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엘리시아 최고의 미녀
리아가 라이언으로부터 외출을 허락받은 것은 사고가 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단호했다. 그녀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허락 따위는 상관없이 외출할 수도 있었지만, 옆에서 챙겨 주는 라이언이 좋아서 리아는 투덜대면서도 그의 말을 따랐다.
그동안 이든로즈홀로 수많은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지금 렌포드는 수도 르셀에서 옮겨온 귀족들로 정신없이 북적대고 있었다. 막 새로운 사교계 시즌이 시작된 참이었고,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단연 베드포드 공작 부부였다.
렌포드로 오는 길에 사고를 당한 공작부인은 귀족들 사이에서 어느새 가련한 여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남보다 특별한 것을 좋아했고 리아의 모든 행적은 그들의 기호에 안성맞춤인 셈이다.
엘리시아의 하나뿐인 공주, 검은 사자의 부인, 그리고 죽을 뻔한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여자. 공작부인을 만나봤다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것도 사교계에 호기심을 부추겼다.
여관에서 공작부인을 처음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녀의 미모를 칭찬했고, 그 소문은 커질 대로 커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원래 기억은 조금씩 미화되는 법이었다.
이미 사교계에서 레오니 엘리시아 베드포드 공작부인은 엘리시아 최고의 미녀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흉포한 검은 사자를 순하게 길들여 사랑꾼으로 만든 미녀 공작부인. 그게 바로 리아였다.
“이제 외출을 허락하시는 건가요?”
이든로즈홀, 라이언의 서재 안에서 리아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너무 멀쩡하다는 것을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자꾸만 외출을 미루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더는 참지 못하고 들이대는 참이다.
지난 일주일은 그의 보살핌과 관심이 좋아서 참고 또 참았다. 그렇지만 인내의 시간은 오늘 아침으로 끝이 났다. 그토록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그는 밤이면 밤마다 그녀를 탐하며 괴롭혀댔다. 이 얼마나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이란 말인가! 결국 리아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서재 책상에 앉아 한가하게 오전 업무를 보고 있던 라이언에게 결국 리아가 무섭게 들이닥쳤다. 그녀는 온몸으로 더 이상 집안에 갇혀 있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찡그린 이마, 강하게 힘을 준 두 눈,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까지.
이제 라이언에게는 더 이상 그녀를 집 안에 머물게 할 핑계가 없었다.
그녀가 너무도 멀쩡하다는 것을 매일 밤 온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회복되지 못한 건강 탓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라이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녀를 해치려 한 범인이 누구인지 가닥도 잡지 못했지만 더는 그녀를 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사고를 낸 마부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었다. 그렇지만 이미 범인의 죽음과 검은 기사단의 움직임을 목격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 사실은 금방 리아의 귀에 들어갔다.
메리나 집안 식솔들의 입까지 단속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가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리아는 범인이 죽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가 살해를 당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범인의 뒤에 그를 조종한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라이언의 추측도 역시 모르고 있었다.
라이언은 리아가 두려움에 떠는 것을 원치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생각은 바뀌고 말았다. 평온하고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그녀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그녀가 누군지도 모를 적을 향해 움츠러들거나 고민하는 것은 싫었다.
그런 건 모두 자신이 하면 되는 일이었다. 배후가 누군지 고민하고, 방법을 찾고, 이유를 알아내는 것 따위는.
범인의 죽음 이후, 사건이 있었던 것도 잊을 정도로 세상은 너무 조용했고 집 안에만 숨어 있기에는 리아가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지금 고개 끄덕인 거 맞죠?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어요!”
“어딜 가려는 거지?”
“어딜 가긴요. 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제 앞으로 온 초대장 못 보셨어요? 여기저기서 절 만나고 싶다고 난리예요. 그리고 공작님의 절친한 친구이신 브렌트 남작님이 하루에도 몇 번씩 서신을 보내오고 계시는데… 언제까지 집에 못 오게 할 거예요?”
라이언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는 지난 일주일간 모든 방문객을 받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는 제임스와 페넬로페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임스까지 찾아오지 못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갑자기 범인이 살해당했고 정신이 없던 와중에 리아와 보내는 날들은 너무 달콤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을 만큼. 그것이 단 한 명뿐인 가장 절친한 친구일지라도.
“내가 서신을 보내지.”
“그럼 저 오늘 나갑니다.”
“오늘 바로?”
라이언의 얼굴에 이번엔 당혹감이 서렸다. 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몰래 웃음을 삼켰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그의 표정이 점점 다채로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쇼핑 및 맛집 탐방을 할 예정이고, 내일은 무도회에 참석해 볼까 해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쇼핑에 맛집에 무도회 참석이라니. 그녀의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 그의 걱정은 늘어날 것이 뻔했다.
“자꾸 그러니까 좀 수상하네요.”
리아가 라이언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며 책상 위를 손으로 툭툭 쳤다.
“수상하다니?”
라이언이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문지르며 리아의 행동을 살폈다.
“혹시….”
“혹시?”
“흐음….”
“흐음?”
리아가 라이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이건 진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돈… 아니다 아니야. 별거 아니에요.”
“뭐지? 말을 해.”
“아니, 뭐 그럼 계속 물어보시니까 그냥 말할게요. 저보고 별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자꾸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게….”
“하는 게?”
자꾸 뜸을 들이는 리아를 향해 라이언이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말이에요. 혹시나 나한테 수표장 줘 놓고 그거 쓰는 거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번에 깨어날 때도 뭐, 그걸 뺏는다느니 뭐라느니 했던 게 생각나기도 하고….”
“하!”
“아니에요?”
“아니야.”
“진짜로?”
라이언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아니야.”
“저도 아닐 줄 알았어요. 제가 아까 분명 ‘혹시나’라고 했죠?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자 그럼 이제 나가도 되는 거죠? 여기 쇼핑의 도시라면서요. 그리고 매튜가 절 여기까지 부른 이유도 있고… 그거 말고도 제가 할 일이 참 많아서요.”
“할 일이 많다고?”
이번엔 리아가 고개를 숙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그 소문 못 들으셨어요?”
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문? 감히 그에게 이런저런 가십 따위를 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메리가 그러는데 지금 렌포드에 난리가 났대요.”
“난리?”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거 조금 쑥스럽지만, 뭐 내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남들이 하는 말이니까.”
“오해 따윈 하지 않을 테니 말을 해 봐.”
“엘리시아 최고 미녀가 누군지 아세요?”
갑자기 리아가 질문을 던졌다.
“최고 미녀? 그게 누구지?”
“몰라요?”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최고 미녀라니 그런 사람이 있나?
“설마… 당신?”
“딩동댕.”
“뭐? 하하하하하…!”
갑자기 터진 라이언의 웃음이 서재 안을 가득 메웠다. 너무 유쾌하게 웃는 모습에 리아가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입을 삐죽댔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아니, 아니면 아닌 거지. 뭘 또 그렇게 웃어요? 내가 그러니까 분명 남들이 그냥 하는 말이라고 했잖아요.”
“지금 남들이 당신을 두고 엘리시아 최고의 미녀라고 한단 말인가?”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 그대로예요. 그래서 제가 좀 바빠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지만, 어디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래서 준비할 게 아주 많네요. 쥬넬도 자기 샵에 제발 와 달라고 난리고….”
렌포드로 오면서 가져온 옷이라고는 단순한 디자인의 드레스뿐이었다. 이곳에 도착해서 쇼핑할 생각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모든 일이 어긋나 버렸다.
당장 내일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마땅히 입고 갈 드레스가 없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아무리 소문이라지만 그녀에게는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라이언이 말했던 그 사교계라는 곳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제임스와 서신을 통해 계획을 다 짜놓은 상태였다.
내일은 사교계가 렌포드로 옮겨온 이래 가장 큰 파티가 열리는 날이라고 했다. 물론 그녀에게도 진작 초대장이 도착한 파티였다.
그녀의 사교계 데뷔 파티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제임스의 의견이 있었고, 리아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쥬넬을 만나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부터 차근차근 상의해야만 했다.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했던 것 말고도 리아는 또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바로 제 자리를 찾는 것.
완벽한 공작부인과 완벽한 공주가 되는 것.
하나뿐인 오빠를 만나는 것.
레오니의 엉망인 과거로 보았을 때 쉽지 않은 길이 되겠지만, 리아는 해낼 자신이 있었다. 모름지기 핏줄은 당기는 법이라고 모든 진실을 듣고 난 이후 그녀는 오빠라는 엘리시아의 왕이 궁금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엘리시아 최고의 미녀라는 소문에 부응하기 위해 오늘 쇼핑을 하러 가겠다는 말인가? 그리고 내일은 파티에 참석하고?”
라이언의 물음에 리아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찡그린 이마를 펴고 활짝 웃었다.
“바로 그 말이에요.”
“계획 한번 거창하군.”
“그 계획에 물론 당신도 포함인 거 아시죠?”
“나?”
“잊으셨어요? 전 단 한 번도 파티에 참석해 본 적이 없어요. 당연히 남편인 당신이 절 에스코트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리아의 말이 계속될 때마다 라이언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의 흉터 또한 같이 일그러진 것은 물론이었다.
“또 또 또!”
리아가 어느새 책상을 돌아 그가 앉은 의자 옆으로 다가섰다.
“인상 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역시 남자는 다 어린애나 다름이 없다니까. 도무지 말을 안 들어.”
그녀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문질러댔다.
“가뜩이나 당신 흉터 보고 겁먹는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자꾸 인상 써대면 이마에 주름져요.”
“겁이 나나?”
이마를 문질러 대는 리아를 그냥 둔 채로 라이언이 물었다.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요. 전 당신의 흉터도 사랑스럽지만, 남들 눈에는 안 그런가 봐요.”
흉터도 사랑스럽다? 리아의 말이 라이언의 심장에 박혀 들었다. 사랑스럽단 말이지?
“보기 흉하지 않아?”
“별스럽지도 않은 그냥 흉터일 뿐인데 다들 뭐가 그렇게 무섭다는지 모르겠어요.”
리아가 흉터 위로 손을 올려 문지르자 또다시 상쾌함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라이언은 그 편안함에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래도 일부러 내놓고 다닐 필요가 있나요?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 흉터 보고 무서워할 수도 있는 거고… 그냥 앞머리를 좀 기르는 건 어때요? 옆으로 살짝만 넘기면 더 멋있을 것 같은데….”
우리 아이…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아이라는 말이 그를 흥분케 했다. 그녀와 나의 작은 아이. 그녀를 닮아 사랑스러울 것이 분명한 우리의 아이.
그는 벌써 그녀와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이리 와.”
눈을 뜬 라이언은 리아를 단번에 안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 자꾸 이렇게 놀라게 하지 좀 말아요.”
“머리를 길러 볼까?”
그의 다정한 말투에 투덜대던 리아의 표정도 스르륵 풀어졌다. 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싫다고 하면 전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요.”
리아는 정말 괜찮았다. 그녀는 그의 흉터가 보기 싫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흉터는 그녀가 보기에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런 말을 한 것이 뿐이다.
“우리 아이가 날 무서워하면 어떻게 해?”
그녀가 직접 말을 할 때는 몰랐는데, 그의 입을 통해 아이라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건 그 말과 함께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꽉 잡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럼 길러 보던가….”
그녀가 새침하게 말하며 엉덩이를 살짝 흔들자 그가 웃으며 그녀의 가슴 가에 얼굴을 기댔다.
“당신은 너무 유혹적이야.”
그녀는 그를 더 꼭 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서 내일 무도회에 같이 갈 건가요?”
그는 대답 없이 끙 소리를 대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리아가 라이언의 서재를 빠져나와 외출 준비를 시작한 것은 그 뒤로 한참이 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