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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64화 (64/116)

64화. 무도회, 알 수 없는 여자들의 세계(2)

라이언이 변한 건 모두 저 여자 탓이야. 페넬로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는 라이언.

그런 라이언의 모습은 페넬로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라이언은 변했다.

점점 더 강하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라이언을 향해 소리를 지를 수도,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도 없었다.

페넬로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한참을 서 있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더 비참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꼭 쥐고 있는 손바닥에 박혀 든 손톱의 통증이 그녀를 일깨웠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엔 너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야!

페넬로페는 힘겹게 몸을 돌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엉망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둘 사이를 떼어놓고 싶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 아무리 여자에 빠져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무시할 수 있냐며 화를 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상상만으로 끝이 났고 페넬로페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는 보는 눈이 무척이나 많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 있었다.

대다수 귀족은 페넬로페와 라이언이 특별한 관계라고 믿고 있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결국, 페넬로페는 참아냈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분노가 솟구쳤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돌아섰다.

지금까지 라이언을 얻기 위해 참아온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포기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처음 그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페넬로페는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절망에 몸부림쳤다.

막연히 라이언이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당연히 페넬로페 자신밖에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충격은 더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언이 아내를 오래된 영지로 보내버렸다는 소문이 돌았고 페넬로페는 그것이 소문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늘은 그녀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라이언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녀도 유부녀가 되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미망인이 된다면 더 좋고.

사교계에 그런 일쯤은 흔해 빠졌으니까.

페넬로페는 라이언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유부녀가 되기로 했다. 그것도 이른 시일 안에 부유한 미망인이 될 예정인 유부녀가.

그녀는 빠르게 결혼을 했고 예정대로 금방 미망인이 되었다. 그 뒤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혼자가 된 그녀를 라이언은 모른척하지 않았고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라이언이 갑자기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도대체 라이언은 왜 결혼을 했을까? 페넬로페는 여전히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결혼한 이유도, 아내라는 여자를 3년이나 혼자 내버려 두다가 갑자기 다시 찾아간 이유도.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소곤대는 사람들을 피해 페넬로페는 여성 휴게실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탈의실 커튼을 열고 들어갔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마음을 진정시킬 공간이.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가릴만한 곳에서 혼자 화를 삭이고 싶었다. 허술하지만 두꺼운 커튼은 그녀의 엉망인 모습을 가려줄 것이다.

그때 휴게실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페넬로페는 탈의실 안에 달린 거울을 보며 재빨리 얼굴을 살폈다. 이대로 있다가 웃음거리가 되느니 밖으로 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사를 할 생각으로.

분노로 양 볼이 붉어져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빛이 났다.

라이언의 옆에 서 있던 빨간 머리 여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이런 날 두고 삐쩍 마르고 막대기 같은 여자를 선택할 리가 없어. 분명 라이언은 그 여자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거야. 그 못된 여자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녀는 마녀 같은 여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라이언을 구해줘야 했다.

이렇게 휴게실 구석에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당당하게 밖으로 나가서 아름다움을 뽐내리라.

페넬로페가 탈의실을 나가기 위해 커튼을 잡는 순간이었다.

“베드포드 공작이 왜 결혼했는지 그 이유를 아세요?”

휴게실에 들어온 여자들이 속닥대기 시작했다. 페넬로페는 움직임을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는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솔깃한 이야기였다.

베드포드 공작이 왜 결혼을 했는지 아느냐고?

라이언이 결혼을 한 이유? 알고 싶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뭔지. 그들의 말을 끝까지 듣고 싶었다.

“왕께서 그가 세운 공을 치하하기 위해 결혼을 추진하신 것이 아닌가요? 전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뭐 반 정도는 맞는 말이네요.”

“반 정도라니.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이에요?”

계속되는 이야기에 페넬로페는 살짝 커튼을 열어 여자들을 몰래 살폈다. 휴게실에 들어와 있는 여자들은 모두 3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웬디양께서는 제시카 왕비님의 사촌 동생이시니… 뭔가 알고 계시겠군요?”

제시카 왕비의 사촌? 페넬로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라면 정말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오늘 보니 공작께서 부인을 사랑하는 것 같던데요? 베드포드 공작의 아내 사랑이 극진하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봐요. 눈을 떼지 못하던걸요.”

또 다른 여자가 부채질하며 금방 목격한 공작 부부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주가 공작에게 소박맞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웬디라는 여자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두 사람을 휴게실 더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덕분에 페넬로페와 여자들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고 소리는 또렷해졌다.

“이건 비밀인데요….”

“어머, 뭔가 있는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비밀은 지키라고 있는 건데요. 여기 우리 말고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해 보세요. 공작이 결혼한 이유가 뭔가요?”

“공작이 원하는 것이 있어서 결혼을 한 거래요. 사실 미친 공주라는 소문이 자자했잖아요.”

“원하는 것이요?”

답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비밀스럽게 작아졌다. 그녀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페넬로페도 듣지 못했을 정도로….

“사실 저도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베드포드 공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요. 다만 3년이 지나면 그 물건을 받기로 했는데… 공작이 식이 끝나자마자 공주를 버려둬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왕께서 그가 원하는 물건을 주지 않았대요.”

“어머나! 그래서요? 설마… 그럼 공작에게 아내를 챙기라는 명령이라도 내렸을까요? 그래서 공작이 변한 건가요? 어머나 다정도 하셔라. 역시 동생을 챙기는 건 왕뿐이시군요.”

“아이를 낳으라고 했다던 걸요. 그럼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사실 아이를 낳아야 진정한 왕실 가족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죠.”

“어머머 그게 정말인가요? 아이라니! 도대체 그 물건이 무엇이기에!”

“쉿! 누가 듣겠어요.”

웬디가 다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자 페넬로페는 재빠르게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아무도 없어요. 여기 우리뿐인걸요. 계속 이야기 좀 해 보세요. 그럼 지금 공작의 다정한 모습이 다 연기인 걸까요? 아까 보니 레스터 백작 미망인을 아는 척도 안 하던걸요. 저는 두 사람이 정말 연인인 줄 알았는데….”

“그건 모르죠. 부인 앞이라서 모른 척 한 걸지도. 전 진짜 공주가 미친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멀쩡하던걸요.”

“그래요. 참 아름답더라고요. 전혀 미친 것 같지 않던걸요.”

페넬로페는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이내 리아의 겉모습으로 옮겨갔다.

“드레스 보셨나요? 도대체 어느 샵에서 맞춘 걸까요? 프릴이 하나도 없는데 어쩌면 그렇게 예쁜지.”

“그런데 생각보다 베드포드 공작의 흉터가 심하지 않더라고요.”

“그러게 말이에요.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어째서 무섭다고 소문이 난 것인지. 역시 소문은 다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 다정한 표정 하며….”

세 여자의 수다는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리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평가하고 라이언의 모습을 찬양했다.

“참! 오늘 브렌트 남작도 왔다던데… 봤어요?”

“제임스요? 정말이에요? 왜 그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해 주시는 거예요! 저 어때요? 화장이 번지지는 않았나요?”

웬디가 호들갑을 떨며 드레스 자락을 털어대더니 곧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뒤를 나머지 여자 두 명도 재빠르게 따랐다.

다시 휴게실이 조용해졌다. 페넬로페는 천천히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원하는 게 있어서 결혼했단 말이지. 이제야 하나둘 퍼즐이 맞아떨어졌다. 라이언이 그렇게 쉽게 결혼을 할 리가 없었다.

3년간 내버려 뒀다가 다시 찾아간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왕이 명령했겠지. 아이를 낳아오면 물건을 주겠다고.

그 물건이 무엇인지도 그녀는 알 것 같았다.

라이언과 제임스가 이야기하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라이언은 검을 찾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왜 찾는지는 모르지만 몇 년에 걸쳐 포기하지 않고 그 검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연기였어. 전부 연기였다고.

모든 것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연기일 뿐이었다. 페넬로페는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라이언이 그 여자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모두 검을 찾기 위해서라고.

라이언이 여자의 손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낸 기쁨에 페넬로페는 감격스러웠다.

***

“갔어요.”

“응?”

리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라이언이 되물었다.

“페넬로페 말이에요. 그러니 그만 제 어깨에서 손을 떼주시겠어요?”

이어지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그제야 주변을 살피며 리아의 어깨를 더듬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화가 난 것 같던데 괜찮아요?”

“괜찮지 않을 이유를 모르겠군.”

무슨 상관이냐는 듯 태평한 라이언의 표정을 보며 리아도 페넬로페를 잊기로 했다. 첫 무도회에 참석한 좋은 날이었다. 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여보.”

“네? 뭐요?”

“왜? 무슨 문제 있나? 당신이 아까 그렇게 부르기에 나도 한번 해봤지. 매우 듣기 좋군.”

웃음을 참으며 말하는 라이언의 모습이 얄미웠다. 어쩐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받아 주는 게 수상하다 했더니 이렇게 잊지 않고 놀리다니!

“연기가 수준급이시던걸요. 절 쳐다보느라 누가 온 것도 몰랐다고요?”

“연기라고 누가 그러던가? 내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은 진실인걸.”

빤히 들여다보는 라이언의 시선에 리아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라이언. 우리 아무래도 여기서 비켜줘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지?”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이 테이블에 다가오지 못하고 있잖아요. 레모네이드는 충분히 마셨으니 그만 다른 곳으로 가요.”

“설마.”

리아의 지적에 라이언이 주위를 둘러봤다. 무슨 경계라도 쳐 놓은 듯 두 사람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이죠?”

“그렇군.”

리아는 라이언의 팔을 잡아끌고 자리를 옮겨가며 물었다.

“아는 귀족 없어요?”

“아는 귀족이야 많지.”

“그럼 친구가 없는 거예요?”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이 생겨났다.

“친구가 필요한가?”

“글쎄요. 무도회에서 이렇게 쓸쓸한 기분을 느끼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네요. 이대로 가다가는 페넬로페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당신 옆엔 내가 있는데 쓸쓸한가? 난 전혀 모르겠군.”

라이언의 대답에 당황한 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다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실했고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는 사이 악단이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왈츠를 출 타이밍이군.”

“벌써요?”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빠를수록 좋지.”

그는 리아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 가운데로 이끌었다.

“왈츠 한 곡 추고 나서 집에 가자고 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당신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

공작 부부가 춤을 추기 위해 움직이자 다시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 집중되었다.

리아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금사로 수놓은 드레스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아내가 남편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소.”

댄스홀 끄트머리에 도착했을 때 즈음 본격적으로 왈츠 음악이 울려 퍼졌다.

라이언은 리아의 손을 잡고 허리를 휘감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날 믿어요. 여보.”

리아는 홀린 듯 그를 따라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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