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페넬로페의 습격
필요한 재료를 주문하고 살펴보기만 했는데 시간이 훌쩍 지났다. 리아와 함께 다니는 매튜와 메리는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화려한 언변과 눈썰미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는 리아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평생을 왕궁에서만 살아온 공주가 그런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감탄스러웠다.
비누를 만들 줄 안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말로 들었을 때보다 직접 눈으로 보고나니 더 존경심이 들었다. 주저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없는 것도 만들어 내게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대단했다.
상인들은 모두 리아에게 홀린 듯 그녀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
“어느 정도요?”
짧은 시간 동안 방문한 상점이 십여 곳이었고 사들인 물건과 주문한 물건도 상당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라니.
“매튜. 사업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우선은 시험제작을 위한 구매는 끝이 났고 별문제 없이 제품이 나오면 이제 대량으로 주문하던가 우리 성에서 직접 제작을 해야 해요.”
리아의 말을 들으며 매튜가 고개를 끄덕댔다. 사실 제대로 제품이 나올지 만들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고 앞날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전부 맞는 말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부인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매튜가 정중하게 답을 하자 리아는 웰우드 지도를 꺼내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수제화 샵이 있구나. 우선 거기에 가야겠어. 리아의 머릿속에 빠르게 쇼핑계획이 세워졌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쇼핑을 시작해 볼까요?”
“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은 아직 하나도 못 샀는데. 그나저나 제임스는 왜 이렇게 오지 않는 거죠? 벌써 약속 시각이 지나지 않았나요?”
리아가 상점 거리를 쭉 둘러보더니 기울어져 가는 해를 쳐다봤다. 그러자 매튜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실 시간이 지났는데…. 어! 저기! 마침 오시는군요.”
매튜가 반가워하며 반대편을 향해 손짓하자 리아와 메리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제임스가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고 그 뒤로….
“페넬로페?”
제임스의 뒤편에 시녀를 옆에 두고 뛰듯이 걸어오는 여자는 분명 페넬로페였다.
“마님, 저분은 레스터 백작 부인 아니신가요?”
메리가 리아보다 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드레스를 부여잡고 뛰는 모습이라니.
“딱 보니 억지로 따라온 모양이야.”
도망치는 제임스와 그 뒤를 쫓는 페넬로페. 제임스의 난감한 표정을 보니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레이디 레오니.”
제임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리아의 앞에 섰다.
“늦으셨네요.”
리아는 제임스의 뒤편에서 여전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빠르게 걸어오는 페넬로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어쩌다 보니.”
“혹을 달고 오셨네요. 어차피 이렇게 될걸. 그냥 같이 오시지 왜 힘들게 달려오셨어요.”
“당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따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아서 이렇게 늦었습니다.”
“괜찮아요. 반가운 혹은 아니지만 이제 와 어쩌겠어요.”
리아가 제임스를 지나쳐 페넬로페가 오는 쪽으로 다가갔다.
“레스터 부인. 뛰지 마세요.”
리아의 말에 페넬로페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치마를 내려놨다.
“또 뵙네요.”
“그러게요. 뭘 그렇게 뛰어오셨어요. 힘들게.”
페넬로페는 리아의 뒤쪽에 서 있는 제임스를 째려봤다.
“누굴 만나러 그렇게 가시는가 했더니. 역시 제 예상이 맞았군요? 오라버니 정말 너무하세요. 동생은 챙기지도 않고.”
“우리가 언제 함께 쇼핑하러 다니는 사이였니? 지금까지처럼 각자 열심히 살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제임스가 분통이 터지는 목소리를 냈다. 따돌려도 자꾸만 따라붙는 페넬로페 덕에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결국은 떼어놓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남은 가족이라고는 오라버니가 전부인데 자꾸 그럴 거예요?”
페넬로페의 계속되는 투정에 제임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친한 남매가 아니었다. 서로 맞지 않음을 진작부터 알았기에 그냥 멀리서 서로 잘 사는지만 지켜보는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서 나가지도 않는 것으로도 부족해 가는 곳곳마다 따라붙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물론 그래도 핏줄이라고 내치지 못하는 제임스의 우유부단함도 한몫하긴 했지만.
“그래서 여기까지 왜 따라온 거냐. 내가 너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지금 네 나이가 몇인데 이러는 거야.”
“제임스 그만 해요. 레스터 부인도 생각이 다 있겠죠.”
리아가 레스터 부인이라는 말에 힘을 주자 페넬로페의 미간이 표시 나게 일그러졌다.
“생각은 무슨 생각입니까. 내가 민망해서 정말.”
“아니, 오라버니가 왜 민망하다는 거예요? 나도 여기 쇼핑하러 온 거예요. 그럼 안 되나요?”
페넬로페가 팔짱을 끼며 말하자 따라온 그녀의 시녀가 부채질을 마구 했다. 그러자 메리 역시 티가 나게 리아의 드레스를 정돈했다. 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에 신경전.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음을 알기에 리아는 메리를 그냥 내버려 뒀다.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니.
“그럼 가서 쇼핑해. 말리지 않을 테니.”
“오라버니랑 함께 다니면 안 되는 건가요? 동생은 모른 척하고 다른 사람이랑 함께 다닌다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나요?”
제임스가 아무리 뭐라고 한다 해도 따라올 작정인 듯 보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페넬로페의 목표는 그것밖에 없었다. 편하지도 않은 관계인데 도대체 왜 함께 다니려는 건지 통 모르겠지만 쫓아낼 수도 없고 난감해하는 제임스를 보기도 그래서 리아는 페넬로페를 그냥 두기로 했다.
“좋아요. 마침 나도 쇼핑을 하러 나왔는데. 예정에 없던 만남이지만 그래도 함께 가볼까요?”
리아의 허락에 제임스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지르며 페넬로페를 쳐다봤다.
“제발 문제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부탁이다.”
“문제는 무슨 문제. 오라버니나 얌전히 다니세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페넬로페는 드레스 자락을 표시 나게 잡아끌며 제임스에게서 등을 돌려 리아의 뒤를 따라갔다.
불편한 조합의 웰우드 쇼핑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리아는 처음부터 제대로 쇼핑을 하기로 작정을 하고 나온 터라 아끼지 않고 필요한 모든 것을 샀다. 처음 깨어났을 때 메리의 옷을 입고 신세를 졌던 것을 떠올리며 메리의 속옷까지 모조리 다 사들였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줄 물건도 잊지 않고 샀고 심지어 매튜에게 만년필도 선물했다.
수표장을 마구 써 대는 리아를 보며 매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돈을 안 쓰면 오히려 공작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그러니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난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뿐이니.”
무리하는 것은 페넬로페였다. 그녀는 리아가 상점에 들어가 물건을 사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것들을 똑같이 사들였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리아를 따라 했다.
페넬로페가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라이언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쇼핑을 하는 리아와 같을 수는 없었다.
물려받은 유산은 한정적이었고 그 돈을 지금처럼 펑펑 써대다가는 금방 파산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골치가 아픈 건 제임스뿐인 듯했다. 페넬로페가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제어하지 못하고 돈을 써 대는 모습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결국, 그녀가 파산하면 그 뒷감당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페넬로페. 무리하지 말아라.”
보석상으로 들어가는 리아를 따라 들어가려는 페넬로페를 잡으며 제임스가 말하자 페넬로페는 그런 제임스의 손을 탁하고 쳐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니까.”
톡 쏘아붙이고 가버리는 페넬로페를 보며 제임스는 혀를 끌끌 찼다. 뻔히 재정상태를 다 아는데 별것이 아니라니. 분명 저래놓고 땅을 치며 후회를 할 테지.
보석상으로 들어간 리아는 주인에게 회중시계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어느새 따라 들어온 제임스가 리아를 향해 물었다.
“라이언에게 선물하려는 건가요?”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동안 워낙 받기만 해서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받기만 했으니 리아도 라이언에게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뭘 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다가 매튜가 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니 라이언이 가지고 다니는 회중시계가 낡고 투박해 보였던 것이 생각났다.
“회중시계라니. 그러고 보니 그 친구 시계가 낡긴 했죠.”
“제임스도 아는군요. 그럼 하나 물어볼게요. 추억이 깊거나 그런 물건은 아니죠? 그럴까 봐 걱정되었거든요.”
리아의 말을 페넬로페가 받아쳤다.
“당연히 추억이 깊은 물건이죠. 내가 선물한 건데.”
라이언이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 페넬로페가 선물한 시계였다. 그 시계를 라이언이 아직도 가지고 다닌다는 말에 페넬로페는 우쭐해진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그럼 괜찮겠네요. 역시 회중시계가 딱 좋겠어요.”
리아는 페넬로페의 말을 모른척하며 일부러 손뼉을 딱 쳤다. 그런 리아의 행동에 페넬로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괜찮겠다니. 언제까지 그렇게 콧대를 세울 수 있는지… 페넬로페는 이를 바득 갈았다.
회중시계를 보여달라고 주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 주인이 그녀를 안쪽에 있는 별실로 안내하려 하자 리아가 제임스와 페넬로페를 동시에 돌아보며 말했다.
“시계는 혼자 주문을 하고 싶어요.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라이언을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거든요.”
눈치 없이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에둘러 마친 리아는 페넬로페가 대답도 하기 전에 등을 돌렸다.
***
보석상을 나온 리아와 제임스 그리고 페넬로페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공작부인이 카페를 방문하자 웨이터 대신 주인이 직접 달려 나와 주문을 받아갔다.
메리와 매튜는 세 분이 이야기를 나누시라며 페넬로페의 시녀와 함께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않고 카페 밖에 놓인 노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한 다과가 경이로울 정도로 빠르게 그들 앞에 차려졌다. 파이와 케이크를 필두로 초콜릿과 과일 그리고 3종류의 차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제임스가 포크를 집어 들어 케이크를 맛보려고 할 때였다.
“어머! 오라버니 어쩌죠? 손수건을 잃어버렸나 봐요.”
페넬로페의 말에 제임스가 마치 그래서 지금 어쩌라는 거지? 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오라버니가 찾아다 주세요. 지금 당장요. 저한테는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이랍니다.”
손수건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는데 잃어버렸다니. 도대체 무척이나 소중한 손수건이란 어떤 손수건일까?
“뭐라고?”
“어디에 두고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마도 우리가 지금까지 다녀온 상점 중 한 곳에 있을 테죠. 더 오래 지체했다가는 영영 찾지 못할지도 몰라요.”
“네 시녀를 시켜.”
“그런 일로 아랫사람을 부리고 싶지 않아요. 이 복잡한 곳을 그 아이 혼자 돌아다니라고 한다니. 그럴 수는 없죠. 오라버니가 수고 좀 해 주세요.”
딱 봐도 자리 좀 피해달라는 말이었다. 당황한 듯 자신을 쳐다보는 제임스를 향해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분이 부탁하시는데 들어주셔야죠. 전 차를 마시고 있을 테니 어서 다녀오세요.”
제임스까지 따돌리고 할 말이 무엇일까? 리아는 몹시 궁금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가 진짜 쇼핑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닐 거라는 걸 이미 예상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채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리아까지 나서서 다녀오라고 한 이상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는 손수건을 찾기 위해 얼마나 자리를 비워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 제임스에게 리아가 다시 말했다.
“별일이야 있겠어요. 페넬로페와 다정하게 다과를 즐기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무척이나 소중한 손수건이라고 하잖아요.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임스가 마지못해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를 비우자 리아가 싱긋 웃었다.
“할 말이 뭐죠?”
“표시가 났나요?”
“무척이나. 당신 오빠도 분명 알면서 자리를 피해준 거예요. 물론 내가 허락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리아는 페넬로페를 건너다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난밤 파티에서 마주쳤을 때 분명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헤어졌는데 이렇게 바로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다니.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리아는 페넬로페의 꿍꿍이가 뭔지 궁금했다.
“시계는 주문했나요?”
“그럼요. 마음에 쏙 드는 거로 주문했답니다. 라이언이 분명 좋아할 거에요.”
“과연 그럴까요?”
“언제 제임스가 돌아올지 모르니 용건을 말하세요.”
쓸데없는 언쟁을 하고 싶지 않은 리아가 페넬로페를 재촉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다가는 한밤중이 되어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뭐. 물어보시니 말을 하죠. 제가 무척이나 흥미로운 소문을 들어서요.”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듯 눈을 깜빡이는 페넬로페의 모습이 얄미웠다. 리아는 딱 소리가 나게 이마를 쥐어박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사실을 알고 나니 라이언 오라버니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여유롭게 케이크를 먹으려고 포크를 집어 들던 리아가 손짓이 멈췄다. 라이언이 불쌍하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불쌍? 라이언이?”
“그럼요. 불쌍하고말고요. 어째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는지 알게 되었거든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이유? 점점 이야기가 흥미로워지고 있었다.
“무척이나 궁금하네요. 제임스를 내보낸 걸 후회할 일은 없겠군요. 한번 말해 보세요. 그 이유라는 게 무엇인지.”
여전히 당당한 리아의 모습에 페넬로페는 주먹을 꼭 쥐며 분노를 다스렸다. 지금 이 이야기를 다 듣고도 그대로일지 지켜보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싶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아 오고 싶었다.
아니다. 이제 그것도 아니었다. 빼앗아 오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분명 라이언을 사랑하고 있었다. 페넬로페는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직감이었다.
라이언이 보여준 사랑이 그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연기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절망하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페넬로페는 뭐든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