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대 눈동자에 비친
이든로즈홀은 애초에 사교계 시즌을 위해 지어진 저택이었다. 렌포드에 있는 그 어떤 저택보다도 규모가 컸는데 전대 베드포드 공작이 어린 아내 테사를 위하여 몇 년에 걸쳐 지은 곳이기도 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테사는 이든로즈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라이언이 수많은 공작가 저택 가운데 오직 이든로즈홀만을 되찾은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 테사가 한 번도 머물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며칠간 집 안에만 있었던 탓에 리아는 어렵지 않게 댄스홀을 찾을 수 있었다. 댄스홀은 넓기도 넓었지만, 사방에 문이 달려있어 파티를 열기에 손색이 없는 장소였다.
언젠가, 이곳에서도 파티가 열리게 될까?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눈이 부신 천장을 올려다보며 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점점 익숙해지는 이곳에서의 생활은 리아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소속감 또한 그중 하나였다.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보다 더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동생이었다는 사실. 손끝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존재의 이유. 삶의 의미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원래의 자리를 찾아왔다는 안도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자신이 본래 누려야 할 삶이었다. 이제 다시는 뒤바뀌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세상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시간이 아까웠다. 이곳 이 세상을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저택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문제는 남편이었다. 그는 역시나 알듯 말 듯 여전히 어려운 남자였다. 다만 한 가지 정확하게 알게 된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정하다는 것뿐.
리아는 천장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려 댄스홀 한쪽 끝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도착한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무언가에 열중이었다.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를 보자마자 또다시 심장이 요동을 쳤다.
따라온 메리가 먼저 인기척을 내기 위해 한 발짝 앞장서자 리아는 손을 흔들며 메리를 말렸다.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은 혼자였다. 그녀 역시 혼자이고 싶었다.
리아가 흔든 손짓의 의미를 알아차린 메리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방을 빠져나가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제 댄스홀 안에는 리아와 라이언 단 둘뿐이었다.
정원으로 향하여 열린 창문 사이로 간혹 나비 몇 마리가 장미 향기를 맡으며 춤을 추듯 날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여전히 라이언은 그 자세 그대로였다. 무얼 하는 거지? 리아는 궁금해졌다. 그녀는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건 뭐죠?”
커다란 물건 앞에 서 있는 라이언을 보며 리아가 물었다. 라이언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살짝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춤을 추려면 음악이 필요하지.”
리아의 얼굴보다 큰 나팔 같은 것이 달린 물건이었다. 마치 축음기 같은? 축음기인가? 의아한 그녀의 표정을 알아챘는지 라이언이 다시 말했다.
“악단을 불러 연주를 시킬 수는 없지 않나?”
리아가 라이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래서 이게 뭔가요? 혹시 음악을 연주해 주는 기계인가요?”
“어때?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더군. 이 원반처럼 생긴 걸 올려두고 이렇게 하면.”
라이언이 기계를 작동하자 리아의 예상처럼 음악이 흘러나왔다. 축음기가 맞았군.
“신기하지 않나?”
신기한 척을 해야 하는 걸까? 그래 신기한 척을 해야 하는 거겠지. 그의 표정은 마치 굉장한 발견이라도 한 것같이 신나 보였다. 그녀의 놀란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 그러게요. 와! 이런 것도 있구나!”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언의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자랑스러움이 온 얼굴에 가득 차서 이것 좀 봐 신기하지 하는 표정.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리아는 자연스럽게 라이언의 손을 잡았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샀지.”
“비쌀 것 같은데.”
“무척.”
그녀가 보기에는 아주 깨끗한 골동품처럼 느껴지지만, 자랑스러워하는 라이언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좋네요. 멋져요. 음악도 좋고.”
“그래서 춤을 출 준비는 됐나?”
라이언이 고개를 내려 리아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바로요? 지금 당장?”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지 않나? 당장 내일이 무도회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바로 손을 잡고는 무도회장 가운데로 끌고 가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투덜거렸지만, 그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왜? 이제 와서 하기 싫은가? 그럼 내일 무도회는 안 가도 되겠지?”
“아니 왜 사람이 말을 끝까지 안 들어요. 언제 안 한다고 했나?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잖아요.”
자고로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왜 저렇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지 모르겠다. 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춤추러 여기까지 온 건데 좀 이따가 추나 지금 추나 무슨 상관이야. 리아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선생님. 무슨 춤부터 알려 주실 거죠?”
“지금 들리는 것처럼. 당연히 왈츠.”
깨끗한 골동품 같은 축음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왈츠라니?
“왈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허리를 잡아끌었다.
누가 그랬던가! 왈츠는 가장 낭만적인 춤이라고. 맞는 말이었다. 정말이었다. 왈츠만큼이나 서로의 체온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춤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서로의 몸이 한껏 달라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리아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배운 적이 있군.”
그녀의 몸이 다시 그에게 달라붙었을 때 그가 말했다. 그냥 잡아당기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리아는 자연스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하게.
“타고난 리듬감이 좋아요.”
“오래 가르칠 필요가 없겠군.”
라이언의 입가에 미소가 음흉했다.
“오래 배우고 싶은데요? 이거 말고 다른 춤도.”
“당신은 왈츠만 배우면 돼.”
“네?”
바깥쪽으로 손을 쭉 뻗었다 다시 그를 향해 끌리듯 달라붙으면서 리아가 물었다. 왈츠만 배우면 된다니? 춤이 왈츠밖에 없단 말이야?
“당신은 오직 나하고 왈츠 한 곡만 추면 돼. 그거면 충분해.”
격한 움직임으로 인해 숨을 헐떡거리는 리아의 귓가에 라이언이 속삭였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그리고 가슴이 떨렸다. 오직 당신하고 왈츠 한 곡만 추라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유혹적인 그의 행동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며 그녀를 홀리고 있었다. 누가 넘어가나 봐라.
그는 파티에 가서 왈츠 한 곡만 추고 난 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파티에 참석했고, 춤도 췄으니 뭐가 문제냐고 할 사람이었다.
춤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전히 음악은 감미로웠고, 그와 몸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에로틱한 춤. 그와 함께여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라이언이 리아를 잡아당겨 품 안에 가뒀다.
“하아… 하아….”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 리아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와 처음으로 함께 추는 댄스, 마주 닿은 몸, 허리에 감겨있는 손길. 모든 것이 리아의 호흡을 가쁘게 만들고 심장을 뛰게 만들고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전혀 춤이라고는 출 것 같지 않은 남자의 왈츠. 그것만으로도 리아의 가슴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둘이 함께 몸을 움직였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다만 그 역시 그녀와 같은 상태라는 것은 그녀의 귓가에 닿은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가슴에 그녀가 고개를 대고 숨을 고르는데 갑자기 그녀의 정수리 위로 무게가 느껴졌다. 그가 얼굴을 내려 턱을 머리 위에 올려놓은 탓이었다.
“우리 둘뿐이군.”
라이언이 닫힌 문을 스윽 쳐다보더니 리아를 향해 말했다.
“춤은 그만 춰도 되겠어. 이대로도 충분해.”
그녀의 등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손이 조금씩 척추를 따라 위로 올라가더니 결국은 어깨를 움켜잡았다.
“아얏….”
갑자기 꽉 움켜잡은 어깨에 통증이 일자 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냈다. 그와 동시에 라이언이 그녀의 몸을 품에서 떼어냈다.
왜 그러냐고 투정을 부리기 위해 리아가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라이언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내려오며 순식간에 벌어진 그녀의 입안으로 뜨거운 숨결을 밀어 넣었다.
여전히 그의 손은 그녀의 어깨를 꼭 쥐고 있었지만, 이제 더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온몸의 신경이 마주 닿은 입술과 입속을 달콤하게 휘저어대는 그를 향해 있었다.
그는 무자비했다. 한 번도 키스 따윈 해 보지 않은 사람처럼 거칠게 그녀를 휩쓸었다. 그 열기에 리아는 다리가 후들거려 몸이 휘청댔다.
왈츠를 낭만적이고 에로틱한 춤이라고 느낀 것은 그녀뿐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역시도 춤을 추는 내내 같은 생각을 했을까? 몸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아쉬움을 느꼈을까?
어깨를 잡았던 손은 어느새 움직여 한쪽은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고 다른 한쪽은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허리를 휘어잡았다.
온 입안을 헤집으며 뜨거운 숨을 곳곳에 불어넣던 그가 갑자기 입을 떼어내더니 리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뭐, 뭐예요…?”
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직도 진한 키스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듯이.
“자세가 불편해서.”
당당하게 말을 내뱉은 라이언은 리아를 근처 테이블 위에 올려 앉혔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섰다. 이제 그녀의 시선이 그보다 위로 올라갔다.
가만히 올려다보는 그를 향해 그녀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요?”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 부근을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그냥 느낌일 뿐일까? 말없이 올려다보는 그의 까만 눈이 무얼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으면서도 부끄러웠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을까. 창밖으로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마지막 햇살을 뿜어내듯이 멀리 사라지는 해는 더 반짝이며 빛을 냈다.
“당신이랑 있으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리아의 보석같이 빛이 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라이언은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그건 정말이었다. 처음 왕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내를 찾아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내와의 동침을 위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었다. 그에게는 내키지 않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해낼 만큼 모엘르 검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검을 잊은 지 오래였다. 모엘르 검이 없이도 평온해질 방법을 찾았다. 아내와 함께 있으면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춤을 추는 검은 사자라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를 사랑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날 베드포드 성 앞에서 아내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저도요.”
작은 입술에서 오물대듯 꺼낸 대답에 라이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내의 모든 것이…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그를 자극하고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녀가 없던 이전의 그의 모습이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키스해 줘.”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가 변했다. 까만 건 변함이 없었지만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며 떨리고 있었다.
라이언의 변화에 리아는 감격했다. 어둡고 짙은 새까만 밤과 같던 그의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생각했었다. 이 남자의 눈동자도 사랑에 흔들리는 날이 올까? 내가 이 남자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던 그녀의 바람이 이뤄졌다.
그의 눈을 내려다보며 리아는 코끝이 찡했다. 사랑이 뭐냐고 묻던 과거의 그가 마치 오래전 꾸었던 꿈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서 대답도 행동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그가 다시 그녀를 재촉했다.
“키스해 줘.”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리아는 손을 들어 올려 라이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이 닿자 그가 긴장을 했는지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리아는 라이언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참았던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눈물은 그녀의 뺨을 타고 그의 얼굴로 번져나갔다.
열린 창밖의 붉은 노을이 사라지고 새까만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인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인 것처럼. 서로의 뜨거운 숨결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