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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69화 (69/116)

69화. 퍼즐의 한 조각

“계속 이렇게 앉아만 있을 건가요?”

말없이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페넬로페를 향해 리아가 물었다. 무슨 소문을 들었기에 저렇게 당당한 거지? 그녀가 할 말이 궁금했다.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뭐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이니. 우선 들어나 보자고.

“궁금해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에요.”

“후회하더라도 내가 하는 거니까 뭐 거기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어요. 뜸 들이지 말고 그만 이야기해요.”

리아가 카페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메리가 고개를 쭉 내밀고 안을 살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푸들 강아지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났다.

리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메리를 향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페넬로페는 마치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 페넬로페는 이를 바득 갈았다.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 얄미웠다. 망쳐버리고 싶었다.

“오라버니께서 당신과 왜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뭐 별것 있나요. 정략결혼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닌가요?”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결혼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요?”

리아는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원하는 거야 당연히 있겠죠. 우선 나와 결혼을 하면서 왕실의 가족이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이득 아닌가요? 그리고 또 결혼경험이 있으시니 편하게 이야기할게요. 라이언은 후계자를 원해요. 남자들이 다 그렇잖아요.”

“역시. 그렇게 알고 있군요.”

페넬로페의 표정이 묘했다. 지금까지는 리아도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좋아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니.

“시작이 어땠는지가 중요한가요. 지금 현재가 중요한 거지.”

리아가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는 표정을 듬뿍 담아서 말했다.

“물론이죠. 중요한 건 지금이죠.”

“사랑 없이 결혼했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으니 별로 놀랄 일은 아니네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했나요? 너무 늦으면 라이언이 걱정해서요.”

리아가 시간을 확인하려는 듯 주변을 살피자 페넬로페가 금방 리아가 했던 그대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싱긋 웃었다.

“이제 시작해 보려고요. 후계자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후계자가 필요한 이유? 그거야 남자라면 누구나 핏줄을 잇고 싶어 하는 본능 아닌가?

“후계자가 필요한 이유가 따로 있나요? 당연한 본능 아닌가요?”

“보통이 그렇겠지만, 라이언 오라버니는 아닐걸요. 후계자가 꼭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던 걸요.”

“그 이유가 당신이 들었다는 흥미로운 소문인가요?”

“뭐 그럴지도.”

페넬로페는 리아를 놀리듯 말을 멈추고는 여유를 부렸다. 리아는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애써 궁금함을 참아내며 기다렸다. 그녀가 궁금해할수록 페넬로페의 심술은 더 깊어질 것을 알기에.

“듣자 하니 거래를 했다더군요.”

페넬로페가 입을 열었다.

“당신과 결혼을 해 주는 대가로 왕께서 오라버니께 무언가를 하사하기로 약속하셨답니다. 주시기로 하신 그 물건이 라이언 오라버니께는 무척이나 귀한 것이라 거절도 못 하고 결혼을 받아들이셨다지요.”

“그래서요? 뭐 어차피 정략결혼인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결혼선물로 그런 것쯤은 받을 수도 있는 거죠.”

페넬로페는 안타깝다는 듯 리아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물건을 아직 받지 못했으니 문제죠.”

“못 받아요? 결혼했는데 왜 못 받았죠?”

리아는 결국 페넬로페에게 대놓고 물어보고 말았다. 도저히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혼할 때 왕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하사받았다고는 들었다.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고?

“원래 오라버니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으신 분이었는데 왕께서 제안하신 물건이 너무 탐이나 당신과 결혼을 한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왕께서 약속을 어기시고 그 물건을 주지 않으셨다더군요. 형식적인 결혼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아이를 낳아오면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셨다죠.”

“아이를 낳아오면 약속을 지키겠다?”

“그동안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던 오라버니가 갑자기 당신을 찾아가서 잘 대해 주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이제 알겠죠? 당신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후계자를 얻기 위해 연기하는 거란 걸.”

리아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퍼즐을 맞췄다. 그래 갑자기 찾아와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했던 이유가 그거였어? 왕이 약속한 대로 원하는 물건을 주지 않아서? 애를 낳아오라고 해서?

“충격이 큰가요? 어머… 설마? 혹시 오라버니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전 그 사실을 듣고 나니 오라버니가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억지로 사랑하는 척을 해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 물건이 뭐죠?”

페넬로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말해 줘야 할까? 그녀도 검이라고 추측을 할 뿐이었다. 그것밖에 라이언이 찾는 물건은 없었다.

“검이요. 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결국, 페넬로페는 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게 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검이라. 알겠어요. 그럼 용건 끝난 거죠?”

리아가 고개를 돌려 창밖에 메리를 향해 손을 흔들자 줄곧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메리가 벌떡 일어나 안으로 빠르게 달려 들어왔다.

“뭐, 뭐야. 더 할 말 없어요?”

“할 말? 뭐요?”

“오라버니가 당신을 사랑한 게 아니라 연기한 거라니까요! 원하는 게 있어서 당신을 이용했다고!”

“네. 알았어요.”

태연한 리아의 모습에 페넬로페가 답답한 듯 주먹을 말아쥐고는 성질을 부렸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요?”

“충격 안 받았어요?”

페넬로페가 질문을 던진 순간 메리가 리아의 옆에 와서 섰다. 리아는 메리를 향해 말했다.

“메리, 매튜에게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전해 주렴. 이러다가 해가 지겠어. 그리고 근처에 제임스가 있으면 여기 레스터 부인을 좀 챙기라고 해줘.”

통행금지 시각이 지난 거리에는 주인들을 실어나르는 마차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네 마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차가 준비되면 알려 드릴게요.”

메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리아의 말을 전하기 위해 카페를 빠져나갔다. 메리가 나가자 리아는 다시 페넬로페를 마주 봤다.

“아까 뭐라고 했죠? 충격받았냐고 물었나?”

페넬로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의 태연한 모습에 그녀는 많이 당황한 상태였다. 라이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의 모든 행동이 연기라고 말했는데 어쩌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보아하니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지금 리아의 반응은 페넬로페의 예상을 매우 빗나가고 있었다.

“물론 받았죠. 당신이 의도했던 대로 매우 심하게 충격을 받았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날 놀리는 건가요?”

“설마요. 중요한 정보를 주신 분을 놀리다니요. 감사하죠.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장난치는 건가요? 어찌할 거죠? 라이언 오라버니가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용한 것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평온한 표정이었던 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녀는 페넬로페를 향해 매서운 눈초리를 했다.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군요. 우리 부부의 사적인 일까지 말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무슨 일이지? 페넬로페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그때 마침 카페로 돌아온 제임스가 분위기를 살피며 페넬로페의 말을 끊고 되물었다.

“왔어요? 전 그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여기 동생분을 좀 챙겨 주세요.”

리아는 다시 싱긋 웃으며 제임스를 쳐다봤다.

“레이디 레오니.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죠? 혹시 페넬로페가 실수하거나 당신을 불쾌하게 만든 것은 아니겠죠?”

“무슨 그런 말씀을. 그녀는 제게 무척이나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답니다.”

“중요한 정보?”

“그건 동생분께 물어보세요. 제가 지금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요.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리아가 정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연기를 했다. 그 모습이 연기인 게 어찌나 티가 나는지 제임스는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상한 리아의 행동에 제임스가 페넬로페를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손수건을 찾아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페넬로페가 자신을 쫓아낼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기는 했다. 리아가 아무리 괜찮다고 나가보라고 눈치를 줬어도 모른 척 그냥 앉아 있어야 했는데.

제임스는 리아를 믿었기에 그녀가 페넬로페를 잘 상대할 것이라고 여겼다. 여전히 라이언을 두고 헛꿈을 꾸는 페넬로페를 향해 리아가 쓴소리를 해 줬으면 싶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리아는 웃는 얼굴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너무 일치되지 않는 모습에 제임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간 걸까?

“마님. 마차가 준비되었어요.”

“여러분. 전 먼저 가보겠어요. 레스터 부인 오늘 고마웠어요. 제 마음속에 충격이 가시고 나면 그때 다시 감사 인사를 드리지요.”

작별인사를 건넨 리아가 카페를 빠져나가자 페넬로페가 그런 리아를 따라나서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제임스는 재빨리 페넬로페의 팔을 잡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리아의 마지막 표정은 더는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듯 단호해 보였다. 웃고 있었지만, 그저 웃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 미소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마치 따라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왜 이래요!”

페넬로페가 팔을 빼어내려고 난리를 쳤다. 제임스는 리아가 카페를 나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오라버니 미쳤어요? 어디다 힘을 쓰는 거야!”

“무슨 이야기를 했지?”

“몰라요.”

“무슨 충격을 받았다는 거지?”

페넬로페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제임스에게 잡혔던 팔을 마구 문질렀다.

“오라버니는 눈 없어요? 지금 저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보여요? 가뜩이나 열이 받아 죽겠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

서로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눈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제임스는 페넬로페를 다시 잡아끌었다.

“가자.”

“아프다고요! 그렇게 잡아끌지 않아도 갈 테니 그냥 좀 둬요.”

페넬로페는 성질을 부리며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 뒤로 한숨이 가득한 제임스가 뒤따랐다. 정말 골치 아픈 동생이었다. 감당이 안 될 만큼.

***

“마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세요?”

마차에 올라탄 이후 눈을 감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리아를 향해 메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아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좀 피곤하네. 도착할 때까지 쉬고 싶어.”

메리는 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리아는 매우 불편했다. 몸도 마음도 전부.

충격을 받았다고 한 말은 진실이었다. 페넬로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돌아섰지만, 속이 탔다. 화가 났다. 정말일까? 라이언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모습은 연기였을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랑에 빠진 척했던 것일까?

처음에는 화가 났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하고 두려워졌다. 진짜 그의 모든 행동이 연기일까 봐. 거짓일까 봐. 겁이 났다.

서서히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함께하는 동안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옮겨왔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연기라고? 설마 그럴 리가.

페넬로페로 인해 지금까지 의문이었던 퍼즐의 한 조각을 찾았다. 갑자기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찾아왔을 때 그 말을 다 믿은 것은 아니었다.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은 했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하면 할수록. 그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수록.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의 사랑이 진실하다면 그 이유가 뭐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전부 거짓이라면?

아이를 낳아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에 사랑하는 척을 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검이라.”

“네?”

갑자기 말을 내뱉은 리아 때문에 놀란 메리가 움찔했다.

“아니야. 오늘 공작님은 언제 돌아오신다고 하셨지?”

“나가시면서 저녁 식사는 마님과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어요.”

물어봐? 아니면 모른 척 행동을 지켜봐? 리아의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물어봐서 그게 진짜라면? 사랑이 아닌 연기였다면 그럼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이언을 향한 마음이 쉽게 정리가 될까? 그냥 모른 척하면서 그의 옆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있는 게 좋은 걸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찾아야 할까?

페넬로페의 말이 모두 진실이고 그가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면. 그는 모두 버려두고 떠나갈까?

마차가 저택에 도착하고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리아의 머릿속 의문은 끝이 나지 않고 있었다. 무엇하나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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