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이상한 감기몸살
리아는 라이언에게 당분간 댄을 자신의 말벗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물론 라이언은 두말할 것도 없이 허락해 주었다.
리아가 그에게 부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르셀로 가서 왕을 만나자는 것은 부탁보다는 협박에 가까웠지만.
출발까지는 며칠 남지 않았고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해하고 힘들어하는 리아를 위해서 곁에 있을 누군가가 필요했다. 메리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 곁에는 데이지 뿐이었다. 리아는 데이지를 좋아하지 않았고 라이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발레포르는 리아를 찾아갔던 그다음 날부터 곧바로 공작부인의 말벗 겸 종자가 되었다.
“리아. 어디 아픈가?”
잠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리아를 향해 라이언이 걱정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리아는 요즘 아침잠이 늘었다. 아니 아침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낮잠을 자는 횟수도 늘어났고 밤에도 일찍 피곤해했다.
“음. 아니에요. 졸려서 그래.”
눈을 뜨지도 못한 채로 고개를 흔들며 리아가 중얼댔다.
라이언은 리아의 이마 위로 손을 얹어 열이 나는지를 확인했다. 살짝 미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야겠어.”
내일이면 르셀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만약 리아가 아프다면 출발은 불가능했다.
“괜찮아….”
리아는 끝까지 대답하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라이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금방 잠에서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늦잠을 자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진짜 아픈 것일까 봐 걱정이 됐다.
잠이 든 리아를 두고 준비를 마친 라이언은 자신의 서재로 내려와 매튜를 불렀다.
“매튜. 의사를 불러오게.”
“의사요? 어디 아프십니까?”
의사라는 말에 놀란 매튜가 라이언을 위아래로 살폈다.
“나 말고 내 아내.”
라이언의 대답에 매튜가 더 놀란 듯 펄쩍 뛰었다.
“공작부인이 아프십니까? 어디 가요?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허둥지둥 구는 매튜를 보며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본 매튜가 장난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짜 아프신 겁니까? 도대체 의사는 왜 찾으시는지.”
“어디가 딱히 아픈 건 아닌데.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해하고 잠이 늘었다네. 자느라 아침도 제대로 못 먹을 지경이야.”
“잠이요? 피곤해하시기도 하고요?”
매튜가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 이마를 문질렀다. 피곤해하고 잠이 늘었다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증상이었다.
“각하….”
라이언이 고개를 들어 매튜를 쳐다봤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하라며 손짓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확실하지는 않은데요. 제가 그 증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자네가 알 것 같다고?”
“네. 그렇습니다. 제가 워낙 주워들은 것들이 많다 보니. 뭐 의사가 와서 진찰하면 확실히 알게 될 것 같기는 한데….”
궁금한 라이언은 매튜를 재촉했다.
“뭐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그게…아무래도….”
“빨리 말을 하게.”
“혹시 임…신을 하신 건 아니신지?”
임신? 라이언은 깜짝 놀라며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지금 임신이라고 했나?”
“보통 여인이 임신하게 되면 그 초기에는 피로감을 쉽게 느끼고 잠이 많아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말씀하신 공작부인의 증상이 딱 그와 비슷하여.”
“당장 의사를 불러오게.”
매튜가 알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서재를 빠져나가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라이언이 다시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아이가 생겼단 말인가?”
라이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리아가 임신했을까? 리아의 그 납작한 뱃속에 자신의 아이가 들어있단 말인가?
후계자가 필요하다며 그녀를 찾아왔던 건 그였다.
“내가 아빠가 된단 말인가?”
아빠라니! 덜컥 겁이 남과 동시에 이상하게도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리아가 보고 싶었다.
라이언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직 의사에게 확인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 임신이 아닐 수도 있어.
머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자꾸만 리아를 닮은 작은 아이가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라이언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왕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베드포드 성으로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이언은 완벽하게 달라진 새로운 아내를 만났다.
오히려 지금은 그런 명령을 내린 왕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어설프게 흔들리던 마음을 고백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 지금. 라이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까?
리아를 위협하는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누군지도 왜 그랬는지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적. 도대체 리아를 죽이려 한 자는 누굴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만약 진짜 임신이라면? 수도 르셀까지 먼 길을 가는 것이 위험하지는 않을까? 라이언은 마차를 타고 며칠간을 달려가야 하는 일정이 걱정되었다. 지금도 피곤해하고 잠이 많은데….
그러다 문득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아직 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것도 아닌데 임신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다니.
“내가 아이를 원했었나?”
임신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멈출 줄 모르고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라이언은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설레하는지. 아기를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차오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이를 원했냐고?
전혀 아니다. 관심조차 없던 일이었다. 결혼 자체가 라이언의 인생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분명 그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단 한 순간도 행복했던 기억이 없었기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렇지만 리아와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때 다시 서재의 문이 열리며 매튜가 들어왔다.
“각하. 의사를 데려왔습니다.”
“벌써?”
이렇게 빨리 의사를 불러왔단 말이야? 놀란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라니요. 제가 밖으로 나간 지 1시간이나 지났는데요. 마침 왕진을 나간 터라 기다려서 모셔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1시간이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라이언은 놀라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매튜의 말은 진짜였다. 시곗바늘은 벌써 9시를 훌쩍 지나 있었다.
혼자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단 말이야? 고개를 저으며 라이언은 헛웃음을 지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들어오다 마침 공작부인의 시녀를 마주쳐서 물었는데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셨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릴까요? 아니면 지금 바로 진찰을 하도록 할까요?”
라이언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우선 내가 가서 상태를 살펴보지. 오늘은 유독 더 일어나지 못하는군.”
혹시나 정말 몸이 좋지 못한 것일까 걱정이 된 라이언이 서둘러 서재를 나서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문을 열자 그 앞에 집사 넬슨이 서 있었다.
“주인님. 지금 홀에 닥터 애버클이 와 계시던데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저택에 집사가 모르는 일은 없었다. 보통은 의사를 부르는 것도 넬슨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도 모르는 사이에 이든로즈홀에 도착해 홀을 서성대고 있는 의사라니.
매튜가 그사이를 끼어들었다.
“공작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닥터 애버클을 모시고 왔어요.”
“그렇군요. 마님께서 많이 아프십니까?”
넬슨의 표정이 의미심장했지만, 라이언도 매튜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신경은 온통 2층 침실에 아직 잠들어 있는 리아에게 가 있었다.
매튜는 마침 2층 계단을 오르는 데이지를 발견했다.
“심한 건 아닙니다. 저기! 해터 양! 데이지 해터 양!”
그는 데이지를 불러세웠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데이지가 재빠르게 넬슨을 쳐다보고는 이내 매튜와 라이언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공작부인께서 일어나셨습니까?”
“조금 전에 호출 벨을 울리셨어요. 그래서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요즘 부인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하던데. 해터 양은 가까이에서 부인을 모시니 더 잘 알겠죠. 어디 아프신 것은 아닙니까?”
매튜의 기습질문에 데이지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데이지. 마님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닥터 애버클이 진찰을 하기 위해 오셨다.”
넬슨이 끼어들며 눈짓을 했다. 혹시라도 데이지가 실수를 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심을 받지 않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을 해야 했다.
데이지의 영악함을 믿었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긴장을 해서 실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상한 대답을 하거나 혹은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약을 먹이기 시작하고 이틀 후부터 리아는 조금씩 피로감이 몰려왔고 잠이 늘었다. 처음에는 그 증상이 무척이나 미약했기에 데이지 밖에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데이지는 늘 리아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고 그래서 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관찰의 결과는 넬슨에게 보고되었다.
라이언까지 리아의 변화를 눈치챘는데 늘 옆에서 시중을 드는 데이지가 전혀 모르고 있다면 그것 또한 문제였다.
“요즘 들어 쉽게 피로를 느끼시긴 하시는데 크게 어디가 아프다거나 하신 적은 없으십니다.”
데이지가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라이언을 앞에 두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보고했어야지. 혹여나 어디 안 좋으신 곳이 있으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넬슨이 크게 질책하자 오히려 라이언이 그런 넬슨을 만류했다.
“그만하게. 남편인 나조차 오늘에서야 느낀 것을. 저 아이만 탓할 수야 없지. 너는 어서 가서 부인의 시중을 들 거라. 우리는 10분 뒤에 올라갈 터이니. 부인께 이야기를 전하거라.”
데이지는 치맛자락을 꼭 쥐며 다시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무서웠다. 의사가 진찰해서 이상이 발견되면 어쩌지? 별일 없겠지? 분명 원인을 밝혀내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 어서 가서 리아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넬슨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물러설 곳은 없다.
데이지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키지 않고 완벽하게 먹이는 일이었다. 기회는 지금이었다.
“넬슨. 차를 준비해 주게. 닥터 애버클을 이렇게 그냥 현관에 세워둘 수는 없지.”
“네. 알겠습니다.”
넬슨이 급히 주방을 향해 몸을 옮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응접실로 들어가 리아의 준비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