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늦은 밤 움직이는 그림자
깊은 밤 누군가 이든로즈홀의 3층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고 있었다. 하인들은 모두 잠이 들었고 공작 부부의 침실 역시도 불이 꺼졌다.
저택은 고요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저택 밖에서 혹시 모를 적에 대비하여 교대로 보초를 서는 기사단원들밖에 없었다. 그들은 집 안의 은밀한 움직임까지는 알지 못했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다 오른 그림자는 복도 맨 앞에 있는 방문을 살짝 두드렸다. 표시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인기척에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장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빠르게 튀어나온 손이 그림자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그림자는 빨려 들어갔고 복도는 다시 어둠에 잠겼다.
철컥하고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자물쇠가 돌아갔다. 방안은 작은 등불 하나만을 켜 놓은 상태였다.
“누가 알아챈 것은 아니겠지?”
“아무도요. 조심히 발소리도 내지 않으며 올라왔어요.”
몰래 숨어든 그림자는 여인이었다. 여자가 치마를 들어 올리자 그 밑으로 두툼한 양말에 감 싸인 발이 보였다. 그녀는 인기척을 내지 않기 위해 신발도 신지 않고 일부러 두꺼운 양말만을 신은 채 움직였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군.”
남자의 묘한 칭찬에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구질구질한 인생에 처음 찾아온 기회였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잡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휴즈 부인이 뭐라고 하며 널 이곳으로 보냈지?”
“넬슨님께서 공작부인께 새로운 시녀가 필요하다며 저를 지목해서 보내 달라고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층의 첫 번째 방은 집사 넬슨의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으로 몰래 숨어든 그림자는 리아의 새로운 시녀 데이지였다.
넬슨은 혹시나 문 앞에서 이야기하다가 누군가가 들을까 싶어 데이지를 데리고 방 안 깊숙이 들어가 테이블 앞 의자에 앉혔다. 두꺼운 커튼은 창문을 가리고 있었고 밖에서는 안에 불이 켜져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넌 마치 뭔가를 아는 것 같구나.”
데이지가 의자에 앉자마자 넬슨이 말했다.
“아는 것은 없지만 넬슨 씨께서 제게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는 것은 알아요.”
데이지는 집사 넬슨이 왜 자신을 지목해서 보내 달라고 했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저 메리 이전에 공작부인을 모시던 시녀가 그녀였으니 그래서 그랬으려니 여겼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들 렌포드로 가는 데이지를 부러워했다.
그렇지만 렌포드에 도착하고 넬슨과 눈을 마주쳤을 때… 뭔가 이상했다.
그는 새로운 시녀를 왜 베드포드 성에서 데려왔냐는 공작부인의 말에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이곳에서 새로 뽑으려고 했는데 휴즈 부인이 어떻게 알고 보냈는지 모르겠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분명 그녀를 보내 달라고 한 것은 넬슨이었다. 휴즈 부인은 넬슨 씨가 널 꼭 보내 달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며 시녀들 일에 참견하실 분이 아니신데 이상하다고 의아해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넬슨에게 무엇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그녀의 생각은 이내 확실해졌다. 그가 그녀에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모두 잠든 밤에 자신의 방으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은밀하게 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밤에 몰래 방으로 오라는 말은 남녀 간의 관계를 원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데이지에게는 넬슨의 말이 그런 쪽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분명 무언가 있었다.
기회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구나! 데이지는 넬슨의 부름에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네가 공작님께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익히 들었지. 남자를 아주 잘 다룬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네? 그게….”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그는 무슨 대답을 원하고 있을까? 그의 표정을 보아도 통 알 수가 없었다. 데이지는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내 말이 틀렸니?”
넬슨이 다시 물었다.
“아, 아니요. 맞아요. 공작님은 너무 멋있으시잖아요. 관심이 없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제가 남자를 잘 다루는 게 아니라 남자들이 절 가만히 두질 않는답니다.”
데이지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넬슨의 표정이 달라졌다. 사실 그는 그녀가 다른 그 누구보다 욕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욕심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애초부터 그는 데이지가 지난 몇 년 동안 공작부인의 식사를 잘 챙기지 않고 모든 일을 대충 처리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유용한 아이였다. 가진 능력보다 욕망이 넘치는 사람은 늘 다루기가 쉬웠다.
되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이제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였고 이번을 놓치면 모든 것은 끝이었다.
공작은 2주 뒤 왕궁을 향해 출발할 예정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지난번처럼 마부를 바꿔 마차를 위험에 빠트릴 만한 장소도 없었다. 출발하기 전 이곳 렌포드에서 기필코 그년을 죽여야만 했다.
지은 죄도 모르고 활개를 치고 다니는 꼴을 더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왕비의 명이 아니더라도 넬슨은 여자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왕궁으로 돌아간다면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는 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는 복수할 기회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자신은 왕궁까지 따라갈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공작부인을 죽일 생각이다.”
넬슨은 솔직했다. 이럴 때는 둘러 말하는 것보다 솔직한 쪽이 좋았다. 그의 말에 데이지는 조금 놀란 듯하더니 이내 침착해졌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보통이 아니었다.
“마차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데이지는 한술 더 떠서 지난 마차사고가 넬슨의 짓인지를 묻고 있었다. 넬슨은 데이지가 더 맘에 들었다.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지. 목숨이 질긴 여자더구나.”
“베드포드 성에 있을 때도 그랬죠.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어김없이 숨을 쉬었어요.”
넬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아이라니 생각보다 더 일이 쉬울 것도 같았다.
“제가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데이지가 무릎 위로 손을 올려 잡으며 넬슨을 향해 공손히 물었다.
“우선 공작 부인에게 충성하거라. 건방을 떨지도 말고 뒤에서 비웃지도 말아라. 과거의 너는 잊어. 너는 오늘부터 공작부인의 충실한 시녀가 되는 것이다.”
“네.”
데이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넬슨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작정이었다.
공작부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진짜 죽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잠시 연기를 하는 것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매우 짧아. 공작 부부는 이제 곧 렌포드를 떠나 르셀로 거취를 옮길 예정이다. 그렇지만 난 당장 급하게 행동하지 않을 생각이야. 넌 우선 내가 시킨 대로 네 일에 충실하거라. 공작에게 눈길조차 주지 말고.”
“알겠습니다.”
“무슨 계획인지 묻지 않느냐?”
“전 넬슨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이 일이 성공하게 된다면 넌 뭘 원하느냐?”
넬슨이 제시카를 향해 물었다. 제시카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원하는 것을 말만 하면 다 들어주시나요?”
“가능한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내 뒤에 그 모든 걸 들어주실 만큼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시단다.”
“전 공작님을 원해요.”
“뭐?”
“그분께 그 정도의 힘이 있으신가요?”
당돌한 질문에 넬슨은 조금 놀랐으나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녀를 훑어보았다.
시녀 노릇을 하기에는 아까운 미모였다. 평민에게는 흔하지 않은 금발 머리는 그녀가 어떤 귀족의 사생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특별했다.
남자들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잘만 꾸며서 내어놓는다면 어느 귀족 가의 아가씨라고 해도 모두 믿을 것이었다.
“글쎄. 우리의 일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만약 원하는 것을 이루신다면 그쯤이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어차피 정부인 자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너도 알 것이고. 그렇지만 말이야. 공작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이야. 그보다는 돈을 택하는 쪽이 현명하지.”
어쩌면 넬슨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공작 부부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고 지금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라고 하지 않는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일주일 뒤 이 시간에 다시 이곳으로 오너라. 그때 새로운 지시를 내릴 것이다. 그 전까지는 오늘 내가 이야기 한 것처럼 똑바로 행동해야 한다. 네 감정에 따라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겠다.”
“명심하겠습니다.”
나가 보라는 그의 손짓에 데이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매우 조심스럽게 방을 벗어나 지하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내려갔다. 워낙 밤마실을 자주 다니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들킨다 해도 다들 그러려니 생각할 것이다.
데이지가 나간 방문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넬슨은 갑자기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마치 기도를 하듯이 두 손을 모아 잡았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였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복수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제발. 이번에는 이 늙은이의 원을 이루도록 해 주십시오.”
넬슨은 왕비 제시카를 떠올렸다. 3년 전 그녀는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 그의 인생은 바뀌고 말았다.
제시카는 그를 향해 과거에 실종된 딸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누구에게 죽었는지… 그 원수의 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까지 모두 말해 주었다.
넬슨은 절망했다. 그냥 실종되었다고 알고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어쩌면 딸이 죽지 않고 어디엔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기에 마음은 더 찢어질 것 같았다.
찾아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국을 다 뒤졌지만, 딸을 찾지 못한 이유가 그거였구나. 누군가에게 몽둥이로 머리통을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그길로 고향을 떠나 제시카가 시키는 대로 베드포드 성으로 들어갔다. 그의 직업은 집사였다. 베드포드 성은 마침 새로운 집사를 구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안으로 스며들 수 있었다.
넬슨은 천천히 안주머니에서 작은 칼과 함께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사진 속에는 15살쯤 되었을까? 막 어린 티를 벗어나기 시작한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에이미. 내 딸아.”
넬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한 손에는 에이미의 사진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꼭 쥐었다.
최악의 순간을 대비하여 그는 늘 칼을 품고 다녔다. 에이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이후부터 그는 삶을 포기했다. 그저 복수를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진작 죽여 버릴 것을.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그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을 그냥 죽여 버리는 건데.
마음 약했던 지난날을 아무리 후회해봤자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죽은 것보다 못한 삶을 산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자신의 딸 에이미는 죽고 없지만 그녀는 살아서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행복에 겨워 웃었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모든 것을 누리며 살겠지….
왕비의 지시가 없어도 여자를 처리해야 했다. 불쌍하다고 여긴 것이 실수였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에이미에게 꼭 악녀 에리스의 딸 레오니의 목숨을 바치리라!
환하게 웃고 있는 딸의 사진을 움켜쥐고 넬슨은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