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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75화 (75/116)

75화. 다가오는 위험

라이언과 리아가 왕궁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 20일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제시카는 불안했다. 그녀는 힘이 없는 왕비였다. 아들을 낳지 못한 왕비의 끝은 늘 그랬다. 그나마 아버지인 바벨로프 공작 덕분에 후궁을 들이지 않고 버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자신의 궁에 혼자 남은 제시카는 수치심과 분노를 견뎌내기 위해 주먹을 틀어쥐었다. 오늘은 정해진 합방일이었다. 그녀는 자존심을 버리고 던컨에게 와 줄 것을 청했지만, 그는 늘 그렇듯 두통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던컨과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제시카는 자꾸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그녀는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누구라도 실수로 그녀를 건드린다면 차오른 독기가 넘쳐 흐를지도 모른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던컨과 제시카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서로를 이해했고 아꼈다. 어쩌면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제시카가 첫 아이를 낳고 난 이후일 것이다.

결혼 7년 만에 한 임신이었다. 얼마나 설레하며 출산일을 기다렸던가. 제시카는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라고 믿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징조가 배 속의 아이가 아들임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난산 끝에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제시카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딸이라는 말에 크게 실망했다. 던컨은 상관없다며 아이는 또 낳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위로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모성애는 애초에 없었고 몸을 회복하자마자 또다시 아이 갖기에 매진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던컨은 딸을 사랑했다.

앤 릴리안 엘리시아.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딸에게 붙여 줄 정도로 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한 아이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안아 주지 않는 제시카를 이해하지 못했다.

던컨의 눈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제시카의 탐욕스러움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입지를 다져 줄 아들을 낳으려고 혈안이 된 듯한 모습.

그는 제시카에게 자신이 그저 임신을 시켜 줄 종마의 역할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던컨의 마음은 제시카에게 조금씩 멀어졌다.

“다 그 저주받은 계집 탓이야.”

제시카는 처음부터 레오니를 싫어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몰골을 하고 꼴에 공주라고 왕궁에서 버티고 있는 것도 보기 싫었고 악녀 에리스의 딸이라는 사실은 더 치가 떨렸다.

그녀는 모든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레오니 탓을 했다.

딸을 낳았을 때도, 임신에 번번이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던컨의 마음이 멀어진 이유도 그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원망할 무언가가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으니까.

“진작 죽었어야 했어.”

다시 돌아온다니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더러운 몸뚱이를 다시 들이민단 말인가!

그녀의 왕궁은 지금처럼 완벽하게 깨끗해야만 하다. 오점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확실히 처리해야 했다. 지금까지처럼 어설픈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베드포드 공작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고 했다. 그녀가 전해 들은 바도 그러했고.

더군다나 지난번 어설픈 살해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로 경계가 삼엄해졌다.

“미련한 놈.”

불쌍한 놈 데려다가 직업도 주고 돈도 주고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어 줬으면 적어도 실망은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땐 어쩔 수 없이 그도 끝이었다.

만약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다 해도 꼬리만 잘라 버리면 그만이었다. 모든 책임은 그놈이 지게 될 것이니.

앤의 생일까지 남은 시간은 20일.

그 전에 모든 일이 마무리될 것이다. 왕궁은 지금처럼 앞으로도 평온할 것이고 평온해야만 했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 예정이었다.

***

매튜는 베드포드 성에 다녀오면서 메리의 동생 댄을 데려왔다. 그리고 금발의 오만한 하녀 데이지까지.

메리는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그건 불가능했다. 사업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매튜는 계속 베드포드 성에 머물러 있기 어려우므로 그곳을 지킬 사람은 메리뿐이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반년은 족히 걸릴 일이기에 리아에게는 새로운 시녀가 필요했다.

그래도 데이지라니.

리아는 그녀가 맘에 들지 않았다. 첫 만남부터가 별로였고 레오니에게 음식을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까지 더하면 좋아할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다.

툭하면 라이언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도 한몫했다. 다들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지만 리아는 확신했다. 저 망할 시녀가 분명 라이언을 노린다는 것을.

물론 베드포드에 남아 있는 하녀장 휴즈 부인은 데이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할 테니 그녀를 보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데이지는 원래가 메리보다 먼저 공작부인을 모시던 시녀였고 리아가 깨어난 이후 메리에게 시중을 부탁하면서부터 그 자리에서 밀려난 것이니까.

하인들의 계급을 따지자면 가장 맨 위에는 집사가 있었고 그 바로 밑이 하녀장이다. 그리고 그다음이 공작과 공작부인을 모시는 시종과 시녀였다.

데이지 입장에서는 갑자기 자리에서 밀려난 셈이니 자신이 한 잘못은 생각지 못하고 억울하다고만 했을 것이 뻔했다.

리아는 데이지가 자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 매튜를 따라 이든로즈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녀를 돌려보낼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회였다. 미뤄왔던 레오니의 복수를 할 기회! 오만한 콧대를 꺾어 주고야 말겠어.

당사자만 느끼도록 교묘하게 괴롭히는 것쯤이야 리아에게는 별것도 아니었다. 악녀 역할이야 수십 번도 더 해 봤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더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리아는 전의를 불태웠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라이언이 침실로 들어왔다.

“일 다 했어요?”

“왜 아직 안 잤지?”

“맨날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요. 공작 정도 되면 좀 놀고먹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리아가 라이언을 향해 투덜거리자 그는 웃으며 그녀에게 걸어갔다.

“놀고먹으면서 어떻게 아름다운 아내를 건사할 수가 있겠소. 당신이 마음껏 수표장을 쓸 수 있도록 내가 열심히 일해야지.”

놀고먹어도 될 만큼 충분히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라이언의 업무가 많은 것은 재산 때문은 아니었다. 재정을 관리하는 것은 매튜였다. 대부분의 일은 매튜가 도맡아 처리하지만 그 외에 기사단에 대한 일 만큼은 라이언 본인이 직접 관리했다.

“그럼 더 열심히 일하세요. 세상은 넓고 돈 쓸 곳은 많으니까.”

“알겠소. 당신을 위해서 내가 더 노력하리다.”

라이언은 천천히 옷을 벗으면서도 리아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작은 등불 아래 머리를 등 뒤로 풀어놓고 하늘거리는 잠옷을 입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아주 영특하더군.”

“누구? 아… 댄이요?”

“그래. 당신이 보낸 내 종자 말이오.”

“메리의 동생이에요.”

댄이 영특하다는 소리에 리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가 봐도 그 아이는 작고 똘똘했다. 메리의 막냇동생인 댄은 이제 막 13살이 되었고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알고 있소. 무척이나 씩씩하고 활기가 넘치더군.”

“검은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래요.”

“검은 기사단이 되려면 아주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했더니 잔뜩 겁먹은 얼굴로 다 견뎌내겠다고 하더군.”

“메리의 가족들을 도와줄 수 있어서 기뻐요.”

“나도 당신이 기뻐하니 기분이 좋소.”

라이언은 침대 발치로 다가가서 다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먼저 자겠다며 그보다 한참 일찍 침실에 올라간 리아였다. 당연히 잠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올라왔는데 잠은커녕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모습에 라이언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냥 잠이 오질 않아요.”

침대에 오르는 라이언을 위해 이불 한쪽을 들어 주며 리아가 답했다.

“내가 없어서 못 잤군.”

리아가 옆에 똑같이 기대앉은 라이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투덜댔다.

“시간이 너무 안 가요. 우리 언제 출발하죠?”

“글쎄, 한 이 주 뒤?

가는 시간까지 따진다면 그때가 적당했다.

“꼭 오라는 때에 맞춰 가야 하나요?”

“먼저 갈 수는 있소. 그렇지만 왕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라이언이 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그의 가슴 쪽으로 미끄러졌다.

자세는 더 편안해지고 더 포근해졌다.

“참 까다롭네요.”

“왕성에 먼저 가고 싶다면 갈 수는 있어. 귀족이라면 누구나 성안에 들어갈 수는 있지. 하지만 거기가 끝이야. 왕이 머무는 샤르트 궁은 왕과 왕비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출입할 수가 있다오.”

“복잡도 하네. 그냥 가서 기다릴까요?”

“만약 왕이 그 전에 당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면 나쁜 소문만 돌 것이 뻔해. 버림받은 공주 어쩌고 하는 가십 기사에 힘을 실어주기밖에 더하겠소?”

“만나줄 수도 있잖아요.”

“그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으니 왕이 말한 일정에 맞춰 가는 게 좋아.”

라이언은 투덜대는 리아가 귀엽다는 듯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이 시각이 그에게는 가장 평온한 순간이었다.

잠들기 전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일상이 그에게는 특별하고 신기했다.

“무척이나 아쉽군.”

“응? 뭐가요?”

머리를 쓰다듬는 라이언의 손길에 기분이 좋아 눈을 살며시 감으며 리아가 물었다.

“왜 그날은 관계를 맺으면 안 되는 거지?”

“네?”

순간 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그녀가 부끄러움이 없다지만 그래도 남자에게 이런 직설적인 말을 듣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그 상대가 라이언이기에 더욱더.

그는 점점 더 솔직해지고 대담해졌다. 애정표현도 과감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특히나 밤마다 그녀를 그냥 두질 않았는데 한 달에 한 번 그녀에게 그날이 찾아오면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껴안고 자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점점 뻔뻔해지는 거 알고 있죠?”

“솔직한 게 뻔뻔한 건가? 난 당신이 솔직하게 말해 주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노골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리아는 어느새 가슴에서 치근덕거리는 라이언의 손을 톡 하고 쳐냈다. 아무튼, 엉큼하다니까.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아주 술술 이야. 술술.

“부부 사이에 못 할 말이 어딨겠소.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뜸을 들이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되물었다.

“그런데 뭐요?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어째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지? 부부관계를 맺으면 바로 아이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우린 거의 매일 하다시피….”

“라이언!”

리아가 라이언의 옆구리를 꼬집자 그가 아픈지 몸을 비틀었다.

“읔. 왜 그러지? 또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닌데… 아이가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얼마나 더 노력해야 생기는 거지?”

리아는 아는 성교육 지식을 총동원해 라이언을 가르치려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무조건 임신이 되는 건 아니라고, 정자와 난자가 배란일에 만나서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까지 구구절절 전부 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조금 놀려주고 싶기도 했고.

“당신이 날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가 보죠.”

“내가?”

“네. 당신이요. 몰랐어요? 남자가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해야지만 아기씨가 나와서 임신이 되는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시오. 내가 그 말에 속을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아.”

“진짠데.”

라이언이 임신이나 출산에 관련해서 교육을 받았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보통의 남자들처럼 여자와 관계를 맺으면 임신이란 것을 하게 되고 그럼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만 알고 있을 것이다.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정말요?”

“믿지 못하겠소?”

“사실 뭐 사랑은 눈에 보이는 건 아니니까.”

라이언의 마음을 다 알면서 리아가 그를 놀렸다.

“또 당신에게 사랑 고백을 해야 하나?”

“전처럼 선물을 수도 없이 주려고요?”

“그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지.”

리아가 갑자기 고개를 마구 가로 저었다.

“혹시….”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겠어.”

“설마….”

“사랑 고백에는 그게 최고가 아닌가. 내일 매튜에게 그들을 다시 불러오라고 해야겠군.”

리아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음유시인과 화가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단 말이야.

“이제 알겠네요. 당신은 날 진짜 사랑해요.”

“그럼 금방 아이가 생기겠군.”

“뭐 생길 때가 되면 생기겠죠.”

“오늘 밤은 어떻소?”

라이언이 리아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이불 속으로 잡아당기자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댔다.

“큽…크흐흐… 아 그만 해요… 오늘은 안 된다니까. 남자가 절제를 몰라.”

“난 원래 그런 건 몰라.”

그는 리아를 끌어안으며 뒹굴었다. 한동안 공작 부부의 침실에서는 엎치락뒤치락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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