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79화 (79/116)

79화. 그들의 계획

데이지와 넬슨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졌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들은 일주일 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넬슨은 일주일 전처럼 자신의 방에서 데이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제법 영특한 데이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저 공작부인께 충성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인데 데이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해내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공작부인이 변한 데이지를 조금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예상치 못했던 공작의 도움으로 걱정이 해소되었다.

“공작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공작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있겠지.

넬슨은 엘리시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베드포드 공작을 존경했다. 다만 공작에 대한 존경보다는 딸을 향한 부정이 더 클 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우선순위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미안하지만 여자를 잘못 만난 걸 어쩌겠소.”

넬슨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며 밑에 층에 잠들어 있을 공작을 떠올리고는 낮게 중얼댔다. 공작은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녀 간의 사정까지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공작이 부인을 사랑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꼭 죽어 줘야겠어. 망할 년.”

아마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미의 죄를 자식이 대신 치러야 하냐고 비난을 할 수도 있었다. 전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겠지.

그렇다면 내 딸 에이미는?

그 연약하고 가여운 아이는 무슨 죄가 있기에 그토록 처참하게 죽었단 말인가. 에이미에게도 죄는 없었다.

왕비 제시카를 통해 사건의 자초지종을 모조리 전해 들은 이후로 넬슨은 편안히 잠을 자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울컥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에이미는 죽었는데 그 아이를 죽인 에리스의 딸은 살아 있었다. 그것도 모든 것을 다 가진 공작부인으로 근사하게.

공작에게 버림받고 죽은 것보다 못한 삶을 살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축복이겠거니 할 정도로 엉망이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넬슨은 희열을 느꼈다.

그런데 감히 이제 와 행복을 꿈꿔? 에이미는 죽었는데 네년은 웃어? 행복해하는 에리스의 딸을 볼 때마다 넬슨은 피가 끓어올랐다.

악녀 에리스는 임신을 한 채로 죽은 아이들의 피를 마셨다고 했다. 바로 고귀하신 공작부인을 배 속에 품은 채로 말이다.

에이미의 피가 에리스의 식도를 넘어가 탯줄을 타고 그녀의 딸에게 전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온몸이 떨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리스의 딸은 죄가 없다고? 아니. 아니다. 그녀는 죄가 있었다.

무지하고 힘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이 에이미의 죄였다면, 레오니 엘리시아 그녀의 죄는 에리스라는 엄마를 가졌다는 것이다.

“끝까지 비참하게 살았으면 좋았잖아.”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냥 비참한 그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했을 텐데.

리아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에게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에이미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는데 그 죄를 저지른 에리스의 딸은 이토록 행복하게 살고 있다니.

에이미에게 미안했다. 지켜주지 못한 것이.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둔 것이. 가난한 평민의 딸로 태어나게 한 것이.

죽은 딸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복수였다.

그것은 에이미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그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에 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앞에는 데이지가 서 있었다.

그는 데이지의 팔목을 잡으며 안으로 끌어당기고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낮에 집무실에서 만날 수도 있었다. 집안에서 일하는 하녀가 집사인 그의 집무실을 찾아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넬슨은 집무실에서 데이지를 만나지 않았다. 일을 저지르고 난 뒤를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의혹이 남을 만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는 여차하면 데이지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워 버릴 계획이었다.

공적인 이유라 해도 데이지와 자신이 몇 번이고 단둘이 만났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일은 없었다.

이용하고 버려도 하등 상관없는, 평소에 행실이 좋지 못한 아이를 한 명 골라 놓으라고 한 것은 왕비 제시카의 지시였다. 넬슨은 왕비의 말을 충실하게 따를 뿐이었다.

물론 일이 틀어지지 않고 계획대로 된다면 데이지에게 충분한 보상을 할 생각이다. 잘 된다면 말이다.

모두가 잠든 밤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쯤이야 데이지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그녀가 공작 부부의 침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2층과 손님이 전혀 머물지 않는 3층을 오간다고 해도 지하에 잠들어 있는 하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넬슨이 데이지를 방 가장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본 사람은 없겠지?”

“개미 한 마리도 없을걸요.”

당당한 데이지의 말에 넬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영악한 아이였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 자신을 숨기고 낮출 줄도 알았다.

지난 몇 년간 그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데이지는 분명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자신이 돋보이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하는 아이였다. 아름다운 외모는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고작 하녀 주제라고 해도 말이다.

에리스의 딸에게 못되게 군다는 것도 넬슨은 다 알고 있었다. 제지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을 뿐.

데이지는 좀 더 나이가 들면 베드포드 성을 떠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낮춰야 하는 하녀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베드포드 성에 이렇다 할 주인이 없었고 할 일도 없었으며 급여는 두둑했기에 버티고 있었을 테지.

공작부인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녀는 복종보다는 도망을 택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아이가 욕망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 일주일간 데이지의 행동은 충분히 칭찬할 만했다. 넬슨이 보기에도 무척 대단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기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지. 원하는 것에 대한 욕구가 무척 강렬하기에.

넬슨은 데이지의 그 욕심이 마음에 들었다.

“지난 일주일간 널 지켜보았다.”

넬슨이 입을 열자 데이지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그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흘러나올지 몹시 궁금했다.

데이지는 넬슨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단할 정도로 그녀는 공작 부인에게 비굴할 정도로 절절매며 충성했다.

공작부인이 일부러 시험하듯 자신을 향해 심술을 부리고 괴롭힌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진하게 마치 원한다면 발가락이라도 핥을 기세로 비위를 맞췄다.

잠깐의 멸시와 모욕을 견뎌내면 앞으로 평생이 달라질 것인데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결국은 죽을 것이 아닌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 판에 곧 죽을 사람의 투정을 받아 주는 것쯤이야 힘든 일도 아니었다.

리아가 되지도 않는 트집을 잡아가며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데이지는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어차피 넌 죽어. 어차피 넌 죽어. 어차피 넌 곧 죽는다고!

“대단하더구나. 이일에 네가 얼마나 적합한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다음 계획이 궁금하겠지?”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대체 어떻게 죽이려는 것일까? 왜 잘해 주라고 한 것일까?

“이걸 받아라.”

넬슨은 가슴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데이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곧바로 넬슨의 손에서 병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는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병.

이게 뭘까? 데이지는 병을 들어 올려 코끝에 가져다 대며 킁킁댔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게 뭐죠?”

“조심해. 보기에는 무척이나 평범해 보이지만 그걸 마시면….”

“죽나요?”

그녀는 병을 유심히 관찰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무색무취 거기에 아무런 맛도 나지 않지. 마셔도 마신 걸 모른 채로 죽게 된다더구나.”

“이걸 공작 부인에게 먹이면 되나요?”

넬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지금 그 병에 든 것을 반 정도 마신다면 정확히 24시간 후 잠든 것처럼 평화롭게 죽는다지.”

“아무런 맛도 냄새도 나지 않는다면 공작부인이 마시는 차에 넣어서 죽여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넬슨이 또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데이지는 그런 넬슨의 행동이 답답했다. 그렇게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독약을 왜 줬단 말인가!

“한꺼번에 마시면 잠든 것처럼 평화롭게 죽게 되겠지만, 그럼 손바닥과 발바닥이 새까만 색으로 변한다고 하더군. 그게 바로 그 독약을 먹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려 주는 증상이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죽여야 한다는 것이 왕비 제시카의 명령이었다.

넬슨 혼자서 일을 저지르는 것이라면 그냥 칼로 찔러 죽여 버리는 것이 제일 쉽겠지만 왕비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죽음을 원했다.

넬슨은 이미 왕비 제시카에게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딸의 죽음도 알지 못하고 무지렁이 같은 삶을 살아가던 그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복수의 기회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다.

어차피 결국 서로가 원하는 것은 공작부인의 죽음이니 가능하면 왕비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작정이었다.

제시카가 넬슨에게 전해 준 것은 바로 에리스가 선대 왕비 앤에게 먹인 라페스타의 독약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던컨은 그 독약을 먹은 사람이 어떤 식으로 죽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차사고도 실패했고 자객을 보내 처리하는 것도 공작이 곁에 있는 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누구도 의심받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르게 할 방법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제시카는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랐다. 왕궁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다. 리아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면 라이언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은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왕인 던컨도 좌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완벽한 제시카의 왕국에서 단 한 가지 흠을 지워버리기 위해 벌이는 일이었다. 이 일로 왕국이 더 복잡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왕비 제시카의 왕국은 평화롭고 아름다워야만 했다.

라이언이 자신의 부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을 때는 그냥 죽여 버려도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겠지만 이젠 이야기가 달라졌다. 더군다나 그들은 던컨의 부름을 앞둔 상태이기도 했다.

이미 손쉽게 처리할 기회를 다 날려버렸지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은 있었다.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은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그게 바로 지금 데이지의 손 위에 놓인 독약이었다.

무색에 무취, 그리고 무미인 독약은 세상에 딱 한 종류뿐이었다.

라페스타 왕가에 대대로 내려온 독약. 라페스타의 멸망과 함께 이제 다시는 구할 수 없는 독약.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에리스가 앤을 독살하고 남겨둔 것뿐이었고 그것은 엘리시아 왕국의 비밀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제시카는 그 독약을 꺼냈다. 그곳은 오로지 왕과 왕비만이 열 수 있는 금고였다.

만약 리아의 죽음이 라페스타 왕가의 독약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던컨은 제시카를 의심할 것이다. 그 말고 금고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녀뿐이니.

그런 이유로 그냥 단번에 먹여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죽이는 것은 제시카 입장에서는 내가 범인이라고 소리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매일 공작부인이 마시는 차에 한 방울씩 섞도록. 딱 한 방울씩만 섞어야 해. 만약 차를 마시지 않는다면 물에라도 섞어서 먹여야 한다.”

“그럼 죽나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데이지가 되물었다.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왕궁에 도착하기 전에 죽게 되겠지.”

넬슨은 제시카가 알려 준 대로 데이지에게 대답을 해 주었다. 확신에 찬 말투였지만 사실 그도 독약의 효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제시카 해 준 말을 무조건 믿을 뿐이었다.

왕비 제시카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넬슨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복수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도대체 왕비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그녀의 죽음을 바라는 것일까?

“제가 의심을 받는 일은 확실히 없는 거겠죠?”

데이지가 병을 꼭 쥐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결국, 일을 행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데이지였다.

만약 계획이 잘못되고 넬슨이 모른 척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녀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될지도 몰랐다.

“의사도 원인을 밝혀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한 죽음. 아무도 독약을 써서 죽였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분이 누군지 알려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요.”

데이지가 당돌하게 말했다. 어차피 그녀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넬슨이 직접 하긴 힘든 일이었다. 계획대로 죽이려면 매일같이 딱 한 방울씩 먹여야 하는데 데이지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데이지는 넬슨이 답을 해 주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녀도 무언가 잡고 늘어질 끈이 필요했다.

넬슨은 어떤 답을 해 주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데이지가 의심받을 상황이 오게 된다면 일이 실패했든 성공했든 그녀는 어차피 죽을 것인데. 입을 나불대기 전에 죽게 될 텐데.

그리고 꼭 진실을 말해 줄 필요도 없었다.

“폐하.”

“네?”

“던컨 에드거 4세. 엘리시아 왕국의 왕. 그분이 우리의 뒤에 계시다.”

“그…그분이… 왜?”

“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대놓고 동생을 죽이기는 쉽지 않겠지.”

왕이라니! 믿어야 할까?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믿는 수밖에 없었다. 믿고 싶었다.

넬슨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높은 사람들의 일 따윈 알 바가 아니었다.

데이지는 어쩌면 허무맹랑하기만 했던 공작을 원한다는 자신의 말이 이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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