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62화 (62/116)

62화. 남자의 질투, 그 화려한 서막

디자이너 쥬넬은 하룻밤 동안 만들어 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가져왔다.

첫 데뷔를 하는 데뷔탕트들은 노출이 거의 없는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는 게 전통이었다.

리아는 사교계 첫 데뷔였지만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다. 꼭 그 전통을 지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 쥬넬의 생각이었고 리아 역시도 동의하는 바였다.

쥬넬이 호들갑을 떨며 꺼내놓은 드레스는 단아하면서도 파격적인 스타일이었다.

“오홍홍! 요즘 사교계 유행은 뭐니 뭐니 해도 노출이랍니다.”

“노출?”

“수많은 영애와 레이디들이 어깨와 가슴을 드러내놓지 못해 안달이죠. 정숙한 척하면서 드레스만큼은 노골적이에요.”

리아는 처음 페넬로페가 베드포드 성에 찾아왔을 때 입고 있었던 드레스를 떠올렸다. 풍만한 가슴을 간신히 반 정도 가리고 있던 옷차림. 그 커다란 가슴에 깜짝 놀랐었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거기에 추가로 하나가 더 있죠. 바로 프릴!”

“프릴?”

쥬넬은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그 치렁치렁한 레이스 프릴 덕분에 전 미칠 지경이에요. 도대체 몇 겹을 달아야 만족을 할는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좀 더 풍성하게. 더 풍성하게. 미친 것 같다니까요홍.”

유행을 역행이라도 하려는 듯 쥬넬이 야심 차게 준비해 온 리아의 데뷔 드레스는 작은 프릴 하나도 달리지 않았다.

하얀 실크드레스를 기본으로 실크 위에 망사, 망사 위에 금사를 수놓았다.

특히나 가슴을 반 정도 가린 하트라인 위로 바로 이어지는 속이 비치는 얇은 레이스는 어깨와 팔뚝을 모두 감싸며 노출을 한 듯 안 한 듯 더 신비감을 주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게 조여 주고 치마라인은 둥글게 퍼지면서 리아의 날씬한 몸매를 부각해 주는 드레스였다.

목덜미에서부터 허리까지 촘촘히 박힌 진주 단추는 그 오묘함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쥬넬. 이걸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고?”

금사를 온 드레스 가득 수놓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 하루 만에 만들었다고 하기엔 그 완성도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저 쥬넬의 역작이랍니다. 마이뮤즈의 성공적인 데뷔를 기원하는 선물이에요홍.”

“고마워 쥬넬.”

“머리는 풀어 놓으시는 것보다 하나로 틀어 올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공작님께서 보내오신 진주 귀걸이를 하시면 너무 아름다우실 거예요. 목걸이는 드레스 자체로도 너무 아름다워서 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실 것 같고….”

드레스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가장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메리였다. 그녀는 모시는 주인이 오늘 파티에서 최고로 아름답고, 완벽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들떠있었다.

라이언은 오늘 파티에 착용하길 바란다며 진주 귀걸이를 보내왔다. 미리 쥬넬을 불러 드레스의 디자인을 파악하고 선택한 선물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섬세하고 배려가 깊었다. 그리고 여전히 선물에 후했다.

금사로 수를 놓은 드레스는 공작부인의 사교계 데뷔무대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일반적으로 데뷔탕트들이 정숙한 드레스를 입는 것처럼 리아의 드레스 또한 제대로 드러내놓고 노출을 한 곳은 전혀 없지만, 망사 아래 비치는 뽀얀 살결이 레이디들의 대놓고 야한 드레스보다 더 아찔했다.

그녀의 드레스는 고급스럽고 단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섹시했다.

직접 만든 장미 오일로 부드럽게 마사지한 피부 위로 쥬넬의 황홀한 드레스가 마치 한 몸처럼 어우러졌다.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그녀를 더 신비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메리는 마술 같은 솜씨를 부렸다. 리아의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이 작은 다이아가 촘촘히 박혀 반짝이는 보석 핀 아래 하나로 틀어 올려졌다.

“완벽해요.”

메리는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그녀의 기억은 처음 공작부인의 목욕시중을 들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삐쩍 마르고 볼품없던 공작부인은 마치 그랬던 적이 언제 있었냐는 듯 완벽한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

“고마워 메리.”

리아가 메리를 돌아보며 싱긋 웃자 급기야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찍어댔다.

“그렇게 감격스러워?”

“너무 아름다우세요. 예전에 모습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요.”

리아는 지금 메리가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 역시도 거울에 미친 자신의 모습이 꿈같았다.

“어서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시계를 보며 정신을 차린 메리가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리아의 키에 딱 맞춘 드레스는 그녀가 걸을 때마다 바닥을 스칠 듯 말 듯 살랑거렸다.

“공작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는데?”

“주인님은 계단 밑에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외부에서 열리는 파티를 참석하실 때는 계단 밑에서 만나는 게 관습이에요.”

리아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이 나라는 따지는 것도 많고 이상한 관습도 참 많았다. 그게 또 관습이라면 따라야지 어쩌겠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하고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싶은데 자꾸만 심장이 콩닥거렸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설레지만, 오늘은 특히 더했다.

그토록 궁금했던 사교계란 곳을 경험하는 날. 수많은 귀족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었다.

“마님. 제가 열어드릴게요.”

뒷정리를 하고 있던 메리가 다급히 외쳤지만, 리아는 그까짓 문 정도야 누가 열면 어떠냐며 직접 문고리를 돌렸다.

열린 문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가슴에 새빨간 장미를 꽂은 라이언이.

리아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세상에… 그는 너무 멋있었다. 가르마를 타 뒤로 넘긴 머리는 그의 시종 존이 어떻게 솜씨를 부린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아름답군.”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라이언이었다. 그는 리아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며 손을 내밀었다.

“당신도요.”

리아가 대답했다. 그 역시 아름다웠다. 다만 이마에 흉터가 거슬렸지만, 리아는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흉터가 없었다면 얼마나 더 완벽했을까! 다른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닿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불쾌해졌다. 가뜩이나 요즘 들어 흉터가 옅어지는 것 같은데….

머리를 길러 흉터를 가리라고 했던 말은 취소였다. 흉터라도 있어야 안전할 것 같았다. 사교계의 수많은 레이디들로부터….

“계단 밑에서 만나야 한다던데요. 왜 여기까지 왔어요?”

라이언은 처음부터 계단 밑에서 기다릴 생각 따윈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리아를 보고 싶었다.

“글쎄. 기다리기 지루해서.”

내민 라이언의 손 위로 리아가 손을 겹쳐 올리자 그는 그녀의 손을 그대로 가져가 입을 맞췄다.

“당신에게서 향기가 나는군.”

“장미 오일이에요.”

“장미 오일?”

“한번 만들어 봤어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나 보군. 매튜가 아주 좋아하겠어.”

리아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팔뚝 위에 올려놓고는 옆에 나란히 선 그녀의 목덜미 위로 얼굴을 가져다 대며 향기를 맡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달콤해서.”

“그만 가요.”

“가고 싶지가 않군. 드레스가 너무 야한 것 같지 않나?”

팔을 잡아당기는 리아를 향해 그가 투덜거렸다.

처음 봤을 때는 잘록한 허리와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디자인에 혹해서 몰랐는데 그녀의 드레스는 정숙한 척만 하고 있었다.

“요즘 유행이래요. 이 정도면 많이 가린 거 아닌가요?”

리아가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쥬넬을 혼내야겠군. 이러라고 돈을 준 게 아니야.”

“쥬넬은 보너스를 줘야 해요.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 줬잖아요. 그런데 그 꽃은 뭐예요?”

가슴 포켓에 꽂아놓은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보며 리아가 물었다.

라이언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결혼한 남자라는 뜻이지. 결혼한 남자는 가슴에 꽃을 꽂게 되어 있어.”

“그것참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 가장 좋은 관습이네요.”

“그렇다고 해서 신경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긴 하지. 형식적인 거야.”

귀족들은 형식적인 것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형식은 형식일 뿐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공작님. 계속 그렇게 인상을 쓰고 계실 거예요? 알고 보면 진짜 투정 잘 부린다니까.”

“투정?”

리아가 더 세게 팔을 잡아끌자 라이언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 딱 쓰여 있어요. 나 파티 가기 진짜 싫다! 라고.”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그가 다시 말했다.

“좋아하는 척까지는 차마 못 하겠군.”

“웃으라곤 하지 않을게요.”

아무래도 인상을 쓰고 있는 편이 여자들의 관심을 쫓기에 좋았다.

“아무리 봐도 드레스가 너무 야하군.”

리아의 머리 위에서 그녀의 가슴 쪽을 내려다보며 라이언이 자꾸만 투덜댔다. 얌전한 척 위장을 했지만 그게 더 호기심을 불러올 정도로 그녀의 드레스는 관능적이었다.

그가 발견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른 남자의 시선이 리아의 가슴 근처에 닿는다는 생각을 했을 뿐인데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다른 여자들은 완전히 내놓고 다닌다니까요!”

“유행을 따르는 것은 싫다고 하지 않았나?”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라이언은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다.

“그래서 결론은 예쁘다는 거죠?”

그는 마차 문을 손수 열어 주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아름다운 그녀를 혼자만 보고 싶었다. 그대로 침실로 끌고 들어가 온몸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맡고 싶었다. 허리부터 이어진 진주 단추를 하나하나 풀고 싶었다.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고 완벽하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헤집고 싶었다. 조잘대는 입술을 한입에 먹어버리고 싶었다.

파티 따위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리아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며 심호흡을 했다. 몇 시간만 참으면 돌아올 수 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을 망칠 수 없었다. 이미 무도회 참석을 허락했고 지금에 와서 못 가게 할 방법도 마땅히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우리라.

“제발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부탁인 듯 명령 같은 말을 내뱉으며 라이언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리아의 옆에 가까이 붙어 앉으며 그녀의 허리 위로 손을 둘렀다.

곧바로 마차가 출발했다.

러셀 후작의 무도회는 올 시즌 들어 가장 규모가 큰 파티였다. 규모뿐만 아니라 참석자 또한 화려했다. 들리는 말로는 초대장을 얻기 위해 귀족들 사이에 경쟁이 붙을 정도라고 했다.

모든 것은 베드포드 공작 부부가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러셀 후작과 조금이라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파티 초대를 원하는 서신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 초대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렌포드에 머무는 모든 귀족과 자산 깨나 있다는 젠트리들의 관심이 오늘 밤 파티에 쏠려있었다.

무도회는 보통 저녁 8시 이후 완벽하게 어둠이 깔리고 난 뒤 시작되어 새벽까지 이어졌다.

리아와 라이언이 집을 나선 시간은 10시 정도였다. 더 일찍 가고 싶다는 리아의 바람은 라이언의 단호한 거절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의 계획은 10시경 파티에 참석해서 12시가 되기 전에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매우 단순하지만, 어찌 보면 거창했다.

그러나 늘 계획은 어긋나기 마련이고 변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러셀 후작을 아세요?”

“조금은.”

“그의 손자는요? 손자를 소개하는 파티라고 하던데.”

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언이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어 그녀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꼭 내 옆에 붙어있으시오. 특히 러셀 후작의 손자 근처에는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아.”

“왜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사고 이후 첫 외출이었다.

보는 눈이 많기에 범인이 근처에 있다 해도 몸을 사리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지만 그래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범인은 오늘 참석하는 귀족 중 한 명일 수도 있고, 어쩌면 파티에 하인으로 위장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러셀 후작의 손자인 블랙무어는 위험했다. 그는 후작의 손자인 동시에 렌포드 밤거리를 지배하는 악당이기도 했다.

“그냥… 사고가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잖소. 모르는 사람 근처에는 가지 않는 게 좋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하, 온통 모르는 사람 천지일 텐데…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제 어깨 위에서 손 좀 치워주시겠어요? 좀 아프네요.”

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힘이 실린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를 꼭 쥐고 있었다.

라이언은 황급히 손을 떼어내며 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아파서 쓰러질 정도는 아니에요. 파티에는 무리 없이 갈 수 있고, 당신과 왈츠 또한 출 수 있답니다. 이제 불평불만은 그만 하세요.”

“내가 언제.”

“지금까지 계속 그랬잖아요. 그만 긴장 풀고 날 믿어요.”

리아가 라이언의 얼굴로 손을 올려 다정하게 볼을 쓰다듬으며 눈을 깜빡였다. 손바닥 아래 결혼반지가 그의 볼에 닿는 것이 느껴진 라이언은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그래 별일이야 있겠어. 모두에게 아내를 소개하고 춤을 추고 파티를 즐기고 집에 돌아오는 거야.

볼 위에 얹어진 리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며 라이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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