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다정한 그대
리아는 휘어잡은 허리에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며 라이언이 이끄는 대로 댄스 플로어 정 가운데를 향해 미끄러지듯 걸어 나갔다.
집에서 연습했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악단의 연주는 아름다웠고 조명은 화려했으며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그녀와 라이언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관심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온몸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왜 다들 춤을 안 추는 거죠?”
“첫 번째 왈츠는 갓 데뷔한 영애들만을 위한 무대이지.”
자정이 가까워지면 시작되는 첫 번째 왈츠는 언제나 데뷔탕트들의 차지였다. 그것은 새로이 사교계에 얼굴을 내민 어린 영애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유부남이 아니라면 그들의 첫 번째 왈츠에 파트너 신청은 거절할 수 없었다. 원하는 상대에게 댄스 신청을 하는 시간 또한 정해져 있었는데 악단이 예비연주를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녀들은 미리 찜해놓은 파트너를 찾아다녔다.
리아가 무도회장에 도착한 이후 제임스를 볼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제임스는 데뷔탕트들이 댄스 신청을 할 것을 염려해 항상 그즈음이면 자리를 비웠다가 첫 번째 왈츠가 끝이 나면 나타나고는 했다. 그 때문에 사교계의 최고 인기남인 브렌트 남작과 첫 댄스를 추는 것은 데뷔탕트들에게는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데뷔탕트와 그녀들에게 선택된 파트너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댄스 플로어 바깥쪽에 서거나 테이블 앞에서 샴페인이나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무대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왈츠를 추기 위해 어린 영애들과 그들의 파트너 10쌍 정도가 앞으로 나왔다. 그중 가장 튀는 커플은 누가 뭐래도 라이언과 리아였다.
“사교계는 생각보다 규칙이 많네요.”
“뭐, 그래도 이런 규칙은 좋지 않나? 덕분에 당신과 나도 편하게 춤을 출 수 있지 않소.”
나쁘지 않은 규칙이긴 했다. 갓 데뷔를 한 영애들은 여러모로 어리숙하고 순진했다. 사교계의 수많은 레이디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가감 없이 내보일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첫 왈츠의 시간이 유일했다.
“앞으로 무도회에 참석하면 늘 여기 나와서 왈츠부터 춰야 하나요?”
“당신은 결혼했으니 괜찮아. 오늘은 첫 무도회를 기념할 겸 추는 것으로 하지.”
라이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악단이 연주를 멈췄다. 홀 안이 조용해졌다. 리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첫 경험이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기분은 부끄러움이나 난처함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설렘이었다.
더는 숨겨진 공주도 숨겨진 공작부인도 아닌 떳떳하게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
레오니를 향해 다짐했던, 대신 인생을 잘 살아주겠다는 약속의 첫 발걸음.
모든 것은 리아를 벅차게 만들었다. 거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라이언의 다정한 눈빛은 그녀를 한층 더 들뜨게 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그녀 혼자만의 것이었다. 갑자기 라이언에 대한 사랑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찡하게 올라왔다.
그의 사랑이 진실이라면 이곳, 여전히 알 수 없는 엘리시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살 자신이 있었다. 타고난 운명을 되찾을 자신이 있었다.
그의 눈빛이 지금 보여주는 그대로 진실이라면 말이다.
탁탁탁- 소리와 함께 다시 제대로 된 연주가 흘러나왔다.
리아는 라이언의 품에서 매달리듯 미끄러지며 부드럽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귓가를 울리는 달콤한 음악 소리, 손끝에 느껴지는 그의 온기,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
모든 것은 아름다웠고, 황홀했고, 아찔했다.
“연습할 때보다 잘 추는군.”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자주 춤을 추셨나 봐요.”
리아가 미끄러졌다 돌아올 때마다 라이언은 그녀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여기가 이든로즈홀이라면 좋겠어. 그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입가에 키스할 수 있을 텐데.”
노골적인 그의 말에 리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누가 듣겠어요.”
“들으라지. 어차피 사랑꾼으로 소문이 난 거 더 나빠질 것이 뭐가 있겠어.”
“지금 그 말은 소문을 인정하신다는 거예요?”
“뭐, 나쁘진 않군.”
플로어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숨이 찼다. 왈츠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네?”
“사랑꾼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어느새 연주가 멈췄다. 리아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벌써 끝났어요?”
그녀는 둘만의 마법이 풀리기도 전에 음악이 끝이 난 것이 아쉬웠다.
“아쉬운가? 그럼 아쉬움을 달랠 좋은 방법이 있다오. 바로 집에 간다면 내가 당신과 밤새도록 춤을 춰주겠소.”
“하…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라이언의 검은 속을 다 알고 있는 리아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댄스 플로어를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리아의 앞으로 샴페인 잔이 내밀어졌다.
“시원하게 목 좀 축이시죠. 레이디.”
“제임스! 왜 안 보이나 했어요. 이제 왔어요?”
리아의 물음에 라이언이 대신 답했다.
“이제 오다니 그럴 리가. 도망쳤다 돌아왔겠지.”
“도망쳐요?”
리아가 샴페인 잔을 받아들며 라이언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임스는 두 사람의 대화에 유쾌하게 웃으며 이번에는 라이언에게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자네도 한 잔 마시게. 춤을 아주 멋들어지게 잘 추더군. 다시 봤다네. 친구.”
“어디에 숨어 있었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었지. 어린 영애들은 참 골치가 아프다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댄스 신청을 하지.”
리아는 그제야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댄스 신청을 피해 숨어 있다가 온 거군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쓸쓸했어요. 라이언과 둘이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니까요.”
“하하하, 이 친구가 그렇죠. 제가 레이디께 가까이할 만한 친구를 소개해드리지요.”
“제임스!”
제임스의 말에 당황한 라이언이 그를 제지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리아를 소개한다니.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매우.
“친구. 아내를 혼자 독점해서는 안 되는 거라네. 욕심을 버리시게. 수많은 사람이 여기 아리따운 레이디와 한마디라도 나눠보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
리아는 제임스의 말에 웃음이 났다. 대놓고 웃기는 좀 그래서 살짝 고개를 돌려 피식대자 라이언이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그렇게 쳐다봐도 전혀 안 무섭거든요? 친구분 말씀 잘 들으셨죠? 독점하고 그러는 거 못 쓰는 거예요. 저도 친구 좀 사귀자구요. 괜히 인상 쓰지 말고 따라오세요. 다들 당신 무서워서 도망가기 직전이에요. 알겠죠?”
리아가 손을 내밀어 라이언의 미간을 문지르자 주변이 또다시 웅성댔다. 검은 사자의 얼굴에 손을 대다니! 그렇지만 그들이 놀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짓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니 오히려 기분 좋은 듯 눈을 살짝 감는 라이언의 모습은 바로 옆에 서 있던 제임스의 정신마저 쏙 빼놓고 말았다.
“이 친구가 완전 맛이 갔군.”
제임스가 작게 중얼댔지만, 그의 혼잣말을 두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뒤로 한동안 리아는 제임스를 통해 수많은 귀족을 소개받았다. 그녀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제임스와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들 앞에 줄을 서 가며 몰려들었다.
라이언은 리아가 귀족들을 소개받는 동안 줄곧 바로 뒤에 서서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남자들도 한두 명씩 제임스와 리아의 앞에 나섰고 그들은 하나같이 공작부인의 외모를 찬양했다.
그들에게 리아의 존재는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검은 사자가 쩔쩔매는 여인이라는 매력이 더해지니 그녀의 외모가 한층 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원래가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고 그 상대가 베드포드 공작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호기심과 호승심을 불러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라이언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 남자들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리아를 향해 추파를 던지고 있었고 이제는 처음처럼 그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평소 행실대로라면 리아는 탐나는 유부녀였다. 그것도 매우 몹시 엄청나게 탐이 나는.
아마도 오늘 밤 파티가 끝이 나고 나면 남성 클럽에는 베드포드 공작부인이 과연 언제쯤 애인을 만들 것인가! 하는 시기를 논하는 도박장부가 올라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애인이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베팅을 할 것이 뻔했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리아는 그저 웃으며 인사를 나눌 뿐이었다.
그때 라이언의 시선에 겁도 없이 리아의 소맷자락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살짝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애송이의 불경한 손길이 포착되었다.
“그만!”
크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그만’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모두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라이언이 리아의 옆으로 다가서며 금방 그녀의 몸에 손을 댔던 애송이를 노려봤다. 당장 꺼지라는 무언의 압력을 발사하며.
애송이는 결국 검은 사자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고 순식간에 사람들은 흩어졌다.
“왜 그래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는 리아는 갑자기 화가 난 듯 보이는 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그러게 자네 왜 그러나?”
리아의 옆에서 열심히 귀족들의 이름과 작위를 불러 주며 소개를 해 주던 제임스도 라이언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 채로 물었다.
“소개만 받다가 밤이 다 가겠군. 그 정도면 충분하네.”
“모두 레이디를 소개받고 싶어서 안달인 게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제임스. 아까부터 왜 자꾸 절 레이디라고 하는 거죠? 우리 친구 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자꾸만 레이디라고 힘주어 부르는 제임스를 향해 리아가 물었다.
“그게….”
대답은 하지 않고 라이언을 쳐다보는 제임스를 보며 리아의 시선도 자연스레 라이언을 향해 옮겨졌다. 라이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왜 자꾸 이 사람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아무리 친구가 되기로 했다지만, 친한 친구 아내의 이름을 그냥 막 부르는 게….”
“아하. 제 남편이 그러지 말라고 했군요?”
눈치를 보아하니 그랬다. 하여튼 생각보다 질투가 엄청나게 많다니까. 지금 귀족들과 인사를 그만두게 한 것도 그 이유 같았다. 여자들을 소개받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남자들을 소개받기 시작하니까 앞으로 나선 것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래도 레이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레이디께서는 앞으로도 쭉 절 제임스라고 불러 주시길….”
“그만하게. 이제 소개도 그만하면 충분해.”
“충분하다니! 아직도 멀었다네. 지금 렌포드에 얼마나 많은 귀족이 와 있는지 모르는가? 아마 르셀엔 왕과 왕비밖에 남지 않았을 거야. 전부 여기 와있는 것 같으니 말일세.”
“왕과 왕비는 이곳에 오지 않나요?”
제임스의 말에 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왕에 관해 물었다.
“그건 레이디께서 더 잘 아실 줄 알았는데….”
놀리거나 비꼬는 게 아니었다. 제임스는 그저 당연히 왕실의 가족인 리아가 왕실의 풍습을 더 잘 알 것으로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그게….”
“지난 3년 동안 달라진 건 없소. 여전히 왕께서는 이 시기에는 여름 궁에 가 계신다오.”
곤란해하는 리아를 대신해 라이언이 대답을 했다. 그렇지만 눈치가 없는 제임스는 이야기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럼 자네는 그동안 레이디를 단 한 번도 친정에 보내드리지 않은 건가? 이런 몹쓸 사람.”
그는 라이언을 타박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럴 만도 한 게 제임스는 두 사람이 결혼식을 치르기 전부터 외국에 나가 있었고 최근에야 엘리시아에 돌아왔다. 매튜를 통해 라이언이 결혼을 하게 된 이유를 듣기는 했지만, 신부가 미쳤다거나 하는 것은 그냥 소문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가 만난 라이언의 아내는 그 누구보다 똑똑했고 아름다웠다. 더군다나 왕실의 분위기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원래부터 그런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친정을 단 한 번도 보내 주지 않다니. 내 남편이지만 당신 친구는 참 야속한 사람이라니까요.”
리아는 웃으며 제임스의 말을 받아쳤다.
“아이도 없이 제가 친정에 가게 되면 도망이라도 칠까 두려운가 봐요.”
농담인데도 묘하게 진실처럼 들리는 리아의 말에 제임스는 배까지 잡고 깔깔대며 웃었다. 그 자리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라이언뿐이었다.
라이언은 더 이상 이 상태로 제임스에게 말려들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 한 무더기의 귀족들을 소개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마구 웃어대는 제임스를 무시하며 리아의 손을 잡더니 다시 댄스 플로어로 이끌었다.
“라이언!”
“마침 연주가 막 시작되는군. 춤을 추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사람들을 쫓아낸 거라오.”
“거짓말.”
“설마,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라이언은 리아를 놔주지 않은 채로 새벽이 깊어가도록 댄스 플로어를 떠나지 않았다. 그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 끝에는 페넬로페도 있었다.
“왜 잘해 주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웃고 있는 꼴이라니. 오라버니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어. 아이를 얻기 위해 억지로 사랑하는 척을 하다니….”
페넬로페는 리아가 행복하게 웃으며 플로어를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솟았다. 남의 것을 빼앗고 저렇게 당당하다니. 라이언이 왜 잘해 주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진짜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착각하는 여자를 괴롭혀주고 싶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니.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혼잣말을 내뱉은 페넬로페의 얼굴이 질투로 추악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