으로 보기에는 과할 정도로 리아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그래도 모르니 우선은 진찰해야 했다. 혹시나 아기가 잘못되거나 하는 상황이어서 이토록 아픈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공작님 잠시 비켜 주시겠습니까?”
여전히 리아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라이언을 향해 닥터 애버클이 말했다. 지난번 마차사고 때 이미 한차례 경험한 적이 있는지라 공작부인에 대한 공작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진찰에 앞서 그는 공작부인이 크게 아프지 않은 것이기를 빌었다.
닥터 애버클은 리아의 손목의 맥을 잡았다. 그 뒤에 나란히 서 있던 라이언과 매튜는 긴장감에 침조차 삼키지 못한 채 숨죽이고 있었다.
라이언은 특히 더 그랬다. 정말 임신일까? 임신하게 되면 이토록 몸이 힘든 것일까? 막상 눈앞에서 리아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니 그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는 임신한 여자가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 증상이 이런 것이라면 아이는 낳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보다 리아가 중요했다.
한참 동안 신중하게 리아를 살피던 애버클이 차마 라이언 쪽은 보지 못하고 대신 매튜를 쳐다보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라이언은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임신이 아니야. 그럼 진짜 아픈 것이란 말인가!
실망감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리아가 아프다니! 이렇게 갑자기! 조금 피로해 보이긴 했어도 지금처럼 정신을 못 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침에 그가 일어나 방을 벗어날 때만 해도 그랬다. 그저 조금 졸립다고 했을 뿐이었는데.
“그렇다면 이유가 뭐지?”
라이언이 물었다. 리아는 잠이 들은 것인지 조용했다.
“진찰을 더 해 봐야 어디가 아픈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감기라고 하기에는 맥이 너무 약하고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닥터 애버클은 다시 한번 눈앞이 깜깜했다. 지난번 의식을 잃었을 때처럼 정확히 증상을 알 수가 없었다. 감기 같기는 한데. 그나마 그중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공작부인이 의식은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인. 공작부인.”
닥터 애버클이 눈꺼풀을 뒤집어 눈을 확인하며 리아를 부르자 얼핏 잠이 들었던 리아가 몸을 뒤척였다.
동공이 흐렸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부인 제 말이 들리십니까?”
리아가 힘겹게 눈을 뜨며 작게 중얼댔다.
“…졸려요….”
리아는 이상하게도 계속 잠이 왔다. 잠에서 깨면 온몸이 아팠다.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몸이 무거운 정도였다면 이제는 쑤셨다. 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를 두드리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아프신 곳이 있다면 증상을 말씀해 주세요.”
“리아 괜찮나?”
“나 아파요… 라이언… 우리 내일… 출발하는…거죠?”
아픈 와중에도 출발을 걱정하는 리아를 보며 라이언은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리아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지난 몇 주 동안 얼마나 내일을 기다려왔는지 잘 알고 있기에 기대를 꺾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당연하지. 그전에 어디가 아픈지 진찰을 하고 약을 먹어야 해. 그러니 닥터 애버클에게 아픈 곳을 전부 말해 주시오.”
둘뿐이 아니란 것도 잊고 라이언은 리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며 귓가에 속삭였다. 리아의 얼굴이 뜨거웠다.
“열이 나는군.”
닥터 애버클도 진찰을 하며 느꼈던지라 벌써 체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온… 몸이 아파요. 머리도 아파요.”
리아가 천천히 증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은?”
“…몰라… 힘이… 없어요. 졸려…요….”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닥터 애버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심한 감기몸살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외에 열꽃이나 수포도 없고 다른 어떠한 증상도 없는 걸 보면… 다른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네. 그렇습니다. 감기라는 것이 그 증상이 워낙 여러 가지라. 우선 열을 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체온계의 눈금은 40에 가까이 올라가 있었다. 한마디로 리아는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상태였다.
“해열제를 처방하겠습니다. 열이 내려야 다른 치료도 할 수가 있습니다. 갑자기 순식간에 열이 올랐어요. 조금 전에 맥을 살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리아가 작게 벌린 입 사이로 뜨거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리아의 상태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무슨 일이 있나요? 부인께서 10시에 만나자고 하셨는데 내려오지 않으셔서요.”
그때 열린 문 사이로 댄의 모습을 한 발레포르가 들어왔다.
“댄. 공작부인이 몸이 좋지 못하시다. 너와의 약속을 지키시지 못할 것 같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매튜가 댄을 보고는 밖으로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발레포르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매튜에게 다가가 그의 옆에 섰다.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리아가 아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온 상황이었다.
리아가 마음속으로 어찌나 이름을 불러대던지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하면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알려 주었더니 리아는 놓치지 않고 써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리아는 계속 아프다며 그를 불러댔다.
발레포르는 방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음습하고 불쾌했다. 그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리아의 남편 라이언과 그 비서 매튜, 시녀 데이지와 집사 넬슨 그리고 의사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부인께서 열이 심하신가요?”
발레포르는 어느새 침대 근처로 다가가 리아를 살폈다.
“그래 꼬마야. 너는 이 방을 나가는 것이 좋겠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의 라이언이 발레포르를 향해 말했다. 그때 리아가 다시 뒤척대며 작게 중얼댔다.
“라…이언….”
“리아. 내가 옆에 있소.”
라이언이 곧바로 몸을 숙이며 리아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 아이를… 여기 두세요….”
“댄 말이오?”
리아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 움직이지 마시오. 열이 많이 나고 있어. 우선 해열제를 먹어야 해.”
닥터 애버클은 가방에서 늘 가지고 다니는 해열제를 꺼내 적당량을 작은 약병에 옮겨 담았다. 라이언은 그걸 그대로 받아 리아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리아. 제발 삼켜.”
“3시간마다 한 번씩 먹어야 합니다. 만약 그래도 열이 내리지 않는다면 그 간격을 줄이겠습니다. 그저 감기몸살이면 좋겠는데….”
닥터 애버클이 말끝을 흐렸다. 감기몸살 같기는 한데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데 얼굴이 붉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새하얗게 변했고 손이 차가웠다.
우선 열이 심해 해열제와 감기약을 처방하긴 했으나 당장 의학서를 뒤져봐야 했다. 혹시나 그냥 단순한 감기가 아니고 공작부인이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좋겠는데?”
라이언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되물었다.
“다만 몇 가지 이상한 증상이 보여서… 혹시나 제가 알지 못하는 다른 병일 수도 있기에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습니다. 사람을 저의 집으로 보내 필요한 책 몇 가지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상한 증상이라고?”
모든 사람의 관심이 의사의 입으로 향했다.
“보시다시피 공작부인은 현재 열이 40도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그런데 몸은 뜨겁지만, 손은 차갑습니다. 그리고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는 것이 흔히 보이는 감기의 증상과는 다른 양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라이언이 잡은 리아의 손이 차가웠다. 느껴지는 열기는 긴장한 그의 손에서 나는 것이었다.
라이언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이번에는 리아의 발을 확인했다.
“어떠십니까?”
“발도 차갑군.”
그냥 차가운 것이 아니라 얼음 같았다. 라이언은 발끝에서부터 리아의 온몸을 만지며 위로 올라갔다. 손과 발을 제외한 몸 전체는 뜨거웠지만 닥터 애버클의 말처럼 얼굴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매튜! 당장 닥터 애버클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게. 그리고 근방의 의사들을 전부 부르게.”
혹시나 누군가는 이 증상의 원인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내린 명령이었다.
한쪽 구석에 서 있던 발레포르는 닥터 애버클이 말한 증상을 천천히 곱씹었다. 어디선가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딱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뭐지?”
발레포르가 작게 중얼댔다. 어린 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대놓고 나설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의사 몸속에 들어가 버려?
아니다.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운이 나쁘게 나중에 그가 빠져나왔을 때 의사가 죽어 버릴 수도 있었다.
정말 별일 아니고 그냥 감기몸살일 수도 있는데. 금방 괜찮아질 수도 있는데… 아직은 일렀다. 리아의 상태를 좀 더 살펴봐야 했다.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지? 분명 어디서 들어본 증상인데… 발레포르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발레포르가 댄의 작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누워 있는 리아를 안타깝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