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66화 (66/116)

66화. 최고의 여인

이른 아침부터 이든로즈홀에 방문객이 넘쳐났다. 현관문 바로 앞 테이블에는 신사들이 두고 간 명함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것은 명함만이 아니었다. 온갖 종류의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현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든 것들은 렌포드에 머무는 신사들의 소행이었다.

그들은 리아가 유부녀라는 것도 그녀의 남편이 무시무시한 검은 사자라는 것도 상관없다는 듯 대놓고 호감을 표시해왔다.

물론 그중에는 불순한 의도가 아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공작 부부와의 친분을 꿈꾸며 아침부터 꽃다발을 들고 이든로즈홀의 문을 두드렸다.

그렇지만 의도가 불순하든 순수하든 간에 그 누구도 현관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갔다.

-방문객 사절

지난밤 귀가를 하면서 아침에 일어날 일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라이언은 집사 넬슨에게 절대 방문객을 받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모두 매우 아쉬워하며(사실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자신들이 다녀간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기 위해 애썼다.

명함은 기본이었고 조금이라도 더 크고 화려하고 특별한 선물로 리아의 눈에 들기를 바랐다.

가장 먼저 방문을 해서 가장 좋은 자리에 꽃다발이 놓이길 바라는 욕심은 무척이나 컸다. 늦은 새벽 파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동이 트자마자 이든로즈홀의 도어 노커는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수상한 방문은 오전 내내 이어졌고 정오로 갈수록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신사들이 전부였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레이디들의 하녀가 주를 이뤘다.

레이디들의 주된 관심사는 지난 무도회에서 공작부인이 입었던 의상이었다. 기존 유행을 파격적으로 뒤집은 리아의 스타일은 그녀의 등장 이후 단 몇 시간 만에 모든 레이디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아닌 척하면서 고상을 떨었지만, 뒤에서는 하녀를 통해 친분을 맺고 싶다는 인사로 시작되어 드레스 정보를 묻는 말로 끝을 낸 서신을 보내왔다.

“꽃향기 때문에 질식할 것 같군.”

“예쁘기만 한걸요. 너무 많다는 게 문제지만.”

늦은 아침을 먹으며 라이언과 리아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늦은 귀가 후 바로 잠들지 못한 것은 밤새도록 놓아주지 않는 라이언 탓이었다. 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를 마시는 라이언을 쳐다보며 부끄러움에 볼을 붉혔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런 티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리아는 그늘진 눈 밑을 쓱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넬슨 말로는 지금까지 명함을 남기고 간 신사가 총 78명이라는군. 어제 그 무도회장에 그 정도로 많은 남자가 있었나?”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았지. 무척이나.

“대충 봐도 그것보다 많던걸요. 근데 뭐하러 명함을 남긴 거예요?”

“그들 중 반 이상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카드와 함께 꽃을 들고 왔어. 그리고 나머지 반은 과일바구니더군. 그리고 지금 이 시각에도 그 수는 늘고 있겠지.”

“아, 홀에 퍼진 달콤한 향기의 정체가 과일이었군요?”

라이언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지금 중요한 게 달콤한 향기인가?”

“그럼 뭐가 중요한가요? 전 그 많은 과일을 다 어떻게 먹으면 좋을지 걱정인데.”

“그들이 왜 찾아왔는지는 궁금하지 않고?”

“뭐 대충 알 것 같아요.”

리아가 반숙으로 익힌 계란후라이를 톡 터트리며 말했다.

“대충?”

“보통 신사들은 무도회가 끝나고 나면 마음에 든 레이디의 집으로 꽃다발을 사 들고 방문한다면서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는 또 뭐예요. 가만 보면 진짜 이상한데 집착한다니까. 어차피 만나지도 않을 건데 방문 좀 하면 어때요. 재밌잖아요.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이왕이면 꽃 말고 과일로 사 오라고 해야겠어요.”

라이언의 얼굴에 리아가 하는 말이 어이없다는 듯 황당한 웃음이 서렸다.

“과일로 사 오라고 한다고?”

“꽃은 뭐 예쁘긴 하지만 시들면 끝이잖아요. 과일은 나눠 먹을 수도 있고.”

역시 리아는 보통 여자들과는 매우 달랐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선물로 과일을 사 오라고는 또 어떻게 할 건데? 라이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저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거든요! 그냥 뭐 과일 좋아한다고 소문 하나 내면 되는 거 아니에요? 꽃 사서 가면 홀대한다거나.”

“하하하하, 퍽 기발한 생각이군. 과일을 좋아하는 공작부인이라 이건가?”

“웃지 마세요. 지금 놀리는 거 다 알거든요! 그런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거예요? 신문에 뭐 재미있는 기사라도 있어요?”

리아가 라이언이 들고 있는 신문을 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줄곧 같은 페이지에만 머물러있는 것이 수상했다.

“별것 아니오.”

“이리 내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신문을 탁탁 접더니 옆에 내려놓았다.

“당신은 연기를 진짜 못하는 거 알아요? 어디 가서 배우는 절대로 하지 마세요. 발연기 하는 거 엄청 티가 나니까!”

“발연기? 그게 뭐지?”

“있어요. 발로 막 하는 거.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신문 당장 줘 봐요. 그런 식으로 숨기는데 누가 몰라.”

그녀의 말에도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는 그를 보며 리아는 직접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행동에 라이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꼭 봐야 하냐?”

“당신이 너무 티 나게 표시를 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요.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서.”

“별거 없어. 그저 가십일 뿐이오.”

가십? 그럼 더 궁금하잖아. 리아가 신문을 한 장 넘기며 그가 봤을 만한 페이지를 찾았다. 여러 장 넘길 필요도 없이 기사는 맨 첫 장에 커다랗게 인쇄되어 있었다.

-천덕꾸러기 공주 드디어 베일을 벗다.

러셀 후작의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했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번 시즌을 통틀어 가장 진귀하고 소중한 명장면을 놓친 셈이니까.

하지만, 아직 절망하긴 이르다.

지금 이 글을 읽는다면 당신은 러셀 후작의 무도회에 참석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니.

지난밤 러셀 후작의 무도회에 베드포드 공작부인 프린세스 레오니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간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공작부인은 금빛 드레스에 붉은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매우 화려하고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뽐냈다.

그녀는 추녀도 아니었고 뚱녀도 아니었으며 매우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프린세스 레오니는 엘리시아 왕국의 후손임을 입증하듯 무도회 내내 황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베드포드 공작을 바라봤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들의 영웅 베드포드 공작이다. 베드포드 공작 라이언은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 아내를 몇 년간이나 구석진 영지에 숨겨두었을까?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한 바이다.

그는 시종일관 아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사랑꾼에 순정남이라는 소문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의문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과연 베드포드 공작 부부의 사랑은 진짜인가?

각 클럽의 도박 장부에는 프린세스 레오니를 향한 상당한 액수의 도박금이 올라왔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번 시즌 최고의 여인은 누가 뭐래도 프린세스 레오니가 차지할 것이란 사실이다.

“와, 이런 걸 기사로 냈다고요?”

정말 찌라시 급의 저질기사였다. 신문에 인쇄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사의 밑에는 리아의 초상화와 지난밤 입었던 드레스 모양까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어째서 이런 저질 신문이 식탁 위에 올라왔는지 알 수가 없군. 넬슨이 정신이 없어 실수한 모양이야.”

“나한테 눈을 떼지 않았다는 게 참이에요?”

“기억이 나질 않는군.”

“풉.”

리아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재빠르게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왜 웃지?”

“웃은 거 아닌데.”

“그만 보고 버려. 그냥 저질 가십 기사일 뿐이야.”

라이언은 리아가 보고 있는 신문을 뺏더니 문 쪽으로 던져버렸다.

“삐쳤어요?”

“삐쳐?”

“온통 나만 칭찬했잖아요. 올 시즌 최고의 여인이니 어쩌고 하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아.”

“난 궁금한데.”

리아가 작게 중얼대자 라이언이 인상을 썼다.

“그거 혼잣말인가? 아니면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들었으면 어쩔 수 없고요. 뭐 들었다니까 물어보는데 진짜 이유가 뭐예요?”

“뭘 말이지?”

“버려둔 이유 말이에요.”

리아의 직접적인 물음에 라이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게 버려둔 거였나?”

“그럼 아니에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줬던 것 같은데.”

“그랬나? 뭐 좋아요. 그냥 그랬다고 쳐요. 오래전 일 따지기도 싫고. 그럼 다시 돌아온 이유는 뭐예요?”

라이언의 눈빛이 점점 더 진해졌다. 그는 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답했다.

“말했던 것 같은데. 후계자가 필요해서 왔다고.”

“갑자기 후계자가 필요한 이유는?”

“거기에 이유가 필요한 이유를 전혀 모르겠군.”

라이언은 말을 돌렸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알아낼 수 없었다.

좀 더 자극을 해봐? 아니면 우선 여기서 물러서? 리아는 머리를 마구 굴렸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더는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좋아. 물러서야겠어. 계속 물어본다면 역효과가 날지도 몰라.

기사에는 라이언이 그녀를 버려두고 다시 찾은 이유에 뭔가 구린 비밀이 있는 것처럼 써 놓았지만, 리아는 전생에도 황당한 찌라시에 여러 번 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기사 내용을 전부 믿지 않았다.

“천덕꾸러기 공주는 좀 기분 나쁘네요.”

“그런가?”

“조만간 친정 나들이를 한번 해야겠어요.”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알아보고 싶은 일도 있고. 리아는 정말 조만간 수도 르셀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물론 라이언의 허락이 필요하겠지만.

리아가 처참하게 구겨져 바닥에 던져진 신문에서 시선을 떼며 라이언에게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드디어 제가 외출을 할 수 있는 건가요?”

“한 시간 후에 매튜가 와서 당신을 데리고 나갈 예정이오.”

“와! 드디어! 그런데 당신은 안 나가고요?”

“내 돈을 마음껏 쓰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편하게 못 쓸 것 같아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리아는 그 유명한 렌포드 상점 거리를 돌며 마음껏 쇼핑할 예정이었다. 수표책의 주인이 바로 옆에 있다면 신경이 쓰일지도 모른다. 마치 카드 사용 문자가 남편에게 갔을 때의 기분처럼. 그걸 경험한 적은 없지만 들은 이야기는 많았다.

“그럼 저야 고맙죠. 진짜 엄청 쓸 생각이었거든요. 예고하는 거예요. 나중에 놀라지나 마세요.”

“한번 놀라 봤으면 좋겠군.”

“그럼 전 매튜가 오기 전까지 레이디들의 서신에 답장이나 해야겠군요.”

리아가 식탁 위에 수북이 쌓인 편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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