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63화 (63/116)

63화. 무도회, 알 수 없는 여자들의 세계(1)

어두운 밤이었지만 무도회가 열리는 러셀 후작의 저택 주변은 마치 한낮처럼 환했다. 한눈에 봐도 오늘 밤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왜 그러지?”

창문을 내다보던 리아가 손에 힘을 꼭 주자 라이언이 물었다.

“설레서요. 과연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자꾸 그렇게 흥을 깰 거예요? 저한테는 첫 무도회라고요.”

리아는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언은 여전히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함께 와 줬으니 이 정도 티를 내는 것쯤은 봐주기로 했다.

툴툴대고 있지만 어쨌든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고 있으니 그 점은 고마웠다.

러셀 후작의 저택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마차로 가득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 파티에 참석했는지 예상해볼 수 있었다.

귀족들. 리아가 이곳에 와서 제대로 만나 본 귀족은 남편인 라이언과 그의 친구 제임스, 그리고 페넬로페가 전부였다.

아, 그리고 또 한 명. 기억하고 싶지 않은 라이언의 사촌. 취한 개뼈다귀가 한 명 있었지.

이제야 이 세계의 일원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작은 원 안에 갇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처럼.

리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황당하게 시작된 새로운 삶이지만 그럭저럭 잘 적응해서 살고 있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아니 하루하루 더 즐거웠다.

밤공기가 상쾌했다. 리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밤하늘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곳은 정말 아름다웠다.

“드디어 도착했군.”

마차가 멈춰 서자 라이언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리아를 향해 말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하늘요. 오늘따라 하늘이 무척 아름답네요.”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한 가닥 흘러내린 리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라이언이 다정하게 말했다.

“네. 너무 좋아요. 오늘 밤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아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라이언은 생각했다. 제발 오늘 밤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아내의 즐거운 기분이 끝까지 유지되기를.

경험 없는 자신의 아내가 귀족들 사이에서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마차 문이 열리자 라이언이 먼저 내려 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파티를 즐기러 가 보시겠소. 부인.”

“당연하죠.”

리아는 라이언의 손을 잡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 시각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은 벌써 웅성대고 있었다.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했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연회장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파티의 주최자인 러셀 후작은 흡족한 웃음을 안으로 삼켰다. 망나니 같은 손자 놈을 사교계에 내어놓는 자리였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히 베드포드 공작 부부의 참석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져 버렸다.

부족한 손자의 언행을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러셀 후작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과 레오니 엘리시아 베드포드 공작부인 드셨사옵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일순간 웅성거림은 멈췄고 악단의 연주도 마찬가지였다. 무도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곳으로 리아는 라이언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갔다.

연회장 안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오직 공작 부부를 향해 쏠려있었다.

그 긴장감을 깬 사람은 파티의 주최자인 러셀 후작이었다.

후작은 우선 정신을 차리고 악단을 향해 연주를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공작 부부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드포드 공작. 그리고 공작부인.”

러셀 후작의 인사는 신호탄이 되어 수많은 귀족을 일깨웠다. 다시 그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나서서 아는 척을 하거나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러셀 후작은 자신보다 작위가 높은 라이언과 리아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가 고개를 들자 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연회장이 무척 아름답군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러셀 후작님.”

미리 준비한 대로 그녀가 인사말을 건네자 러셀 후작의 눈빛이 반짝였다.

리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연회장 안에 수많은 사람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소문만 무성했던 엘리시아의 미친 공주, 소박맞은 공작부인이 사실은 정상이었구나. 공작이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더니 사실이었구나. 뭐 그런 게 아닐까?

리아는 일부러 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라이언의 팔을 꼭 잡았다.

“당신이 보기에도 아름답지 않나요? 준비를 많이 하셨나 봐요.”

라이언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두 분이 참석을 해 주셔서 오늘 이 자리가 더 뜻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손자를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미리 들어서 알고 있던 정보대로 리아가 매끄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빨리 러셀 후작에게 벗어나 파티장 곳곳을 구경하고 싶지만, 예의범절이란 것을 무시할 수 없기에 리아는 인내심을 끌어올렸다.

무도회의 주최자가 참석자들을 소개해 주는 게 관습이었다.

서로 간에 안면이 있거나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그게 아닌 경우에는 소개가 필요했고, 그건 주최자의 역할이었다.

그러니까 러셀 후작이 지금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드포드 공작 부부를 소개해 줘야 했다. 그래야 다른 귀족들도 나서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공작 부부를 사적으로 아는 이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러셀 후작의 소개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저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핏줄을 찾았으니. 하늘이 도운 게지요. 안 그래도 제 손자 놈을 소개해 드리려고 했는데….”

러셀 후작은 손자를 찾으려 주변을 살폈다. 그렇지만 손자는 보이지 않았다. 후작은 난감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이에 서 있는 시종을 불러들여 손자를 찾아오라 명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나 봅니다. 우선 파티를 즐기고 계시면 제가 손자 녀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 후작은 드디어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은은하게 연주되던 곡이 순간 멈췄다.

“베드포드 공작과 공작부인을 소개하는 바입니다. 오늘 이 무도회는 제 손자를 되찾은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뜻깊고 즐거운 자리인 만큼 모두 마음껏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러셀 후작은 악단을 향해 다시 손을 흔들었다.

다시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고 주변은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한 명 한 명 소개하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었다. 그중 용기 있는 몇 명만이 나서서 공작 부부를 향해 인사를 건넸지만 극소수였다. 그것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고개만 힘껏 숙인 단순한 인사일 뿐이었다.

모두 서로 눈치만 보며 나서지 못하고 있자 라이언은 리아를 음료가 놓인 테이블로 데리고 가며 자리를 피했다.

“다들 쳐다만 보고 다가오질 못하네요. 다 당신 탓이에요.”

“내 탓?”

“전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요. 그런데 당신이 엄청나게 인상을 쓰고 있으니까 무서워서 못 오는 거잖아요.”

“설마.”

리아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를 따라 흔들렸다.

모두 아닌 척하면서 공작 부부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공작부인의 모습을.

막 테이블 앞에 도착한 라이언이 레모네이드 한 잔을 집어 들어 리아에게 건네줄 때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오라버니.”

렌포드로 오는 길에 여관에서 만났던 것을 끝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페넬로페가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페넬로페는 여전히 화려하고 화사했다. 특히나 입고 있는 드레스가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디자이너 쥬넬이 말했던 노출과 프릴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었다. 짙은 에메랄드빛 드레스는 젖꼭지를 가린 것이 용할 정도로 깊이 파여있었고 어깨 역시 반쯤 드러나 있었다.

소매 끝과 치맛자락은 자잘한 프릴들로 가득했다.

프릴의 공격에 숨이 막힌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리아는 쥬넬의 말을 다시 가슴 깊이 새겨 넣었다.

무도회장의 수많은 여인 중에 단연 1등이었다. 노출도, 프릴도 페넬로페를 이길 사람은 없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리아는 페넬로페를 향해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페넬로페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라이언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이게 진짜. 어디서 대놓고 추파를 던져. 리아는 페넬로페의 반쯤 벗은 드레스가 몹시 신경 쓰였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출렁대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라이언은 별 관심이 없는 듯 페넬로페에게 시선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만약 라이언이 페넬로페를 쳐다봤다면 리아는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해졌으리라.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을 향해 있었다.

페넬로페는 공공연히 자신이 베드포드 공작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런 페넬로페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인과 연인이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된 셈이니.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광경이었다.

“오라버니는 잘 지내셨나요? 제가 몇 번이나 서신을 보냈었는데 답장도 해 주지 않으시고. 페니는 너무 속상했어요.”

페넬로페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며 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가슴이 튀어나올 듯 출렁댔다.

페니는 너무 속상했어요? 대놓고 아양을 떠는 페넬로페를 보며 리아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예 벗어라, 벗어. 자꾸만 그녀의 흔들리는 가슴을 향해 옮겨지는 시선을 힘겹게 차단하며 리아는 라이언을 올려다봤다.

“여보, 레이디 페넬로페가 잘 지냈느냐고 묻잖아요. 대답을 해 주셔야죠.”

리아는 일부러 더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여보라니.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호칭이 자연스럽게 리아의 입에서 보란 듯이 흘러나왔다.

그런 리아의 의도를 알아챈 것인지 라이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더 웃기만 해 봐. 리아는 그가 여기서 놀리는 말을 한마디라도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랬나? 당신을 쳐다보느라 누가 온 줄도 몰랐군.”

“오라버니!”

라이언의 말에 페넬로페가 작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차마 보는 눈이 많아서 있는 성질대로 행동하지 못 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잘 지냈고말고. 아내와 함께 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 그렇지 않소?”

라이언이 리아의 어깨로 손을 올려 목덜미를 살짝 쓰다듬으며 그녀가 무척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 그래도 답장을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궁금했을 텐데.”

페넬로페의 씩씩대는 숨소리를 들으며 리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안으로 삼켰다. 좀 너무했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여지가 다분했다.

라이언은 여전히 페넬로페를 향해 조금의 시선도 주고 있지 않았다. 리아는 그 모습이 맘에 들었다.

“오라버니. 절 보고 이야기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역시나 페넬로페는 강력했다. 그토록 차가운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그녀는 가슴을 더 내밀고 어깨를 흔들었다. 마치 자신을 한 번이라도 쳐다본다면 라이언이 넘어올 것이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드디어 라이언이 페넬로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임스는 같이 오지 않았나?”

그렇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페넬로페의 기대와는 아주 동떨어진 질문이었다. 무관심하고 차가운 눈빛에 페넬로페의 얼굴이 붉어졌다.

라이언이 그녀를 이렇게 대놓고 무시한 적은 처음이었다. 마음을 받아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곁을 조금 주기는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가장 가까운 여자는 페넬로페 자신이었다.

이렇게 파티에 함께 참석한 적은 없었지만, 라이언이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가기 전 렌포드에 머물 때는 찾아가면 만날 수 있었고, 그가 먼저 서신을 보내 그녀가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물어오기도 했다.

가끔 과하게 조르면 드물지만, 함께 식사하거나 정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동생, 그리고 미망인이라는 신분은 라이언에게 접근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완벽하게 끝나 버렸다. 처음 보는 라이언의 모습에 페넬로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변했다. 소문은 사실이었고 과거의 라이언은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이 무도회장에 두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듯 서로를 다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라이언과 리아를 보며 페넬로페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를 참느라 주먹을 꼭 쥔 탓에, 잘 다듬어놓은 손톱이 살에 박혀 들며 통증이 일었다.

라이언이 변한 건 다 저 여자 탓이야. 페넬로페의 분노가 활짝 웃고 있는 리아를 향해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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