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뜨겁고 달콤한 숨결
테이블 위에는 리아의 쓰린 속을 달래줄 곡물 수프가 올라왔다. 그녀는 괜찮다며 고기를 먹고 싶다고 투덜댔지만, 의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기름진 음식이 위장에 들어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난 진짜 괜찮은데….”
리아가 입술을 삐죽대며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사실 침대가 아닌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도록 허락한 것만으로도 라이언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리아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반대했었다. 심지어 메리에게 수프도 떠먹여 주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의사의 말을 들어서 나쁠 건 없지.”
라이언이 고소한 냄새를 폴폴 풍기는 수프를 떠먹으며 리아를 향해 말했다. 오랜 시간 누워 있어 다리에 힘이 빠진 그녀를 테이블까지 안고 온 것도 그였다. 그는 조금 투덜대긴 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의자에 앉아서 식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리아는 처음 레오니의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와 같은 느낌과 기분이 들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과 심한 허기, 그리고 혼란스러움.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리아는 마음이 묘했다. 그래 모든 사실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상황이 같을 수는 없겠지….
말도 안 되는 세상에 떨어트려 놨다고 발레포르를 욕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진짜 이곳 엘리시아의 공주였다니. 아니 공주로 태어났어야 할 아이였다니. 쉽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가족…. 가족이 있었다. 어머니가 있었고 아버지가 있었고 오빠가 있었다. 처음부터 혼자는 아니었다. 리아는 늘 자신이 어디에서 왔을지 궁금했다. 그녀의 외모는 늘 그 궁금증을 더 부채질하고는 했다. 그래, 이제 알 것도 같았다. 어째서 자신이 황금색 눈동자를 하고 있는지를.
오직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만이 타고난다는 황금색 눈동자.
레오니의 몸속으로 들어왔을 때, 잠깐이나마 자신과 조금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이유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레오니와 이복자매였다니…….
“왜 안 먹지? 입맛이 없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리아를 향해 라이언이 물었다. 눈을 뜨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그를 놀라게 하더니 정작 음식을 앞에 두고는 딴생각을 하며 걱정을 하게 만들고 있었다.
“먹어요. 먹어. 엄청 맛있네요. 사실 고기가 더 먹고 싶어요. 포만감을 느끼고 싶어.”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 벌써 밤이 늦었어.”
“헐. 지금 밤이에요?”
사실 리아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뚝 떨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무슨 이유인지 창문이 전부 두꺼운 커튼으로 꼭 닫혀 있었기에 지금 창밖이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었다.
“밤이야. 아주 늦은 밤.”
“저 또 자야 하는 건 아니죠? 커튼을 왜 저렇게 두껍게 쳐 놓은 거예요. 그러고 보니 방 안에 시계도 없고.”
이제 막 정신을 차렸는데 또 눕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의사는 위장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음식을 섭취하고 바로 쉬라고 했지만, 리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리아가 불쌍한 표정으로 라이언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의사의 말을 어기지 말라며 다시 침대에 누우라고 할까 봐 무서웠다.
라이언은 대답을 망설였다. 의사는 리아가 쉬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그녀는 분명 며칠간 정신을 잃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깨어나지 못하는 와중에도 낮과 밤이 반복되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꺼운 커튼으로 밤낮을 가리고 시계를 없애버렸다.
그런다고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지만…. 뭐든 하고 싶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가 깨어나지 못할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을. 그래서 무서웠다. 시간은 자꾸만 가고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가….”
“다시 잠들면 또 깨어나지 못할까 봐 무서워요.”
라이언의 말을 자르며 리아가 그에게 엄살을 떨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라이언의 상태도 엉망이었다. 눈 밑은 며칠 잠도 못 잔 사람처럼 어두웠고 수염은 삐죽삐죽 엉망이었다.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고 윗단추를 몇 개 풀어놓은 셔츠는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라이언.”
리아는 라이언의 얼굴 위로 손을 뻗어 올렸다.
“혹시 못 잤어요?”
“아니.”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라이언은 아니라며 거짓말을 했다. 물론 리아는 믿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볼에 닿자 그는 얼굴을 살짝 움찔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리아의 손 아래에서 느껴지는 라이언의 피부는 거칠었다. 그간의 피로가 느껴질 만큼.
“면도도 안 하고, 머리는 엉망이고. 내 걱정 많이 했어요?”
라이언이 괜히 머쓱한 기분에 리아의 손 아래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거친 턱을 문지르며 시선을 피하는데 집요한 리아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나 피하는 거예요?”
“내가?”
“그럼 여기 당신 말고 또 누구 있어요?”
“흠흠.”
“내가 정말 3일 동안 누워 있었어요?”
짧은 시간이었는데, 현실에서는 3일이나 지났다니….
발레포르를 만나고 진실을 듣고 고민에 빠졌던 그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망할 발레포르! 내가 부르는 것을 다 듣고도 모른척했다 이거지!
발레포르와 만났던 마지막 순간, 리아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었다. 알게 된 진실이 버거워서…. 레오니가 불쌍해서…. 감히 신의 뜻이란 것을 한번 거스르고 싶었다. 그들이 살려준 목숨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강렬하게 그녀의 온몸을 채웠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려던 그녀를 흔들고 깨어나게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이언이었다.
발레포르가 들으면 야속하다고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순간 발레포르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었다.
‘너 안 죽어. 너 안 죽는다고! 네가 어떤 인간인데 죽냐! 넌 오래오래 무병장수할 운명이야. 그 귀한 라루체가 네 몸속에 떡하니 박혀 있는데 죽을 리가 있겠어? 정신 차리고 눈떠. 그만 네 삶으로 돌아가.’
그런 발레포르의 말도 그녀를 움직이지 못했다. 죽지 않을 운명이란 없었다. 아니 그녀가 눈을 감아버리고 정신을 놓아버린 것은 신들이 마음대로 꼬아버린 인생을 향한 일종의 반항이었다. 신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때 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음성이, 절박하고 애절했던 그의 외침이 그녀를 잡았다.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녀는 느낄 수가 있었다. 정말 알 수 있었다. 사랑의 순간을…. 그 순간이 오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비처럼 자박자박, 눈처럼 소복소복, 따스한 햇살처럼 부드럽게…. 그렇게 그의 사랑은 그녀에게 온 마음을 다해 전해졌다.
그가 자신을 향해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그의 옆에서 온전한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절망의 순간에도 사랑은 숨을 쉰다.
“그렇게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을 줄 몰랐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리아는 궁금했다. 어째서 강물에 빠진 건지. 말들이 놀라며 뛰어오르고 마차가 요동치고 자신은 강물에 빠졌다.
궁금해하는 그녀를 보며 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좀 쉬고 난 뒤에 했으면 좋겠군.”
복잡한 이야기? 무슨 말일까?
“내일…. 내일 이야기해 줄게.”
라이언은 리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해 줄 생각이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충분히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한 번만으로 끝난다면 좋겠지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리아 스스로도 조심해야 한다. 그녀가 놀라고 무서워할까 봐 속이는 것은 더 안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늘은 쉬어야 했다. 그도 그녀도 휴식이 필요했다. 리아를 품에 안고 잠들고 싶었다. 이제 그녀 없이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안 먹을 건가?”
수프는 벌써 식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남은 수프를 싹 비웠다. 라이언도 마찬가지였다. 참 웃겼다. 어째서 그녀가 깨어나고 나니 그때야 비로소 배가 고픈 게 느껴졌던 걸까?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걸까?
라이언은 처음 느끼는 감정, 처음 느끼는 변화가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그건 이상하게도 그의 기분을 들뜨고 포근하게 만들었다.
포만감이 느껴지자 라이언은 씻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야지만 그녀 옆에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좀 씻어야겠군.”
라이언이 벨을 울리며 말했다.
“저도요. 당신만 안 씻은 게 아니에요. 저도 무려 3일이나 침대에 누워만 있었잖아요. 씻고 싶어요.”
벨이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존과 메리가 들어왔다. 라이언은 그들에게 목욕 준비를 명했다. 빨리 씻고 싶었던 리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아직 힘이 없는 다리 탓에 비틀대자 그는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정말 괜찮나? 당신은 아직 환자야.”
“진짜 괜찮아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저 워낙 오래 누워 있어서 다리에 힘이 빠진 것뿐이야. 저 멀쩡해요!”
라이언에게 양어깨를 잡힌 채로 리아가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라이언의 눈에 비친 리아는 너무도 연약해 보였다.
“이 상태로 목욕은 할 수 없어.”
“메리, 메리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돼요.”
결국, 리아가 이겼다. 그녀는 메리의 도움을 받으며 욕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메리는 어김없이 욕조에 장미꽃잎을 띄웠다. 그렇게 장미 향이 그녀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메리, 나 등 좀 닦아줄래.”
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등에 메리의 손이 닿았다. 그런데…. 이게 뭐지? 메리가 아니야. 그녀의 등 뒤에 닿은 손의 주인은 메리가 아니었다. 메리의 손이 이렇게 거칠고 커다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리아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분명 라이언의 손이었다. 감히 공작부인이 목욕하는 욕실에 들어올 사람은 남편인 공작밖에 없었다.
거칠고 커다란 손은 매우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타고 움직였다.
“라이언.”
리아가 작게 그를 불렀다.
“눈치가 빠르군.”
“커다란 당신 손을 눈치채지 못하면 바보죠.”
당황스럽고 부끄러웠지만, 리아는 애써 욕조 안으로 몸을 낮추고 무릎을 끌어당겨 가슴을 가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을 했다. 메리가 욕조 안에 띄어 놓은 장미꽃잎에 감사했다. 그나마 그녀의 몸을 조금은 가려주고 있었으니.
라이언에게 처음 보여주는 알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와 밤을 보낸 것은 고작 하루뿐이었고, 그것도 달콤한 와인의 힘을 빌려 용기를 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의 부끄러움을 감춰줄 그 무엇도 없었다. 고작 장미꽃잎 밖에는 그 아무것도….
“메, 메리는요?”
“내가 내보냈어.”
그가 그녀의 목덜미 가까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뜨거운 숨이 물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목 주변을 지분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