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사교계 입성을 위한 준비
사교계가 렌포드로 그 거취를 옮겨온 지 한 달째였다. 엘리시아의 달력은 리아가 알던 기존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1년은 12달이었고, 1달은 30일이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도 같았다. 이곳의 기본은 그녀가 살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교계는 보통 3월에 시작되어 9월경 막을 내렸다. 그중 마지막 3개월은 수도 르셀을 떠나 렌포드에서 보냈는데 특별히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시아의 날씨는 1년 내내 따뜻하고 좋았지만, 계절별로 조금씩 그 정도가 달랐다. 이곳 역시 4계절이 존재했는데 여름과 겨울은 평소보다 조금 덥고, 조금 더 서늘했다.
그래서 여름에 해당하는 7, 8, 9월에는 수도 르셀보다 북쪽에 위치해 날씨가 좀 더 시원한 렌포드로 휴양을 가게 된 것이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하나의 규칙처럼 정해져 매년 변함없는 행사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귀족들에게는 집이 총 3채가 필요했다.
엘리시아 전역에 퍼져있는 각자의 영지에 위치한 컨트리하우스, 수도 르셀에 위치한 타운하우스, 그리고 렌포드에 위치한 미들하우스가 그것이었다.
시즌이 끝난 가을, 겨울 동안 컨트리하우스에서 사냥하거나 사람들을 초청해 가든파티를 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봄이 오면 하나둘 르셀로 모여들어 타운하우스에서 봄을 보내고 여름이 시작되면 렌포드, 미들하우스로 자리를 옮기는 식이었다.
남자들은 그 사이사이 의회 활동을 하고, 영지관리를 하거나 사업을 하는 등 재산관리에 힘썼지만, 부인들의 생활은 1년 내내 비슷했다.
사실 귀족들 전부가 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운하우스와 미들하우스는 각자의 재력에 따라 그 소유 여부가 달라지기에 재산이 없는 귀족들은 시즌별로 저택을 임대하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귀족들 말고도 호시탐탐 사교계의 진입을 노리는 젠트리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매 시즌마다 괜찮은 집을 빌리기 위한 렌탈전쟁은 장난이 아니었다.
리아는 그 모든 것들이 그녀가 살던 세계의 중세 유럽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명칭이라던가 풍습 등이 매우 비슷했다.
특히나 사교계 시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랬다.
사교계라는 곳은 참 복잡했다. 리아는 그녀의 호출에 득달같이 방문한 디자이너 쥬넬을 통해 이런저런 사항들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그런 쪽으로는 아는 게 많았다.
“마이 뮤즈. 이 쥬넬이 참 고민이에요옹. 보통은 첫 데뷔 시즌에는 티끌 하나 없는 하얀 드레스를 입는 것이 정석이지만… 이미 결혼을 하셨으니 꼭 그러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
“당장 내일이 무도회인데 하얀 드레스가 준비된 거야? 그냥 기존에 만들어 둔 것 중에 하나 골라 입자.”
“저 쥬넬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런 건 걱정도 하지 마세요. 흐음… 다만….”
“다만?”
쥬넬이 방 한가운데 리아를 세워놓고 주위를 한 바퀴 미끄러지듯 돌더니 손뼉을 딱 쳤다.
“살이 좀 찌셨군요. 원더풀. 딱 보기 좋아요!”
쥬넬의 지금 딱 보기 좋다는 말은 여기서 더 찌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몸에 딱 붙은 드레스를 잡아당겼다.
“내일 오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제가 마이뮤즈를 위해 최고의 드레스를 만들어 오겠어요.”
리아의 사교계 첫 데뷔를 위해 아마도 쥬넬은 오늘 밤 한숨도 자지 못할 것이었다. 제임스와 함께 정한 내일의 무도회는 러셀 후작의 주최였다.
러셀 후작은 최근에 잃어버린 손자를 다시 찾았는데, 그 손자를 세간에 소개하기 위해 여는 무도회였다. 귀족들은 늘 가십을 좋아했고 러셀 후작의 무도회에는 올 시즌을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것이 분명했다.
쥬넬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오홍홍 웃으며 이든로즈홀을 빠져나갔다. 그에게 여러 가지로 사교계 시즌에 대해 배운 것이 많았다. 후계자를 낳게 되면 서로 간에 애인을 두는 것도 용납한다고? 완전 미친 사교계였다. 엉망진창이야. 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사교계라는 곳은 참 궁금하면서도 위험한 곳이었다. 부부끼리 서로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납하는 곳이라니.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었다.
리아는 빨리 집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아침 일찍부터 라이언을 협박하다시피 유혹해서 얻어 낸 자유였다. 벌써 시간은 점심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녀는 마음이 급했다.
렌포드 거리를 구경하고, 쇼핑도 하고 싶었다. 이곳 엘리시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답답한 집에서 탈출하는 게 먼저였다. 그녀가 그동안 바깥 구경을 한 것이라고는 정원을 산책하는 정도가 다였으니….
점심을 먹고 나면 곧바로 외출하리라! 리아는 의지를 불태우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라이언은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쥬넬은 잘 만났나?”
넬슨이 빼주는 의자에 앉는 리아를 향해 라이언이 물었다.
“그럼요. 여전히 시끄럽지만, 그것도 오랜만에 보니 반갑더라고요.”
“나한테도 와서 수다들 떨다 가더군.”
쥬넬은 라이언에게도 들려서 무도회를 위한 의상을 준비해 오겠다며 한참을 떠들었다.
“고마워요. 무도회에 함께 가 주시는 거죠?”
그녀의 말에 대답 없이 살짝 웃는 라이언의 모습이 묘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는 분명 약속을 했다. 무도회에 함께 가 주겠다고. 참석해도 된다고.
“그런데 춤은 출 줄 아나?”
“춤이요?”
무도회에서 춤을 춰야 하는 걸까? 쥬넬이 그런 이야기까지는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리아는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파티는 댄스를 동반한다는 것을. 너무도 기본적인 사항이라 쥬넬은 거기까지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거였다.
“데뷔파티인 셈인데 춤을 못 춘다니… 데뷔를 하는 여인은 꼭 춤을 춰야 한다고 알고 있소. 아무래도 내일은 무리겠군.”
오호라,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 싫어서 트집을 잡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누가 겁낼 줄 알고! 그까짓 춤은 배우면 그만이었다. 그녀에게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있지 않은가!
리아는 전생에 춤이란 춤은 모두 배웠었다. 어떤 배역에서 무엇을 필요로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건 기본적인 트레이닝이었다.
하지만, 이곳 엘리시아의 무도회에서는 어떤 춤을 추는지는 알지 못했다. 타고난 리듬감이 있으니 까짓 거 오늘 하루 배우면 못할 일도 아니다.
“배우죠. 어려운 것도 아닌데 오늘 배워서 내일 추면 되겠네요.”
말을 꺼낸 그의 의도를 한참 빗나간 대답이었다. 하루 만에 춤을 배워서 추겠다니. 역시나 늘 라이언의 예상을 뛰어넘는 리아였다.
“당장 배우겠다고?”
“전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파티에 꼭 참석을 할 거예요. 수작 같은 건 부리지도 마세요.”
포크로 샐러드를 콕 찍으며 리아는 웃는 얼굴로 그를 향해 경고했다. 지금 그에게 넘어간다면 아마도 평생 파티 따위는 구경도 못 하리라.
“하루 만에 그게 될까?”
리아의 이상한 자신감을 그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당연하죠. 그러는 당신은요? 당신은 춤을 출 줄 아나요?”
물론 그는 춤을 잘 췄다. 어릴 적 기본 소양 교육을 통해 다 배운 것들이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걸음마를 시작하고부터 가정교사를 두고 필요한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것은 공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교계 예절과 춤도 포함이었다. 딱히 춤이라는 것을 춰야 할 이유가 없기에 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까먹지는 않았다.
“물론 아주 못 추지. 안타깝게도 당신은 하루면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불가능하다오.”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꼭 당신이랑 춤을 춰야 하는 것도 아니고.”
리아는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입을 삐죽댔다. 그런 얕은수에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분명 그는 자신이 춤을 못 춘다고 하면 내일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을 미룰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었다.
“나랑 안 추면?”
“남자는 많잖아요. 사교계 데뷔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하는 거고. 꼭 춤을 춰야 하는 사람도 나니까… 뭐, 당신이 춤을 못 추는 것은 상관없죠.”
라이언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럼 다른 남자와 춤을 추겠다고? 그녀가 낯선 사내와 왈츠를 추는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상상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치는 것은 물론이었다.
“혹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아니죠? 아까 분명 파티에 같이 가 주겠다고 했어요. 기억하죠?”
라이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콤한 그녀의 속삭임에 잠시 미쳐있었다. 당연히 안 된다고 해야 했던 건데… 그녀의 체온이 온몸에 느껴지는 순간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고야 말았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춤을 배운 기억이 나는군.”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게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자 라이언은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끝까지 춤을 추지 못하는 척하면 그녀는 분명 그 말고 다른 남자와 춤을 추고도 남을 것이다.
라이언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늘 그녀에게 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왠지 앞으로도 평생 그녀에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럼 당신이 제 선생이 되어 주시면 되겠군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춤 선생님이 계시다니. 전 참 행운아네요. 그럼 선생님 수업은 이따 밤에 하는 게 어때요? 제가 외출을 해야 해서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부 다 당할 수만은 없지.
“지금 당장 하고 싶군.”
“지금 당장이요?”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게 싫으면 무도회를 포기하던지.”
외출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가 뻔히 보였지만 리아는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나를 얻으려면 그녀 역시 그에게 무언가를 내어주어야 했다.
“뭐, 좋아요.”
외출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러셀 후작의 무도회는 내일 하루뿐이었다. 사교계라는 곳이 얼마나 대단한지 빨리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직접 춤을 배운다니…. 더군다나 그가 자신을 두고 질투라는 것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니 심장이 다시 간질거리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른 사람과 춤을 추겠다고 했을 때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왜 조금밖에 안 먹지?”
평소보다 음식을 조금밖에 먹지 않는 리아를 향해 라이언이 물었다.
“살이 쪘어요.”
“누가?”
“저요.”
“어디가?”
라이언의 뜨거운 눈빛은 그녀의 온몸을 훑고 내려갔다.
“딱 봐서는 모르겠지만, 체중이 많이 늘었답니다.”
“내가 보기만 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워하는 리아를 보며 라이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 드시오. 당신은 아직 너무 가늘어.”
그의 눈빛이 특정 부위에 살짝 머물렀다가 빠르게 흩어졌다는 생각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그의 집요한 시선에 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다이어트를 하려 했던 것도 잊은 채 묵묵히 점심을 전부 다 먹고 말았다.
***
그녀가 머물고 있는 이든로즈홀은 렌포드에 있는 그 어떤 귀족의 미들하우스보다 규모가 컸다. 로즈홀이라는 이름답게 주변에 장미나무가 가득한 집은 무척 아름다웠다.
식사를 마친 리아는 방으로 돌아가 메리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가져온 드레스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갑자기 결정된 댄스강습은 그녀를 들뜨게 하고 있었다.
“공작님은 너무 낭만적인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라이언은 메리에게 낭만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었다. 리아가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했을 때 라이언이 보여준 모습들은 하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다.
무섭기만 했던 주인의 색다른 모습을 알게 된 그들은 전보다 더 주인께 충성을 맹세하며 그를 우러러봤다. 그리고 멀게만 느껴졌던 검은 사자가 가깝고 친근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마치 제임스를 찬양했을 때와 같은 얼굴로 메리는 라이언을 칭찬했다.
“낭만?”
“직접 춤을 가르쳐 주신다니. 이보다 더 다정하실 수가!”
춤 선생을 따로 부르지 않고 직접 알려 주겠다고 한 것에는 다른 사람이 리아의 몸을 만지는 것이 싫은 라이언의 질투심이 크게 한몫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메리는 주인의 다정함을 찬양했다.
질투심과 다정함을 같은 선상에 놓아야 하는 걸까? 리아는 라이언의 속을 파악하려다가 이내 포기를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쪽이든 상관없었다. 둘 다 긍정적인 변화였고 희망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는 생각보다 더 훌륭한 남편이 될 자질이 충분했다. 리아는 흡족함에 미소를 지었다.
사랑을 달라고 했더니 그는 정말 넘칠 만큼 주고 있었다. 아닌 척 말하지만 결국 행동은 모두 한결같았다.
“츤데레도 그런 츤데레가 없다니까.”
“네? 뭐라고 하셨어요?”
댄스홀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던 메리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리아를 향해 되물었다.
“네 말처럼 공작님은 참 다정하시다고.”
메리는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