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악몽
어둠 속에서 무슨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라이언은 리아를 꼭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리아를 향한 사랑을 인정한 이후 그는 감정에 솔직했다. 거리낌 없이 애정표현을 했고 스킨쉽을 아끼지 않았다. 질투도 했고 투정도 부렸다.
라이언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변했다고 했다. 여자를 만나 이상해졌다고. 예전과 같은 냉철함과 이성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는 달라졌다. 리아를 만난 이후 라이언의 시야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행복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리아와 함께라면 그는 행복했다. 사랑은 그를 완벽하게 변화시켰다.
리아를 만난 이후 달라진 점을 찾자면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사라진 불면증이었다.
거짓말처럼 불면증은 사라졌다. 악몽도 사라졌다. 그는 이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물론 리아와 함께할 때만 그러했지만.
왜 하필 그녀였을까? 어째서 리아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더는 흉터가 아려오지 않았으며 아기처럼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의 답은 간단했다.
사랑. 그건 사랑 때문이었다. 리아를 향한 라이언의 사랑은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이제 잠드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악몽은 끝이 났다.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라이언은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리아가 왕을 만나고 싶어 한다거나, 만나서 무슨 짓을 할지 골치가 아프다거나 하는 걱정거리는 있었지만 말이다.
잠결에 뒤척이며 라이언은 리아를 더 가까이 당겨 안았다. 그에게는 요즘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다. 그는 잠결에도 손을 뻗어 리아를 확인했다. 그녀가 곁에 없으면 불안했다. 손끝이라도 닿아 있어야 안심이 됐다. 그래야 잠이 왔다.
리아는 그런 라이언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점점 서로 닮아 가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리아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라이언도 이내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라이언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눈앞은 캄캄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냥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암흑이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삼켜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혼자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두려움이 밀려왔다. 리아는 어디 있지? 팔을 휘저었다. 잡히는 것은 없었다.
“리아!”
이번에는 크게 리아를 불렀다. 목청이 터질 듯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팔을 사방으로 휘저으며 그는 움직였다.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리아를 찾아야 했다. 그녀 역시 이런 어둠 속에 놓여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구해줘야 했다.
“리아, 리아!”
시간의 흐름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몇 분이 지났는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식은땀이 났다. 자꾸 리아를 찾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이 그를 조금씩 좀 먹어가고 있었다.
어둠은 끝이 없었다. 그때였다. 비명이 들려온 것은.
처음에는 희미하게 귓가를 간질이던 비명이 점점 날카롭게 커졌다. 확실했다. 그것은 리아였다. 분명 리아의 목소리였다.
“리아!”
라이언은 더 크게 울부짖었다. 보이지 않으니 더 불안했다. 이 정도의 비명이라니! 그런데 갑자기 이번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금방까지도 걸어 다니며 사방으로 휘둘러댔던 손발이 굳어버렸다.
어둠은 언제나 두려움을 몰고 온다. 몸이 뜨거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리아의 비명을 계속해서 듣는 상황은 그에게 혼란스러움과 미칠 것 같은 공포를 가져왔다.
라이언은 포효하며 어둠을 향해 온몸을 흔들었다. 모든 것은 최악이었다. 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라이언, 라이언!”
리아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잠꼬대를 하는 라이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몸까지 떠는 그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라이언 일어나요!”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예전에도 한 번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리아의 수심이 깊어졌다. 좀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끙끙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리아는 라이언의 얼굴을 꼭 끌어안았다.
“일어나요. 내가 옆에 있어요. 내가 지켜줄게요.”
무슨 일인지 무슨 꿈인지 모르지만 안아 주고 싶었다. 커다란 덩치를 하고서 아이처럼 끙끙대는 그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무슨 꿈을 이렇게 험하게 꿔요. 이제 일어나요.”
떨림이 멈췄다. 그녀는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땀에 젖어 흉터에 달라붙어 있었다. 리아는 그것을 쓸어올렸다. 그러자 이마가 훤히 드러나며 흉터가 확실히 보였다. 처음보다 옅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마를 반이나 차지하고 있는 흉터는 리아의 심장을 마구 찔러댔다.
얼마나 아팠을까? 전쟁 중에 다친 걸까? 그러고 보니 그는 그녀의 물음에 답해 주지 않았다. 어쩌다 생긴 흉터냐고 물어봤었는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리아가 몇 번이고 이마에서부터 볼까지 라이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손길이 라이언을 깨웠다. 그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리아의 몸도 덩달아 따라서 출렁였다.
깨어난 라이언은 정신이 멍했다.
여긴 어디지?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마구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방안이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커튼을 치지 않은 탓에 밖이 훤히 보였다.
아침이었다. 자신은 금방까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고 리아의 손길에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악몽을 꿨다는 것도.
“리아.”
라이언은 리아를 불렀다. 낮게 잠겨 있었지만 다행히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나 여기 있어요.”
리아는 혼란스러워하는 라이언의 손을 찾아 잡으며 그의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다행이야.”
그는 말했다. 다행이었다. 모든 것은 꿈이었다. 어둠도 비명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리아의 모습에 안도하며 그녀의 등 뒤로 팔을 둘러 작은 몸을 꽉 껴안았다.
리아의 비명에 얼마나 불안했는지, 얼마나 무서웠는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한 꿈이었다. 어째서 그런 꿈을 꿨을까.
그녀와 함께 잠들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꾸는 악몽이었다. 무엇이 불안한 걸까? 이상했다. 라이언은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렇게 몸을 떨었어요?”
숨도 못 쉴 정도로 세게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라이언의 몸을 살짝 밀어내며 리아가 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아무것도?”
리아는 라이언의 품 안에서 조금 떨어져 나오며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무척이나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지쳐 보이기도 했다.
“이젠 잘 보이죠?”
“느낌이 좋지 않아.”
라이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갑자기 그런 꿈을 꿨다는 것 자체가 찝찝했다. 어둠과 비명. 좋지 않은 징조였다.
“도대체 무슨 꿈이길래 그래요?”
그녀가 르셀로 왕을 만나러 가는 것이 싫다고 해도 연기까지 해가면서 막을 사람은 아니었다. 본인의 입으로 한 말은 꼭 지켰기에 일부러 악몽을 꾼 척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리아는 궁금했다. 그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어. 완벽한 암흑.”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하는 라이언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당신은 없고 난 혼자였어. 그러다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지.”
“비명이요?”
“당신이었어. 그 비명을 지른 사람은.”
“내가 비명을 질렀다고요?”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비명이라. 리아는 갑자기 레오니의 기억이 떠올랐다. 왕궁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미친 공주로 통했던 지난 과거가.
왜 하필 이 시점에 라이언은 그런 악몽을 꾼 것일까?
“라이언. 난 아무 일도 없이 여기 당신 옆에 있어요. 앞으로도 쭉 그럴 거예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검은 사자가 왜 이렇게 겁이 많아요.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에요.”
“그러게 내가 왜 이렇게 겁쟁이가 되어 버린 것인지 모르겠군. 자꾸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무서워.”
그건 진심이었다. 여전히 그녀에게 위해를 가했던 범인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사그라들었고 당사자인 리아 역시도 다 지난 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평온한 일상이 계속될수록 라이언은 더 불안했다.
리아가 왕을 만나러 가겠다고 선언한 이후 그도 모르게 불안감은 아마도 최고조에 다다라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모든 것들이 합해져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은 아닐까?
라이언은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리아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당신이 지켜주면 되잖아요.”
걱정을 사서 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지켜주면 되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그는 그녀를 지킬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변수는 존재했고 완벽한 보호는 없었다.
이미 한번 당해봤기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난번 사고 역시 그러했으니. 마차가 통째로 강물에 빠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늘 함께 있을 수는 없어.”
만약 함께하지 못하는 사이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언제나 불행은 예상치 못하는 곳에서 찾아오는 법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볼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내가 곁에 있을게요. 내가 늘 당신 옆에 있을 테니. 그러니 안심해요. 생기지도 않은 일을 두고 걱정하는 건 그만둬요. 만약 벌어질 일이라면 당신이 이런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리아.”
“난 당신이 웃는 게 좋아요. 찌푸린 얼굴이나 걱정 가득한 눈빛은 싫어요.”
“내가 아침부터 괜히 당신을 우울하게 만들었군.”
리아는 맞다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난 걱정을 사서 하는 게 제일 싫어. 자고로 마음이 편한 게 최고예요.”
아니라고 괜찮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역시나 리아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솔직했다.
“걱정은 하면 할수록 늘어난다니까요. 별일 없을 거예요. 궁에 가서도 조심히 행동할게요. 예의 바르게 행동할게요.”
“믿어도 될까?”
“뭘 믿어요?”
“예의 바르게 행동하겠다며. 그 말을 믿어도 되는지 물었소.”
“와, 너무하네. 내가 언제 예의 없이 행동하는 거 본 적 있어요?”
리아가 침대에서 내려오며 허리에 양쪽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따지는 듯한 동작에 라이언은 웃음이 터졌다.
“검을 돌려 달라고 한다면서. 그것부터가 왕의 말을 거스르고 예의 없이 구는 것이 아닐까?”
“저기요. 자꾸 잊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요.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잊어버린 것 같아서요.”
“말해 봐.”
리아는 라이언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나 공주예요.”
“뭐라고?”
잘못 들었나 싶어 라이언이 다시 물었다. 지금 공주라고 한 건가?
“다 들었으면서 뭘 또 물어요.”
리아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귓가에 닿았던 온기가 멀어지려 하자 라이언은 황급히 그녀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리아는 라이언의 무릎에 올라앉은 자세가 되고 말았다.
“뭐 하는 거예요? 곧 존과 데이지가 올 거예요.”
“어차피 그들은 허락 없이는 방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알지 않소.”
“그게 무슨….”
그는 리아의 허리를 잡아 들고는 곧장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녀는 이번에는 그의 몸 위에 눕고 말았다.
“비가 오는군. 비 오는 날은 늦잠을 자야 하는 법이지. 더구나 나는 당신 걱정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오. 그러니 책임을 져야지.”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라이언이 그녀를 자극했다. 리아는 창가를 쳐다봤다. 그의 말처럼 정말 보슬보슬 비가 오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진 하늘이 어두웠다. 그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엉덩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못 말린다니까. 뭐 사실 조금 늦잠을 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그의 말처럼 비도 오고.
리아는 라이언의 가슴에 볼을 가져다 댔다.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뜨거웠다. 그녀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책임을 지면 좋을까요?”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의 몸이 뒤집혔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