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80화 (80/116)

80화. 페퍼민트 차

라이언은 마차를 점검하러 나갔고 리아는 혼자 남겨졌다.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할 정도로 라이언에게 시달린 탓인지 이상하게 졸음이 몰려왔다. 침실로 가서 쉴까 하다가 그냥 응접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지난번과 같은 사고가 또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 라이언은 하나부터 열까지 르셀로 향하는 준비사항의 모든 것을 직접 점검하고 나섰다.

그것은 마차의 상태뿐만 아니라 마차를 모는 마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특별히 검은 기사단의 단원들이 번갈아 가며 마차를 몰기로 했다.

리아는 종종 혼자 남겨지는 일이 많아졌다. 출발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그 횟수는 빈번해졌다.

외출은 금지되고 방문객을 받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방문이 허락된 것은 제임스가 유일했지만, 그는 두문불출 중이었다.

출발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이 리아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쏟아지는 피로에 살포시 선잠이 든 리아의 귓가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누구지? 무거운 눈꺼풀이 힘겹게 들어 올려졌다가 이내 다시 내려왔다. 몸을 일으키기에는 잠의 유혹이 너무나도 컸다.

어차피 이 집 안에 있는 사람이야 뻔했고 응접실 문을 두드려 그녀를 찾을 사람은 기껏해야 데이지나 집사 넬슨이 전부였다.

아니면 예상보다 일찍 귀가한 라이언이거나.

“공작부인.”

낮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은 리아를 향해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공작부인 일어나 보세요.”

“흐음….”

“리아! 일어나라니까!”

뭐지? 리아? 이상했다. 누구지?

리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앞에는 메리의 동생 댄이 서 있었다.

“댄?”

“네. 공작부인.”

이상했다. 분명 리아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댄이 그랬을 리는 없고.

“너 말고 다른 누가 여기 왔었니?”

리아는 순진한 얼굴로 웃고 있는 댄을 향해 물었다.

“아니요. 오직 저뿐이에요.”

헛소리를 들은 걸까? 꿈을 꾼 걸까? 이 저택 안에 라이언 말고는 그녀더러 리아라고 부르는 이는 없었다.

리아는 허리를 세워 앉았다.

“그래 댄. 무슨 일이니?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거야?”

메리를 무척이나 닮은 얼굴이었다. 귀여운 푸들 강아지 같던 메리의 모습을 쏙 닮은 댄은 갈색 곱슬머리에 나이보다 작은 몸집을 하고 있었다.

“저 그게…요….”

“왜? 말해 보렴. 메리에게 널 잘 챙겨 주겠다고 약속했단다. 힘든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봐.”

“그대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리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댄을 보면 메리가 생각났다. 곁에 메리가 없기에 더 그랬다.

“왜 아무 말도 없어? 곤란한 일이니?”

가만히 입을 다물고 서 있는 댄을 향해 리아가 다시 물었다. 무슨 힘든 일이 있는 걸까? 아직 어린 댄이 가족도 없는 곳에 혼자 남겨진 것이 걱정되었다.

댄이 고개를 숙였다. 바로 앞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자리였기에 숙인 고개 아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댄의 어깨가 마구 들썩였다.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댄!”

댄이 서 있는 자리로 빠르게 다가간 리아는 아이의 흔들리는 어깨를 잡았다.

“우는 거니?”

그러자 이번에는 댄이 손으로 배를 감싸더니 갑자기 주저앉아 바닥을 뒹구는 것이 아닌가?

놀란 리아가 당황해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우는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댄은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미친 건 아닐까?

리아의 시선이 닫힌 응접실 문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바닥을 뒹구는 댄 쪽으로 옮겨졌다.

이 아이를 그냥 둬도 되는지 누굴 불러와서 상황파악을 하도록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내 넬슨을 불렀겠지만, 댄은 메리의 동생이었다. 이런 모습을 들켰다가는 공작부인 앞에서 실수했다는 이유로 혼이 날지도 몰랐다.

몇 분여가 흘렀을까? 우는지 웃는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바닥을 구르며 몸을 흔들던 댄이 동작을 멈췄다.

리아는 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이를 살폈다.

“댄, 괜찮니?”

“…리…아….”

리아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댄이 뭐라고 한 거지? 리아라고 부른 거야?

“지금 너 뭐라고 했니? 날 뭐라고 부른 거야?”

“크…크크큭… 리아….”

“너 누구야?”

또렷하게 들려오는 리아라는 이름에 놀란 그녀는 댄 옆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어째서 댄의 입에서 리아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는 걸까? 메리가 알려 줬을까?

메리와 함께 있는 곳에서 라이언이 몇 번이나 그녀더러 리아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나중에 메리와 리아 둘만 남겨졌을 때 메리는 물었었다. 어째서 공작님이 마님을 리아라고 부르는지.

그때 리아는 말했었다. 어릴 적 불렸던 애칭이었다고.

메리가 댄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준 걸까?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공작부인을 앞에 두고 직접 이름을 부르다니. 댄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리아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워낙 이상한 일이 많다 보니 조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대로 호출 벨을 눌러 넬슨을 부를 생각이었다.

그때 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웃고 있었다.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잘못 본 건가 싶어 고개를 흔들고 다시 쳐다봤지만 그대로였다. 왜 웃고 있는 거지? 진짜 미친 걸까? 등골이 오싹했다.

“헤이 이쁜이.”

“뭐?”

댄의 말에 리아가 놀라서 즉각 반문했다. 이쁜이라고? 이쁜이?

“이쁜이?”

그녀를 이쁜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사람?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악마 딱 한 놈.

“너… 혹시….”

악마 발레포르. 그놈이 유일했다.

“나야.”

“나야?”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댄인데?

“나야. 이쁜이. 이제 나도 못 알아보는 거야?”

리아는 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믿기지 않아서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귓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후벼 파며 눈을 마구 깜빡였다.

“나라고. 내 입으로 직접 그 고귀한 이름을 말해야만 하겠어?”

“…발…레포르?”

“빙고!”

리아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레포르라니. 댄의 모습을 한 발레포르라니.

“이쁜이 나 때문에 놀란 거야?”

“댄은?”

황당한 표정으로 댄의 얼굴을 한 발레포르를 바라보며 리아가 물었다.

“그 아이는 잘 있어. 지금 푹 자고 있지.”

“이게 무슨 짓이야? 장난치는 거 아니지?”

“내가 왜 장난을 치겠어.”

“아니 발레포르 네가 왜 댄의 모습을 하고 있냐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니 화가 났다. 이렇게 놀라게 하기 있는 거냐고!

“너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왔지.”

“망할. 왜 하필 댄이야? 지금 너 댄의 몸 안에 들어간 거야?”

“어허. 고귀하신 공작부인의 입에서 망할 이라니! 조심해. 그러다 남편이 듣겠어.”

발레포르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리아를 혼냈다. 그렇지만 댄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웠다.

“너 죽을래! 빨리 말 안 해?”

물론 진짜 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리아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겠지만.

“아니. 네가 요즘 망할 발레포르라던가. 발레포르 죽여 버릴 거야 같은 말을 전혀 하지 않으니까. 너무 궁금하잖아.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싶고.”

“그래서? 지금 그러니까 내가 네 욕을 안 해서 왔단 말이야?”

댄 속에 들어있는 발레포르가 진지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무리 능력 쩌는 악마라지만.”

“퍽이나.”

“어허. 내 말 좀 들어봐. 어째 성격 급한 건 고치지를 못했니.”

“죽을래!”

죽을래! 라고 쏴붙이는 리아의 말에 발레포르가 감격한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 말투가 그리웠어.”

“미쳤구나!”

“몰라.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만 목소리가 들린단 말이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리아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발레포르를 부르면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들린다고?

“내가 널 부르면 내 목소리가 너한테 들린단 말이야?”

“그때 내가 말했잖아. 네가 욕하는 소리 다 들었다고. 그만하라고 했다고 어떻게 진짜 한 번도 안 하냐. 서운하게.”

“그거야.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그러니까 진짜 내 목소리가 들린다고?”

리아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목소리가 들린단 말이야?

발레포르는 알 수 있었다. 리아가 지금 화가 났다는 것을 그는 리아를 보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댄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 마음이 쓰일 정도로 안쓰러워 보였다. 리아는 갑자기 드는 연민에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지. 댄이 아니라 발레포르잖아. 나쁜 악마 놈!

“표정 바꿔라. 댄 얼굴로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하지 마.”

“드…들려. 평상시에는 전혀 안 들리지만 네가 발레포르라고 부르고 말을 하면 들…려….”

“진짜?”

발레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는 순간 화가 막 치밀어올라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레포르에게 뛰듯이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너 죽을래! 그런 방법이 있는데 말을 해 주지 않았단 말이야? 내가 막 처음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다 알면서 모른척했단 말이지!”

발레포르는 캑캑대며 자신의 멱살을 잡은 리아의 손을 밀어냈다.

“미안… 미…안. 이러지 마. 그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너 지금 딱 아동 학대범 같단 말이야.”

발레포르의 말에 리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대신 길잃은 손을 양 허리에 올려두며 씩씩댔다.

그동안 그렇게 불러댔는데 다 듣고 있으면서 모른척했단 말이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알려 주지도 않고?

“너 귀찮아서 그랬지?”

발레포르는 고개를 돌려 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이름을 부르면 들을 수 있다는 걸 리아가 진작 알았다면? 겪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발레포르를 외쳐댔겠지.

“너 지금 댄 얼굴 하고 있어서 내가 이 정도로 끝내는 줄 알아. 앞으로 뒤통수 조심해라. 너 본모습으로 돌아오면 내가 그 즉시 후려칠 거니까! 나 뒤끝 긴 거 알지? 아니 그나저나 넌 왜 하필이면 댄 안에 들어가 있는 거야?”

“나도 싫어. 나도 좀 다 큰 어른 몸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무슨 말이야?”

“영혼이 순수한 사람 몸에만 들어갈 수 있다고. 이 집에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 이 아이밖에 없는 걸 어떻게 해! 아니 어째서 인간들은 이렇게 삶에 찌든 거니!”

“네가 살아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물론. 내가 널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너 진짜 죽을래?”

“…잘 지내는 거 봤으니까 나 그만 가 볼게….”

리아의 화난 모습을 보며 발레포르가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동작 그만. 가만히 서 있어.”

“미안해.”

여전히 이상하게도 리아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발레포르였다.

“사과는 물론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그냥 몰래 왔다 가도 될 텐데 댄 몸속에 굳이 들어간 이유가. 빨리 말해.”

역시 눈치가 빨랐다. 발레포르는 리아를 당해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선 앉아봐. 우리 차분하게 이야기하자.”

리아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도대체 몇 번을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지.

리아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발레포르도 간신히 소파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너 왕궁에 간다며?”

“그게 왜?”

“그냥 조용히 이대로 살면 안 되는 거야?”

“그럼 네가 나 조용히 살게 해 줬어야지. 지난 과거까지 다 말해 줘 놓고 이제 와서 조용히 살라고 하는 게 말이 돼? 난 그렇게는 못 해.”

발레포르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 리아가 죽을 위기였고 자꾸 자신을 원망하니까 핑계도 대고 싶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다.

“혹시 모르잖아. 왕궁에 가서 네가 무슨 실수를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막 내가 진짜 네 동생이다! 하면서 나대면 어떻게 해! 그러다 너 불경죄로 죽어!”

“그래서 나 감시하려고?”

발레포르가 이번에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꼭 그런 게 아니면?”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 막 누가 너 죽이려고 한다며.”

리아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발레포르 가까이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누구야?”

“응?”

“나 죽이려는 사람 누구냐고. 넌 아는 거 아니야?”

“나도 몰라….”

발레포르가 땅을 기어가듯 작게 중얼댔다.

“몰라?”

“응….”

“왜? 왜 몰라? 너 악마잖아. 그 정도 능력 없어?”

리아의 말에 자존심이 확 상했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진짜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인간의 모든 일을 알 수는 없어.”

악마라고 해서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알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관심법이라던가 독심술 같은 건 없었다.

“와… 진짜 악마가 뭐 그러냐? 그럼 너 할 줄 아는 게 도대체 뭐야! 있긴 있어?”

“그…그게… 나도 있어! 할 줄 아는 거 있다고!”

리아가 투덜대는 발레포르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있으면 어디 말해봐!

“있으면 어디 말해봐! 없지? 너 할 줄 아는 거 쥐뿔도 없지?”

감히 악마의 능력을 무시하는 리아의 말에 발끈한 발레포르가 이야기하려는 순간 노크 소리와 동시에 데이지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저 데이지예요. 차 드실 시간이 되어서요.”

차 쟁반을 들고 들어오던 데이지는 리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댄을 보고 조금 놀란 듯싶더니 이내 평정심을 유지하며 방긋 웃었다.

“댄도 있었네요.”

“어? 어… 댄이랑 그냥 이야기 좀 하고 있었어.”

“네.”

“마, 마님. 전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발레포르가 벌떡 일어나며 댄 흉내를 냈다.

“아니야. 댄. 앉아. 난 더 궁금한 것이 많은걸. 메리 소식도 궁금하고.”

피하려는 수작이 다분한 발레포르의 행동에 리아가 곁눈질하며 그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마님. 오늘은 페퍼민트예요.”

데이지가 따뜻한 찻물을 찻잔에 부으며 리아를 향해 말했다.

“그래? 마침 잘되었네. 상쾌한 게 필요했는데. 영 답답한 일이 많아서 말이야.”

리아가 다시 은근슬쩍 발레포르를 째려봤다. 답답한 이유는 바로 너라고! 너!

데이지가 리아 앞에 찻잔을 내려놓자 시원하고 화한 느낌에 페퍼민트의 향이 퍼져나갔다.

리아가 찻잔을 들어 올려 향을 한번 맡은 후 그대로 입가에 가져다 대려고 하자 갑자기 발레포르가 소리쳤다.

“마님!”

놀란 리아가 움찔했다.

“어머!”

놀란 것은 데이지도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찻물이 넘쳤을까 봐 마음을 졸였지만, 다행히도 찻물이 넘쳐 흐르지는 않았다.

“왜 불렀니?”

리아가 찻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댄의 모습을 한 발레포르를 향해 물었다.

깜짝 놀라게 갑자기 왜 부르고 난리야. 성격 같아서는 소리라도 뻥 치고 싶지만, 곁에 데이지가 있는지라 그러지 못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 아니….”

“왜? 말해 보렴.”

“차…차가….”

“댄. 네가 마실 것도 준비해 줄까?”

데이지가 댄의 말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데이지는 불안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공작부인은 무조건 지금 준비한 차를 마셔야 했다. 그녀가 넬슨에게 약을 받아 온 지 3일이 지났고 오늘로 4일째였다. 벌써 두 번 실수를 한 탓에 그중 하루에 약을 두 방울이나 쓴 날이 이틀이었다.

이제 남은 약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자꾸 실수가 반복되면 이러다가는 약이 부족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평소 페퍼민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준비한 것이었다. 일부러 작은 찻잔에 찻물도 조금만 부어서 금방 다 마실 수 있도록 계획을 했다.

“왜? 댄 너도 목이 마르니? 음료를 준비해 오라고 할까?”

물론 리아는 속으로 발레포르의 욕을 바가지로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은 무척이나 온화했다.

“아니에요.”

“그런데 날 왜 부른 거니?”

왜 불렀느냐고 이놈아! 너 때문에 찻물 다 엎지를 뻔했잖아!

다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무척이나 매서웠다.

“뜨거운 것 같아서 조심히 드시라고….”

“아….”

리아와 데이지의 입에서 똑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의미는 무척이나 다른.

데이지의 ‘아’는 아 다행이다! 였고 리아는 ‘아’는 아 이 망할 놈이! 였다.

“그, 그래. 조심히 마실게.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발레포르를 향해 이따 두고 보자! 라는 무시무시한 눈빛을 쏘아댄 후 리아가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작은 찻잔이 귀여웠다.

조금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리아는 적당히 따뜻한 차를 두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데이지.”

차를 다 마신 리아가 조금 굳은 목소리로 데이지를 불렀다. 데이지는 괜히 가슴이 쿵쾅댔다. 맛이 이상한가? 무색. 무취. 무미라고 했는데. 눈치를 챌 리가 없을 텐데.

“네. 마님.”

“정말 이럴 거야?”

“네?”

화가 난 듯한 리아의 얼굴에 데이지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들켰나? 어쩌지?

“내가 페퍼민트 좋아하는 거 몰라? 찻잔이 너무 작잖아. 한잔 더 줘.”

이어지는 리아의 말에 데이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었다. 들키지 않았어.

4번째 성공이었다. 이제 남은 횟수는 3번.

아무래도 예감이 좋았다. 데이지는 한껏 웃으며 리아의 찻잔에 차를 가득 따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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