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사랑
“벌써 며칠째인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지?”
라이언이 의사를 다그쳤다. 리아가 강물에 빠진 지 오늘로 3일째였다. 그 말은 그녀가 3일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의사는 그동안 수십 차례 리아를 진찰했지만 아무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맥박도 호흡도 전부 정상이었다.
답답한 라이언은 아예 의사를 집 안에 머무르게 했다. 그에게는 의사가 오가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매 시간마다 한 번씩 의무적으로 진찰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리아는 그대로였다.
“그, 그것이….”
계속되는 라이언의 다그침에 의사가 말을 더듬었다. 공작의 굳은 목소리는 마치 그에게 공작부인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처럼 들렸기에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특별히 의사의 진료 실수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래도 높으신 분들을 치료하지 못하면 되레 의사가 죽어 나가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다른 누구도 아닌 베드포드 공작부인을 수차례나 진료했음에도 그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니… 의사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외관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호흡도 맥박도 정상이고 체온도 이상이 없으니… 제 짧은 소견으로는 원인을 알아내기가….”
벌써 똑같은 말을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지… 의사는 아예 달달 외운 듯 리아의 상태에 대해 다시 설명했다. 그녀는 뚜렷한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의사에게 옮겨졌던 라이언의 시선이 리아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눈에도 리아는 멀쩡해 보였다. 마치 잠든 것처럼 느껴질 만큼. 어째서 깨어나지 않는 걸까? 몇 번을 진찰해도 상태는 변함이 없이 그대로였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진찰하지.”
라이언의 입에서 차가운 명령이 쏟아지자 의사는 헐레벌떡 방을 빠져나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종 존이 방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존의 의무는 공작을 보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째 공작께서 음식도 제대로 드시지 않고 옷차림조차 살피지 않으시며 늘 공작부인 곁을 지키고 계시니… 작은 시종의 시름이 점점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존이 까칠한 턱을 문지르고 서 있는 자신의 주인을 조용히 불렀다.
“주인님. 제발 식사라도 하세요. 이러다가 주인님까지 쓰러지시겠습니다.”
애절한 존의 부탁에도 라이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리아를 향해 있었고 초조한 손은 면도를 하지 않아 거뭇거뭇한 턱을 문지르고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존이 라이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다시 외쳤다. 이번에는 소리가 좀 컸는지 라이언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시끄럽다. 난 생각이 없으니 나가.”
라이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존을 내쫓으며 침대 옆에 바로 붙여놓은 의자에 앉았다. 리아가 쓰러지고 며칠 동안 그는 계속 그 의자에 앉아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해야 될 때를 제외하고는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한참을 라이언의 등 뒤에 서 있던 존은 무거운 다리를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리아.”
존이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마자 라이언은 리아를 불렀다. 처음에는 그녀를 구했다는 것 자체에 감사했었다. 이렇게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도대체 무슨 이유로 리아는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라이언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녀가 누워 있는 시간이 하루하루 더해질 때마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초조했다.
이런 감정이 사랑일까?
리아는 염려와 걱정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했다. 지금 라이언은 염려와 걱정을 넘어서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렵고 초조해서 미치기 직전이었다.
“알려 줘. 이게 사랑인지.”
라이언의 목소리가 떨렸다. 꿈같은 첫날밤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신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마치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일찍 출발을 하자고 했던 그날의 모습이 떠오르며 죄책감은 더 깊어졌다.
그도 안다. 언제든 일어날 사고였다는 것을. 마부는 일부러 리아가 타고 있는 마차를 강물에 빠트렸다. 모든 것은 계획된 일이었고 그 이유는 아직 밝혀내지도 못한 상태였다. 라이언은 직접 사건을 조사하고 싶었지만 누워 있는 리아를 두고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는… 그는 아무 일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고가 난 그 순간부터 라이언의 시계는 멈춰있었다. 그는 방문객조차 받지 않았다. 사고가 우연이 아닌 고의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임스와 페넬로페까지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리아가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오늘 밤도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런다면 그는 어쩌면 좋을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누군가를 이토록 걱정하고 염려한 적이 있었던가? 이런 마음이 그녀가 말했던 사랑이라는 것일까?
라이언에게는 그 진실을 알려 줄 리아가 필요했다.
갑자기 미치도록 마음이 답답했다. 꽉 막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은 감정. 처음 느껴보는 기분.
라이언은 침대 위로 자신의 손을 뻗어 가녀린 리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꼭 쥐면 힘없이 바스러질 것처럼 연약한 그녀의 손이 커다랗고 거칠기 짝이 없는 그의 손 위에 올려졌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녀의 온기를 확인해야 했다. 여전히 리아의 손은 따스했다. 하얗고 작은 손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손을 마주 잡아 올 것 같은 기분에 라이언은 숨조차 멈추고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그렇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리아. 제발 눈을 떠.”
움직이지 않는 리아의 손을 움켜쥔 채로 그는 애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애틋했고 절박했고 또한 다급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이 지나면 그녀가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자꾸만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리아.”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애절했던 음성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듯 자꾸 켜져만 갔다.
“리아! 정신 차려! 리아!”
저택 안의 모든 사람들이 라이언의 목소리를 들었으리라. 이미 그들 사이에는 공작부인에 대한 공작의 애절한 순애보가 상당한 화젯거리였다. 사랑 따위는 전혀 할 것 같지 않던 죽음의 사자. 그런 그가 의식을 잃은 아내의 방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하는 모습은 감히 상상 속에서도 떠올리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더군다나 그것도 부족해 사고 이후로 식음을 전폐했으니… 엘리시아에 그보다 더한 순정남은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저택을 벗어나 렌포드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특히나 공작부인을 진찰한 의사의 증언은 그 소문에 신빙성을 매우 더하고 있는 상태였다.
격한 고함에도 리아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얼굴은 평온했고 눈은 감겨있었다. 이번에는 절망감이 라이언을 뒤흔들었다. 그는 침대에 이마를 기대고 엎드리며 습관처럼 또 리아의 이름을 중얼댔다.
“리아.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만 있을 건가! 당신이 그토록 궁금해 마지않던 렌포드에 도착을 했어. 계속 잠만 잔다면 당신에게 준 수표장은 소용이 없을 테니 내가 다 찢어 버리겠소.”
말도 안 되는 투정이었다. 이 상황에서 수표장을 찢어 버리겠다니… 단단히 미쳤군….
“…미쳤…어요? 줬다 뺏는 게 어딨어….”
리아의 작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리는 순간! 꿈인가 싶어 라이언은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 건가?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잖아요.”
“뭐?”
라이언이 고개를 획 들어 올렸다.
“하….”
꿈이 아니었다. 리아가, 그의 아내가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라이언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눈을 뜬 걸로 부족해 그녀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그것도 변함없이 황당하게….
“제가… 면도를 잘 하셔야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리아가 라이언에게 잡혀있는 손가락을 꿈틀대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 턱으로 키스할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마세요.”
말을 마친 그녀가 갑자기 다시 눈을 감았다. 놀란 라이언이 의사를 소리쳐 부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몸을 흔들었다.
“리아!”
“흔들지 마세요. 어지러워요….”
급박한 라이언의 목소리에 의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으음….”
의사와 집사 넬슨, 존에 메리까지 모두 다 뛰어들어 와 리아의 침대 발치에 모여들었다.
“저… 정신이 드셨습니까!”
그녀의 신음에 의사가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공작부인께서 드디어 정신을 차리시다니. 제 인생에 오늘만큼 기쁜 날은 없을 겁니다! 맙소사. 이런 기적이.”
마땅한 치료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저 지켜만 보며 마음을 졸였던 의사가 감사의 기도를 연거푸 내뱉었다. 죽음 직전에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런 의사의 호들갑을 뒤로한 채 라이언은 자꾸만 인상을 쓰는 리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어디 아픈가?”
“그게 아니라….”
의사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리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라이언이 고개를 돌려 호통쳤다.
“당장 그 입을 다물어!”
그리고는 다시 리아를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
“아픈 곳이 있다면 이야기해. 당신은 사고를 당했어. 지금 며칠째….”
“배고파요….”
“응?”
“배가 고프다고 했어요….”
극적인 상황에서 돌아온 순간에도 그녀는 역시나 본능에 솔직했다. 그제야 라이언은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를 향한 걱정으로 미칠 것 같았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은 듯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꽉 막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고 치솟았던 분노도, 초조함도, 다급함도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도 배가 고팠다.
참 어이가 없게도 며칠 동안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허기가 그녀를 되찾았다고 안심한 순간 그를 찾아왔다. 웃음이 났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그토록 걱정을 시켜놓고서 눈을 뜨자마자 투덜대고 지적을 하고 거기에 배가 고프다는 말이나 해대는 자신의 아내.
며칠 동안 그를 극한으로 몰고 간 여자. 라이언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만약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사랑을 원한다는 그녀의 말을 비웃었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이라….”
“네?”
라이언의 중얼거림에 시종 존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대답을 했다.
“공작부인의 식사를 준비해 오게.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고프군.”
라이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방 안은 분주해졌다. 의사는 리아를 다시 진찰했고 메리는 그녀를 보살폈다.
리아는 수십 번 이상 반복되었던 이전의 진찰 결과와 변함없는 상태였고 며칠간 의식이 없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했다. 다만 배가 고프고, 오래 누워 있어 다리에 힘이 없다는 것 빼고는.
그렇게 리아는 다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