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발레포르의 부탁
데이지가 응접실을 나가고 난 뒤에도 댄의 모습을 한 발레포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리아는 닫힌 문을 한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발레포르 쪽으로 옮겼다.
“나도 이제 나가볼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수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서….”
검은 기사단의 단원이 되고 싶다던 댄은 리아의 배려로 라이언의 견습기사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파격 대우인 셈이었다. 공작의 견습기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더군다나 댄은 평민이었다.
제대로 절차를 밟자면 더 어린 시절부터 공작가에 들어와 잡일을 하며 체력을 기른 후에 적당한 나이가 되면 견습기사가 되어야 하지만 댄은 공작가의 입성과 동시에 곧바로 견습기사가 되었다. 그것도 공작 직속의 견습기사 말이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리아의 부탁이 있었으니 라이언이 직접 댄을 가르쳤겠지만, 요즘처럼 바쁠 때는 그럴 틈이 없었다.
바쁜 라이언을 대신해 기사단장들이 돌아가며 댄을 관리했는데 오늘은 그들이 전부 외출 중이었고 미처 댄을 챙기지 못한 탓에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리아를 찾아올 수가 있었다.
“가긴 어딜 가? 하던 이야기는 마저 해야지.”
발레포르가 도망칠 기미를 보이자 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응? 우리가 뭐 하던 중이었어?”
발레포르는 아무것도 모른척하며 머리를 긁적였지만 리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죽을래? 그러니까 네 능력이 뭐야? 진짜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 지금도 봐봐. 내가 능력이 없었으면 이 아이 몸에 들어갈 수나 있었겠어?”
리아의 말에 억울하다는 듯 발레포르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럼 말해봐. 뭘 할 수 있는지.”
“아무리 너라도 전부는 말 못 해. 어떤 미친 악마가 자기 능력을 다 말하고 다니겠어.”
사실 발레포르의 주특기는 도둑질이었다. 훔치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 천계에서 리아의 영혼도 훔쳐오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마법 약을 만든다거나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버리는 등 자잘한 능력은 여러 가지였다.
“뭐 좋아. 어디든 쓸모가 있겠지.”
“그럼 당연하지. 너 나 데리고 있으면 손해는 안 본다.”
“발레포르. 넌 말이 너무 많아. 그래서 진짜 날 따라올 거야? 라이언이 너까지 데리고 갈지 모르겠는데.”
리아가 드디어 능력에 대해 추궁하는 것을 그만두고 화제를 전환하자 발레포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귀여운 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하마터면 리아도 착각하고 볼을 꼬집어 줄 정도로였다.
“부탁이 있어.”
“르셀에 데려가 달라고? 그럼 댄은 그냥 두고 네 모습으로 따라오면 안 될까?”
발레포르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은 그렇게 되면 낮에는 나타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보게 될까 봐 대놓고 리아에게 간섭을 할 수도 없다.
어차피 밤에는 잠만 자는데 나타나 봤자 뭘 하겠는가.
“그럼 자유롭지가 못 해. 네가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말하는데. 난 악마야. 해가 떠 있을 때는 돌아다닐 수 없다고.”
“진짜 가지가지 한다.”
“그러니까 말이지. 너 공작부인이잖아. 기사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던걸.”
“소문?”
무슨 소문일까? 리아는 궁금했다.
“이 저택의 실질적인 주인은 공작부인이라던 걸. 둘이 무척이나 사이가 좋은가 봐.”
놀리듯 말하는 발레포르 때문에 리아의 양 볼이 붉어졌다. 처음에 발레포르를 불러대며 온갖 욕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때 라이언 욕도 엄청나게 많이 했었다.
“생각보다 리아 네가 적응을 잘한 것 같아서 좋다.”
장난꾸러기 같던 발레포르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생각보다?”
“그래 생각보다. 너 처음에 난리 친 생각을 하면.”
리아가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발레포르 이 망할 놈 죽여 버릴 거야! 를 외쳐댈 때를 떠올려 본다면 무척이나 큰 변화였다.
“네가 나 속인 생각은 안 해? 부잣집에서 공주처럼 살도록 해 준다더니. 다 큰 여자 몸 안에 집어 넣어놓고. 내가 얼마다 황당했는 줄 알아? 그것도 평범한 사람도 아니에요. 나 처음 눈떴을 때 내 몸이 뼈다귀가 된 줄 알았잖아.”
“그래도 그 덕분에 지금 이렇게 행복하잖아.”
리아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발레포르를 만나면 할 말이 잔뜩이었는데. 원망도 하고 투정도 부리려고 했는데.
발레포르의 말처럼 그녀는 행복했다. 라이언과 함께 지난 과거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레오니의 몸속에 들어있는 리아가 아니라 진짜 레오니 그 자체가 된 것 같았다. 얼굴도 익숙해졌고 생활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는 오히려 진짜 얼굴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기억들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도 그녀는 처음부터 이곳 엘리시아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았었다. 여러 가지로 달라진 게 많은데도 말이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가 봐.”
발레포르의 중얼거림에 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응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하게 했으니.
“내가 좀 그래.”
“그나저나 왕을 만나서 뭘 어쩌려고?”
“그냥 보고 싶어.”
“보고 싶다라….”
보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어떻게 보면 왕 던컨은 라이언을 빼면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혼자였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고 그렇게 평생을 살면서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화려했고 주변엔 늘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중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기대지 못했다.
“그냥. 내 진짜 오빠라면서. 직접 만나고 싶어. 그를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을까?”
“글쎄. 기대는 하지 마. 그는 아무것도 몰라. 던컨에게 너는 그저 치워버리고 싶은 의붓동생일 뿐이야. 내가 본 레오니의 기억이 그러했고.”
“나도 알아.”
리아의 대답이 쓸쓸했다. 레오니의 기억대로라면 그녀는 절대 왕궁에 돌아가서는 안 된다.
왕궁을 떠나며 느꼈던 레오니의 희열이 지금도 생생했다.
“어째서 레오니는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을까?”
발레포르를 만나면 꼭 묻고 싶었던 질문 중 하나였다. 너무도 비참한 삶을 살아온 레오니의 마지막이 꼭 그랬어야 했을까? 이생에서 행복해질 방법은 없었을까?
“리아. 그건 레오니 본인만 아는 거야. 레오니의 기억을 가졌다고 해서 네가 그녀를 전부 알 수는 없어. 기억은 그저 기억일 뿐이야.”
“마음이 아파.”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다간 레오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삶을 빼앗아 자신이 행복한 것만 같아서.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리아는 몰래 혼자서 눈물을 흘렸다.
레오니의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간 것은 아닐까? 어쩌면, 라이언이라면… 그런 레오니도 품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리아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발레포르가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레오니가 원한 건 죽음이었어. 죽음에 대한 열망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어. 죽음에 이르게 된 순간 레오니는 태어난 이래 가장 행복했어.”
리아는 눈을 감았다. 발레포르의 말을 믿고 싶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죄책감을 털어내고 싶었다.
“너였기에. 리아 너이기에 라이언과 행복할 수 있었던 거야.”
정말 그럴까? 믿고 싶었다. 발레포르의 위로를. 리아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말들을 풀어낼 상대가 필요했었다. 환생이니 빙의니 하는 이야기. 사라져버린 레오니에 대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할 상대는 오직 발레포르가 유일했다.
“근데….”
감정을 추스르는 리아를 향해 발레포르가 살며시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응?”
“내 부탁 들어줄 거지?”
“부탁?”
고개를 다시 바로 하며 리아가 발레포르를 쳐다봤다.
“르셀에 데려가 달라고?”
“그거야 당연한 거고. 하나 더 있어.”
“자꾸 그렇게 뜸 들이면 안 들어줄 거야. 빨리 말해.”
“나 좀 네 밑으로 들어가게 해 줘!”
황당한 부탁에 리아의 입이 벌어졌다. 뭐라는 거야? 내 밑?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나 진짜 하루가 너무 바쁘다고. 이 아이 몸에 들어온 지 며칠째인데 오늘에서야 널 찾아온 걸 보면 모르겠니?”
무척이나 불쌍한 말투와 표정으로 발레포르가 징징댔다. 어린 댄 말고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면 더 수월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아이 말고는 들어갈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되도록 인간 세상에 피해를 주지 않게 행동해야 했다. 사실 발레포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다른 사람의 몸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는 있었다.
다만 그럴 경우 나중에 발레포르가 빠져나오고 나면 그 상대의 몸은 죽게 될지도 몰랐다.
악마가 무슨 사람 걱정을 하냐고 하겠지만, 발레포르는 순정이 있는 악마였다. 리아에게 혼날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댄이 그렇게 바빠?”
“아니 기사단장들이 처음 들어온 종자라면서 날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별걸 다 가르치려 들어요. 미칠 지경이야. 똥 쌀 때 빼고는 혼자 있을 시간이 없다니까!”
발레포르가 댄의 작은 가슴을 쿵쿵 치며 말했다.
“너 무슨 실수를 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나중에 댄이 깨어났을 때 곤란할 만한 행동은 하지 마. 그랬다가는 너 진짜 내가 가만 안 둬!”
“걱정을 말라고. 내가 누구냐! 완벽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이 꼬마 녀석은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거다.”
의심이 가득 담긴 리아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발레포르의 머리가 번뜩였다.
“근데 앞으로는 또 모르지. 계속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협박하는 거니?”
“부탁. 부탁하는 거지. 너도 잘 생각해 봐. 내가 옆에 있으면 무척이나 쓸모가 있을 거라고.”
“귀찮아질 것 같은데. 능력도 뚜렷하지 않고.”
“한번 믿어 보라니까!”
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믿었다가 피 본 게 한두 번이어야지.”
“어허. 지금을 보라니까. 너 얼마나 행복하냐고! 나 때문에 라이언 만난 거 잊으면 안 된다.”
“뭐. 좋아. 알겠어. 시도는 해 볼게.”
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레포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걸음걸이까지 모조리 새로 가르치려 하는 기사들에게서 벗어날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그렇지만 발레포르. 명심해야 할 게 있어. 아직 내 화가 다 풀린 건 아니야. 너 너무 신나 하지 말라고. 야! 엉덩이 흔들지 마!”
갑자기 돌변해서 으르렁대는 리아를 피하며 발레포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쿠 늦었네. 댄을 위해서 내가 좀 힘들어도 움직여야지. 기사들이 돌아오면 곧바로 날 찾을 거란 말이지.”
발레포르는 뒷걸음질을 치며 문가로 다가갔다.
“리아. 오늘 대화 즐거웠어. 그리고 부탁할게. 되도록 빨리 날 불러 줘. 오늘 당장이래도 좋아.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로 호소하지 않아도 부탁을 들어줄 작정이었다.
곁에 두면 모르긴 몰라도 쓸모는 있을 거였다. 이렇게 말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고 말이다. 발레포르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