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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74화 (74/116)

74화. 왕의 서신

르셀- 왕의 여름 궁전

엘리시아의 국왕 던컨은 베드포드 공작 라이언이 보내온 서신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는 중이었다.

“아내와 함께 궁을 방문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

라이언에게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하라며 돌려보낸 지 몇 달. 요즘 렌포드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매우 던컨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서신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신문을 들어 올렸다.

지금 렌포드는 공작 부부의 파격적인 행보로 난리가 났다며 한껏 과장해서 써 놓은 기사였다. 물론 그 내용도 흥미롭긴 했지만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기사 맨 밑에 실린 공작부인의 얼굴이었다.

“여자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던컨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의붓동생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흑백으로 인쇄된 그림이기에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얼핏 보아도 전혀 다른 사람인 수준이다.

다만 쓰여 있는 것처럼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에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가 확실하다면 그녀는 레오니가 맞았다.

레오니 엘리시아. 그와 함께 선왕의 피를 이어받은 의붓동생. 그녀는 부인할 수 없는 왕실의 핏줄이었다.

현재 엘리시아 왕국은 선혈이라고 불리는 직계 손이 몇 없었다. 선혈을 증명하는 황금 눈동자를 가진 이는 던컨과 그의 딸 앤 그리고 버림받은 공주 레오니가 유일했다.

왕실의 힘이 약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주변에 의해 흔들리기 쉽다는 말과도 같았다. 특히 던컨은 더 그랬다. 그는 힘을 보태 줄 만한 외가도 없었고 믿을만한 친우도 없었다.

대신들은 온통 재상 바벨로프 공작의 편이었고 왕비인 제시카도 마찬가지였다. 바벨로프 공작의 막내딸이 바로 제시카였으므로.

만약 던컨이 기댈 곳을 찾는다면 가장 확률이 높은 쪽은 베드포드 공작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충직하고 명예를 알았으며 힘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욕심이 없었다.

지금 던컨에게는 힘을 보태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베드포드 공작을 궁으로 부르는 것이 무모한 모험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전하!”

그때 인기척도 없이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왕비 제시카가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들이닥쳤다. 그 뒤를 시종 한스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따라 들어왔다.

던컨은 존을 향해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왕비. 갑자기 무슨 일이지?”

“제가 잘못 들은 것이라고 해 주세요.”

던컨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제시카는 점점 낯선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순수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왕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뭘 말이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군.”

“베드포드 공작. 그를 부르셨다면서요?”

“아하, 그거 말이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부른 것은 아니지.”

“자꾸 말을 돌리실 건가요? 정말 요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직도 머리가 아프세요?”

제시카가 이마 위로 손을 올려놓으려 하자 던컨이 고개를 흔들며 손길을 피했다.

“오늘은 아프지 않군.”

“전하!”

“라이언이 아내와 함께 날 보러 오겠다는군. 참으로 충직한 신하가 아닌가? 그렇지 않소?”

제시카는 던컨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최근 들어 그는 이상해졌다. 아니, 최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해진 것은 몇 달 전 라이언이 방문했을 때부터였다.

제시카는 라이언이 3년 동안 공주를 혼자 내버려 두다시피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아무리 첫날밤을 치르지 않았다고 해도 왕의 명으로 치른 결혼식이었으니 무효로 만들기는 어려웠다.

이제 베드포드 공작이 그토록 애타게 찾는 검을 주고 그와의 인연을 끊어내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라이언은 정치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고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갈 사람이었다.

형식적인 혼인 관계로 옭아매어 놓기만 하면 앞으로도 쭉 그는 왕실에 충성할 것이다.

왕실은 라이언이 필요했다. 바로 말하자면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가 있어야 했다. 당장만 해도 주변 여러 나라에서 엘리시아를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는 이유는 반 이상이 베드포드 공작인 검은 사자 탓이었다.

제시카는 공작과 공주가 결혼식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공주를 감시했다. 3년 동안 레오니는 세상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었고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상태였다.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제시카는 던컨에게 라이언이 찾아오면 약속대로 검을 내어주라고 했다. 그녀가 잠시 친정을 방문하는 사이 라이언은 찾아왔고 던컨은 검을 내어주지 않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던컨은 라이언에게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할 것을 명했다.

아이를 낳으면 검을 주겠다고? 던컨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는 없었다.

제시카는 그런 던컨에게 분노했다. 어째서 말을 듣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직접 나서서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을 만들다니.

그래도 핏줄이라고 공주가 안타까웠을까? 제시카는 던컨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마음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불길했다. 불길함은 예감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 뒤 레오니가 달라졌으니.

라이언은 던컨의 말에 따라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갔고 레오니는 변했다.

레오니 엘리시아 베드포드.

그녀는 완벽하게 달라졌다. 매일같이 제시카에게는 레오니에 대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녀가 렌포드로 거처를 옮겨간 이후로는 더 했다. 온갖 가십이 난무했고 기사가 넘쳐났다.

들려오는 소문 중 대부분이 공작부인은 총명하고 유쾌하며 아름답고, 공작은 그런 자신의 아내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살다가 죽을 것이지. 제시카는 레오니를 생각하며 이를 바득 갈았다.

사교계의 꽃이라고? 엘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거기다 이제는 왕궁을 방문하고 싶다며 서신까지 보내왔다.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심지어 바보 같은 던컨은 벌써 그들의 방문을 허락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검을 돌려주지 않고 황당한 조건을 내건 던컨 탓이었다.

이러다 레오니가 정말 임신이라도 한다면? 아들을 낳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제시카는 첫딸 앤을 낳은 이후 지금까지 임신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왕비는 소용없는 존재였다. 더군다나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왕비라면 더더욱 말이다.

엘리시아 왕실의 법도에 따르면 왕비가 결혼 후 10년 동안 왕자를 낳지 못하면 공식적인 후궁을 들일 수가 있었다.

올해로 제시카는 왕비가 된 지 딱 10년째였다.

벌써 몇몇 대신들이 후궁을 들여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엘리시아의 재상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바벨로프 공작이 그들을 막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국왕 던컨이 후계자에 대해 아직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급해하는 제시카에게 그는 늘 우린 아직 젊다며 서두르지 말자고 했다.

그렇지만 자신에 대한 던컨의 사랑이 이미 식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수많은 노력에도 임신은 되지 않았고 이제는 임신을 위해 관계를 청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어째서 그들의 방문을 허락하신 거죠?”

“거절할 명분은 뭐지?”

“전 공주가 싫어요.”

“그녀는 달라졌다오. 여기 신문을 보지 못하였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더군.”

제시카는 던컨이 내민 신문을 노려보았다. 그녀도 이미 본 내용이었다. 엘리시아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인이라니. 레오니는 그저 악녀 에리스의 저주받은 딸일 뿐이라고!

“그래서 더 문제라는 걸 정녕 모르시는 거예요?”

“그녀가 변한 것이 문제가 되는가?”

던컨이 모른척하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검을 줘 버리라고 했잖아요. 이 모든 것은 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는 말이오?”

“그녀가 누구의 딸인지 잘 아시잖아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시오. 레오니는 선왕이신 벨로트 에드거 3세의 딸이자 나 던컨 에드거 4세의 동생이오.”

던컨은 레오니의 친모 에리스를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제시카는 그 점을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리스는 그토록 혐오하면서 어째서 그녀의 딸 레오니를 그냥 두는 것인지를. 궁에서 함께 사는 동안 전혀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 왜 이러는 것일까!

제시카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던컨과 사이가 더 멀어져서 좋을 것은 없었다. 이미 그들을 왕궁으로 불렀고 그 사실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알겠어요. 전하의 뜻이 이토록 확고하시니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공작 부부를 맞이할 준비를 하겠어요.”

그녀는 공작 부부가 언제 성을 방문하는지를 물었다.

“우리 앤의 생일에 맞춰 그를 불렀다오.”

앤의 생일이라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제시카는 마음이 급해졌다. 앞으로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참 전하. 오늘 제 침소에 드실 거죠?”

갑자기 다정해진 말투로 제시카가 손을 뻗어 던컨의 어깨를 문질렀다. 그 작은 접촉에도 던컨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군. 그만 나가주겠소? 좀 쉬어야겠어.”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던컨이 눈을 감았다. 명백한 거절의 동작이었다. 제시카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견뎌야 했다. 왕비의 자리를 지키고 영원히 지금처럼 엘리시아를 바벨로프 집안이 좌지우지하기 위해서는 그를 유혹해 아들을 낳아야만 했다.

치욕적일지라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

라이언은 매튜에게 왕의 서신을 받아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답장이 도착했다.

“지금 밖에 왕의 신하가 각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답변까지 받아오라고 했다?”

그는 곧바로 왕의 서신이 담긴 봉투를 열었다. 리아는 그런 라이언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라이언이 마구 고개를 들이미는 리아를 쳐다보자 그녀가 입을 삐죽이며 변명을 했다.

“왜요? 나도 궁금해서 그래요. 어서 펼쳐 봐요.”

리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왕은 뭐라고 서신을 보내왔을까? 방문을 허락했을까?

“다음 달 15일 내 딸 앤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샤르트 궁에서 열린다오. 베드포드 공작과 그의 부인 레오니는 친히 방문하여 공주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를 바라오.”

라이언은 왕의 서신을 소리 내 읽었다.

“우리보고 오라는 거죠?”

“그런 것 같군.”

“다음 달 15일? 그럼 얼마나 남은 거죠?”

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세려 하자 매튜가 빠르게 대답했다.

“딱 20일 남았습니다.”

“뭐야. 왜 이렇게 많이 남았어. 그냥 당장 가면 안 돼요?”

“안타깝게도 부인 그건 안 됩니다. 왕께서 말씀하셨으니 그 말에 따라야 합니다.”

“와, 진짜 너무하네. 친정방문도 맘대로 못해? 가서 뭐라고 좀 해야겠어요.”

리아의 투덜거림에 라이언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매튜, 나가서 왕의 말씀에 따르겠다고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각하의 말씀을 전하고 잘 대접한 이후 그를 보내겠습니다.”

매튜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라이언은 여전히 입술을 삐죽대고 있는 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지?”

“너무 늦잖아요. 그냥 바로 오라고 하면 큰일이라도 나나.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이러다가 왕이 맘이라도 바꾸면 어떻게 해요. 그냥 서신이고 뭐고 확 밀고 들어갔어야 했어요.”

“왕은 말을 바꾸지 않소.”

라이언의 말에 리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바꾸지 않기는 개뿔.

“안 바꾸긴 뭘 안 바꿔요. 당신한테 검 준다고 하고 안 줬잖아. 그것부터가 완전 변덕쟁이인 거 딱 티 나는데.”

리아의 말에 라이언은 간신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투덜대는 리아가 너무 귀여웠다. 사랑스러웠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마.”

“느낌이 별로란 말이에요. 그냥 당장 가면 안 될까요?”

라이언이 리아의 얼굴을 감싸며 그녀를 가까이 잡아끌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나를 믿으시오.”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매튜의 등장으로 아쉽게도 그만뒀던 일을 다시 끝까지 끝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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