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웰우드
오전 내내 수많은 서신을 쌓아두고 끙끙대고 있는 리아를 향해 메리가 말했다.
“정말 이 많은 걸 전부 답장을 하실 생각이세요? 그것도 마님이 직접요?”
“안 그래도 지금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의 이름을 봤나 봐. 몇 명이나 기억할는지 모르겠어.”
“조금 있으면 매튜님 오실 시간이에요. 이걸 다 답장하다가는 오늘 외출은 못 할 것 같아요.”
리아만큼이나 쇼핑거리를 향한 열망이 가득한 메리의 표정이 울상이었다. 물론 리아는 그런 바보스러운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서신에 답장하느라 외출을 하지 못한다니! 어차피 어느 정도 하다가 매튜가 오면 나갈 생각이었다. 리아의 생각을 모르는 메리만이 혹시라도 못 나가게 될까 봐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가보고 싶어?”
“네?”
“웰우드 말이야. 거긴 안 파는 게 없다며? 없는 물건도 고객이 원하면 만들어 낸다던데?”
리아의 말에 메리가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마님도 들으셨어요? 제가 웰우드에 가게 된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집에 있는 가족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깜짝 놀랄 거에요. 제 동생 미아는 아마도 거짓말이라고 믿지 않을 거예요.”
두 손을 맞잡은 채로 눈을 감고 상상이라도 하듯이 들떠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메리를 보며 리아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메리에게도 가족이 있구나,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을을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메리를 보며 리아는 가슴이 뭉클했다.
“동생이 있어?”
“저… 그게….”
“왜 갑자기 말을 더듬고 그래?”
“죄, 죄송해요.”
메리가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메리! 일어나. 무슨 일이야?”
놀란 리아가 메리를 향해 소리치자 메리가 쭈뼛대며 고개를 들었다.
“마님께 가족 이야기는 금지되어 있어요. 사적인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 건데….”
“그게 무슨 말이야?”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마님을 끝까지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게요.”
“메리! 진정해. 난 널 그만두게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넌 앞으로도 쭉 내 직속 시녀야.”
리아의 말에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박거렸다. 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메리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날 그렇게 모르겠어? 내가 그런 일로 널 자를 것으로 보이니?”
메리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19살이었다. 메리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리아는 갑자기 메리가 안쓰러웠다.
“메리, 19살이라고 했지? 미아는 몇 살이지?”
둘밖에 없는 방 안이었지만 메리는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작게 답했다.
“15살이요. 마님.”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시고 어머니께서는 성에서 빨래를 담당하고 계세요. 언니가 한 명 있는데 결혼을 해서 마을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남동생이 2명 더 있는데 큰동생은 올해 17살이 되어서 마구간에서 청소해요. 막내는 13살이에요.”
“대가족이네. 어머니와 남동생도 성에서 일하시는구나.”
처음 안 사실이었다. 메리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도 그 가족들이 성에서 일하고 있는 것도.
세상에 이렇게 무심할 수가. 지금껏 내 생각만 하고 살았어. 가까이에서 늘 함께하는 메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잖아. 리아는 생각이 깊어졌다.
“그런데 가족 이야기가 금지인 이유가 뭐야?”
“넬슨 씨와 휴즈 부인께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면 마님께서 부담스러워 하신다고….”
휴즈 부인은 베드포드 성의 하녀 장이었다.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메리 넌 그들이 하는 말 같은 건 신경 쓰지 마. 앞으로도 가족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해도 괜찮아. 오늘도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잖아. 주인이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 게 더 큰 잘못인 건 알고 있지?”
“네 마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늘 웰우드에 다녀와서 동생 미아에게 자랑할 생각이나 하자.”
메리는 리아의 말에 감격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리아는 그런 메리를 모른 척해 주며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이제 이것도 너무 지긋지긋하다. 천천히 해야겠어. 서신마다 하나같이 다 똑같아. 그냥 문 앞에다가 드레스는 디자이너 쥬넬이라고 적어놓을까 봐.”
리아의 말에 메리가 웃긴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내가 무도회에 관해 이야기해 줬니?”
“아니요. 마님 너무 궁금해요. 정말 저택이 으리으리 한가요? 러셀 후작님은 렌포드 제일의 부자라던데. 온통 황금으로 번쩍번쩍하다고 하던걸요.”
“그래? 그랬나? 저택이 넓고 좋았던 것 같아. 근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니까. 수많은 여자들이 온통 프릴이 가득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프릴에 질식해 죽을 뻔했어. 가슴은 다 내놓고 소매랑 치마는 온통 프릴투성이에. 정말 돈 주고도 못 볼 구경했다니까.”
“안 봐도 상상이 되는 것 같아요. 역시 마님이 가장 아름다우셨죠? 이렇게 수많은 서신이 날아온 걸 보면 분명 그랬을 거예요. 다들 마님이 어디에서 드레스를 맞추셨는지 궁금해서 난리잖아요.”
메리와 함께 웃으며 지난밤 무도회 이야기를 나누는데 넬슨이 문을 두드렸다.
“마님. 매튜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머!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 봐. 메리 그만 이 지겨운 서신들을 치워줘. 답장은 나중에 해야겠어. 나갈 준비를 하자.”
리아는 넬슨에게 곧 내려간다는 답을 하고 재빠르게 외출 준비를 했다.
보닛을 씌우려는 메리와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양산을 쓰기로 약속을 하고 간신히 머리를 사수할 수 있었다.
“마님 오후 햇살이 피부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셔야 해요.”
“메리 너는 이상하게 보닛이 집착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때 공작님 말씀 못 들었니? 보닛은 쓰지 말라고 했잖아.”
“오늘은 공작님과 함께 외출하는 게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요? 원래 남자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머리 스타일을 바꿔도 못 알아보는 남자가 태반이래요.”
라이언은 이미 볼일을 보러 외출한 후였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메리는 끊임없이 중얼댔다.
“보닛은 너무 답답해. 오늘 날씨가 얼마나 좋은데. 머리에 땀이 나겠어.”
“날씨가 좋을수록 꼭 써야 하는….”
“메리 이제 그만! 양산 꼭 쓸게. 알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꼭 붙어서 마님 피부를 지켜드릴게요.”
현관문 앞쪽에는 매튜가 리아를 기다리며 잔뜩 긴장한 채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공작부인.”
매튜가 리아를 보고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왜 혼자예요? 제임스는?”
오늘 외출에는 자칭 렌포드의 사나이라는 제임스가 함께하기로 되어있었다. 라이언이 생각보다 쉽게 외출을 허락한 이유 중 하나가 제임스였다. 웰우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제임스는 일명 걸어 다니는 추적장치나 마찬가지였다.
제임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누굴 만나는가 하는 것 같은 기본적인 정보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갈 정도로 그는 사교계의 인기남이었다. 그 정도로 이목이 쏠린 상태에서는 아무리 간이 큰 작자라도 나서지 못할 것이었다.
“브렌트 남작님은 웰우드에서 직접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오늘 부인을 모실 기사단장님 두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매튜의 소개 아래 두 명의 기사단장이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마이클 로밴이라고 합니다.”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제래미 버클루입니다. 오늘 저희 단원들과 함께 부인을 보필하겠습니다.”
“그만 일어나세요.”
리아의 말에 마이클과 제래미가 벌떡 일어났다. 리아는 매튜를 향해 물었다.
“그럼 일행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 두 분은 뒤에서 부인을 보필할 예정입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에 나설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얼굴은 익혀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잘 부탁해요.”
리아가 두 사람을 향해 싱긋 웃으며 인사하자 마이클과 제래미는 감동한 듯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신이 난 사람은 바로 메리였다.
꿈에 그리던 웰우드를 잘생긴 매튜와 함께 간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데, 조금 있으면 제임스가 합류하고 거기에 멋진 검은 기사단이 뒤에서 지켜준다니. 오늘 메리의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은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리아와 메리가 탄 마차가 드디어 이든로즈홀을 벗어나 렌포드 쇼핑의 거리 화려한 웰우드를 향해 길을 나섰다.
***
웰우드는 마치 한국의 쇼핑단지 같은 느낌이었다. 중앙에 있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올망졸망한 상점들이 비슷한 모양으로 길마다 가득 들어서 있었다. 생각보다 그 규모가 대단히 컸는데 마음을 먹고 상점을 전부 구경하려면 하루가 꼬박 걸릴 정도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웰우드 거리는 마차의 출입이 통제된다는 것이었다. 리아는 입구에서부터 웰우드를 탐색하듯 살피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마님 저기 좀 보세요. 보닛 전문점이에요. 세상에 너무 예쁘지 않아요?”
메리가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자 리아는 고개를 흔들며 모른척했다. 여기까지 와서 보닛이라니. 메리의 집착은 참으로 대단하다니까.
“매튜, 우선은 장미 비누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부터 살까요?”
쇼핑이 먼저가 아닌 비누를 위한 준비물부터 구입을 하자는 리아의 말에 매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제임스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매튜 역시도 그사이에 비누 재료를 사고 거래처를 정하면 딱 맞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꼭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우선 부인께서 필요하신 것부터 쇼핑하셔도….”
매튜의 입에서 생각과는 다르게 예의 바른말이 튀어나왔다.
“너무 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 아니에요? 말이랑 행동이 너무 반대여서 도대체 어떤 쪽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네. 그럼 제 맘대로 할게요. 우선 비누 틀을 주문하고 싶은데.”
리아의 말에 매튜가 웰우드 지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워낙 상점이 많아서 지도를 보지 않고는 찾아다니기가 힘들었다.
“장미 비누를 만드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아요. 기본 비누를 만들던 형식에 좀 더 고급재료를 쓰고 장미가루나 오일을 첨가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군요.”
“내가 살펴보니 비누 모양이 너무 투박하더라고요. 기껏 모양을 낸 것도 둥그런 게 다니까.”
지도를 살피던 매튜가 원하는 곳을 찾았는지 반갑게 소리쳤다.
“오. 여기 있습니다. 온갖 틀 전문점!”
지도를 보여주는 매튜를 향해 리아가 말했다.
“그러네요. 별것이 다 있다더니 정말이네. 사실 틀이 없어도 손으로 직접 모양을 내는 방법도 있어요. 좀 어려워서 그렇지. 장미 오일은 만들기도 까다롭고 너무 소량이라서 우선은 장미가루로 대중적인 상품을 만들고 오일로는 좀 고급비누를 만들어서 귀족들에게 파는 게 좋겠어요.”
리아의 설명을 들으며 매튜가 틀 전문점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