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순정남에 사랑꾼
깊은 밤. 저택은 고요했다. 며칠간 긴장감에 편히 쉬지 못했던 사람들은 모두 단잠에 빠져들었다.
공작부인이 깨어났다. 그것도 아주 멀쩡하게! 그 사실은 저택 안에 기거하는 모든 이에게 평온을 가져왔다.
그 고요함을 틈타 집안 가장 어두운 곳에서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구름에 가려 달빛조차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밤. 저택의 뒷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여깁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등장과 동시에 낯선 이 한 명이 다가왔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더군요. 그래놓고 여길 찾아오다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빠져나오느라 죽을 뻔했다고요. 그리고 잔금은 치러주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여자가 깨어났습니다.”
“네? 오면서 들은 소식으로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낯선 이는 바로 리아의 마차를 강물에 빠트린 장본인이었다. 마부로 위장해 사고를 저지르고 도망친 그는 좁혀오는 포위망을 피해 렌포드까지 몰래 들어와 이든로즈홀로 숨어들었다.
“몇 시간 전에 깨어났습니다. 지금 당신을 찾기 위해 사방에 검은 기사단이 쫙 깔렸는데 함부로 여길 찾아오시다니! 나까지 위험하게 만들 작정입니까?”
말을 하면서도 그는 주위를 계속 둘러봤다. 사방은 밤안개로 자욱했지만, 그는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 여자가 깨어나고 경계가 조금 느슨해진 탓에 이렇게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질 수가 있었다.
“찾아오질 않으면? 지금 제가 죽게 생겼는데…. 거 도망칠 경비는 주셔야 할 게 아닙니까! 저기… 그런데… 정말… 정말 깨어났습니까?”
낯선 이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마차 아래 무거운 돌을 달아맸다. 물에 빠진 후 떠오르지 않도록… 강물의 깊이까지 다 계산하고 꾸민 일이었다. 며칠간 어떻게 도망쳐 다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오직 여자의 죽음만을 빌며 찾아온 길이다. 의뢰 상대가 주기로 한 보수는 두둑했고 아직 잔금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깨어났습니다. 이젠 여길 찾아오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까지 곤란하게 할 참입니까? 당신이 실패한 탓에 일이 어렵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는 분노를 삭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자가 계획을 성공시켰더라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으로도 부족해 며칠 만에 깨어나다니. 괜히 공작의 성미만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더군다나 그냥 그런 줄 알았던 부부 사이도… 그게 아니었다. 공작은 여자를 매우 아끼는 것 같았다. 아니 아끼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실패했다고 잔금을 주지 못한다는 겁니까? 내가 누구 때문에 목숨을 걸고 일을 치렀는데…. 이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잔금은 주셔야죠.”
“그러니까!”
흥분으로 목소리가 커지자 그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주변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다. 하지만, 이든로즈홀의 경계가 느슨한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다. 여자가 깨어났고 공작은 이제 본격적으로 범인을 찾기 시작할 것이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벌써 기사단장들에게 지령이 내려왔다는 것도.
“성공하셨어야죠. 실패하시고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그의 목소리가 점점 음산해지는 것을 모르고 낯선 이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당신이 엄청나게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입만 뻥끗했다가는… 헉….”
갑자기 남자의 몸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그가 남자의 급소를 제압해 기절시킨 탓이었다.
“어디서 까불어. 쓰레기 같은 새끼. 일 처리도 제대로 못 하고 날 협박해?”
남자가 그를 불러낼 때부터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계획에 실패한 것으로도 부족해 저택까지 찾아오다니. 미친놈이 분명했다.
역시나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남자는 돈을 요구하고 협박까지 했다. 일 처리도 못 한 주제에… 분노가 그의 온몸을 타고 돌았다.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용만 당하고 대가도 받지 못한 남자는 이제 앞날을 장담할 수도 없게 되었다.
다행히도 남자의 몸은 작고 볼품이 없었다. 그는 쓰러진 남자의 몸을 들쳐메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며칠간 계속되고 있는 밤안개가 그의 행적을 가려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서 걸릴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일을 그르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목표는 이제 오로지 여자의 죽음뿐이었다. 너무 아량을 베풀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기 시작했을 때 죽였어야 했는데….
아니, 아니다. 처음 본 그 순간 죽였어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숨통을 끊어놨어야 했다.
이제 일이 어렵게 되었다. 한동안은 몸을 사리며 기회를 살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여러 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다. 한 번의 실패로 포기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년을 죽여 버리기 전엔 그에겐 평화란 없었다.
공작 부부가 머무는 이든로즈에 아침이 밝았다. 리아의 곁에서 단잠을 잔 라이언은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왔다. 물론 그녀의 이마에 입술로 아침 인사를 하는 것은 잊지 않은 채로.
세상모르고 잠이 든 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지난밤 아직 환자인 그녀의 몸을 격하게 탐한 게 후회되었다. 조금 참을 것을….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하는 손을 거둬들이며 라이언은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는 메리에게 마님을 깨우지 말고 잘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의 도움을 받아 씻고, 옷을 갖춰 입은 후 식당에 앉아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밖에 소란스러웠다. 그리고는 바로 식당 문이 열리며 집사 넬슨이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며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매튜님께서 급히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각하! 공작 각하!”
넬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비집고 매튜가 식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범인을 발견했습니다.”
“뭐?”
“오늘 새벽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하천에서 범인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매튜의 말에 라이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일찍 눈을 뜬 이유도 오늘부터 범인 수색을 제대로 해 볼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벌써 범인이 죽어?
“그자가 확실한가?”
“마부가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그 외에도 옷차림이라던가 여러 가지 정황상 그가 확실합니다.”
“사인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라이언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범인이 살해당했다. 그럼 그 말고 또 다른 범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공범일 수도 있고 그를 고용한 진짜 범인일 수도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그, 그게….”
“내가 분명 렌포드 구석구석을 수색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아는데?”
매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문밖에 서 있던 기사단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며칠 동안 밤마다 안개가 심하여… 그 틈을 타고 몰래 근처까지 온 것 같은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곳 근처까지. 그렇게 가까이 올 수 있었지?”
매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사실 지난밤은 저택 근처 수색을 건너뛰었다. 며칠간 조금도 쉬지 못하고 잠도 전혀 자지 못한 기사들에게 공작부인이 깨어난 즐거움을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공작께서 부인을 지키고 계시니 하룻밤 정도는 쉰다 해도 큰일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범인이 이렇게 가까이 까지 다가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으리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실 매튜는 범인이 렌포드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감히 검은 기사단이 사방에 깔려있는데 이곳을 찾아올 리가…. 그렇지만 범인은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코앞까지 다가왔고, 그리고 살해를 당했다.
“일이 복잡하게 되었군.”
유일한 사건의 목격자이자 가해자가 죽었다. 이제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처음부터 조금도 진행된 것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공작부인을 해하려 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데본셔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 베드포드 성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까? 아니야. 그곳은 여기보다 규모가 몇 배는 더 크다. 그만큼 노출된 부분이 많다는 뜻이다. 크기가 크면 경비를 서는 것조차 힘이 든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녀를 마차에 태우고 오랜 시간 여행을 할 수도 없었다.
“검은 기사단을 전부 소집한다. 지금부터 베드포드 성에서부터 이곳까지 모든 곳을 수색해서 단 하나의 증거라도 있다면 모조리 찾아오도록. 그리고 저택의 경비를 두 배 강화하도록.”
“네.”
이미 저택의 경비를 강화하고 수색을 명령했지만, 매튜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공작부인께는 마부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그저 마부 한 명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누군가 더 큰 적이 그녀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마부가 죽었는데도 경비를 그대로 유지하고 검은 기사단을 움직인다면 그녀는 의심을 할 것이다.
건져 올린 마차 바닥에 매달린 돌로 보았을 때 분명히 범인은 리아를 죽이려 했다. 그 계획이 실패하자 렌포드로 숨어든 것으로도 부족해 저택에서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다가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절대 아니었다. 누군가 리아를 노리고 있었다. 누굴까? 왕이? 그녀를 질투하는 그 누군가가?
그 누구라 해도 그에게서 그녀를 빼앗아가진 못할 것이었다. 그녀 옆에는 늘 그가 함께할 것이므로.
순간 라이언은 매튜를 뒤로하고 식당 문을 박차고 2층 침실로 뛰어 올라갔다. 그녀가 안전한지 확인해야만 했다.
“고, 공작 각하!”
매튜의 외침에도 라이언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살짝 흔들 뿐이었다. 침실 문 앞에는 그가 나오면서 명령한 대로 기사 두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라이언은 심호흡했다. 아무 일도 없어. 그녀는 안전하다. 괜히 놀라게 할 필요 없이 잠을 자게 둬. 그냥 돌아서서 내려가.
마음속에 두 마음이 치열하게 싸움을 했다. 문을 열어 그녀를 확인하라는 쪽과 그냥 내려가라는 쪽이….
아내를 떠올리며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갑자기 어머니를 향해 집착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감당하지 못한 소유욕과 집착으로 자신의 부모가 어떤 끝을 맞이했는지….
아니야. 아내는 나를 사랑해. 그는 괜한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으려는 순간.
무슨 소리지? 그녀가 날 사랑한다고 한 적이 있나? 사랑을 달라고 했지… 사랑한다고는 한 적이 없어. 진실이 떠올랐다. 리아는 아직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라이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정말 없던가? 사랑을 달라고만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녀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했던 적은 없었다.
호감… 사랑하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호감이라고 했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문고리를 잡았던 손에 힘이 빠졌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응답받지 못한 사랑에 몸서리치는 그런 절차를 밟게 될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그가 이번에는 겁을 내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을 응답받지 못할까 봐.
물어봐. 저 문을 열고 그녀에게 진실을 물어보란 말이야! 마음은 외쳐대고 있지만, 몸은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두려움에 정신이 오싹해졌다.
그때였다.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린 것은.
“난 정말 괜찮다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리아였다. 그의 아내 리아가 깨어나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라이언은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뭐 해요?”
어정쩡한 자세로 멍하게 서 있는 그를 보고 리아가 물었다.
“내가 진짜 이런 말 자꾸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리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시 말했다.
“잠깐 고개 좀 숙여보죠. 할 말 있으니.”
여전히 가만히 있는 그를 그녀가 억지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접촉에 번쩍 정신이 든 그는 그녀가 당기는 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귓가에 따뜻한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자꾸 아침마다 저 혼자만 두고 나가버릴 거예요? 도대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굴기만 해요. 바가지 박박 긁을 줄 알아.”
아내는 날 사랑해.
“어라, 대답이 없다 이거죠?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딱 그거라니까. 어제는 뭐 내가 죽을까 봐 벌벌 떨었다면서요? 저 메리한테 다 들었거든요?”
“리아.”
그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아니,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부르고 그래요? 딴소리할 생각이면 집어치워요. 지금 딱 대답해요. 자꾸 혼자 도망가지 않겠다고. 맨날 눈뜨면 나 혼자야. 그 기분 엄청나게 별로거든요.”
그녀가 다시 한 번 그의 귓가에 다다다 잔소리를 퍼부었다.
“하하하….”
이번에는 웃음이 났다. 미친놈처럼. 작게 종알대는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 분명 아내도 날 사랑해. 아니라면? 그럼 사랑하게 만들면 돼. 이번엔 내가 사랑을 달라고 하지 뭐.
“미쳤어요? 갑자기 그렇게 웃어요? 다 쳐다보잖… 흐읍….”
리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의 입안으로 그의 숨결이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그녀는 그에게로 안겨서 들어 올려졌다.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단단한 몸에 완전히 결박되어 그녀의 동작은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의 키스가 진해질수록 그녀의 반항도 옅어지더니 결국에는 사라졌다.
공작 부부의 진한 애정행각에 앞을 지키던 기사단과 메리는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주인의 사생활을 지켜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으므로.
그렇지만 그들은 본의 아니게 모든 것을 보고 말았다. 이미 본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렌포드 전역에 검은 사자가 순정남에 사랑꾼이라는 소문이 더해져 퍼져나갈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