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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53화 (53/116)

53화. 정해진 운명대로

마차가 마구 요동치는가 싶더니 곧바로 열린 창문으로 물이 훅하고 밀려들었다. 물이 밀려든 순간 리아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몸이 무언가에 밀려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 뒤… 이어지는 암흑….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암흑 속에서 리아는 몸부림쳤다. 그때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은 소리는 그녀의 귓가를 맴돌며 점점 커지고, 점점 선명해졌다.

“리아, 리아….”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누군가 자꾸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리아는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리는 끊이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한없이 다정하고,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지는 음성.

“리아, 리아… 사랑하는 아가야. 건강하게 나오렴.”

선명해지는 목소리에 리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포근하고 따뜻해지며… 몸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어머니, 동생 이름이 리아예요?”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네. 그냥… 이 아이는 꼭 딸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서 태명을 리아라고 지었단다. 예쁘지?”

“리아… 리아… 네. 예뻐요. 정말 예뻐요. 저도 꼭 여동생이 태어나면 좋겠어요. 어머니 리아는 혹시 엘리시아에서 따온 이름인가요?”

“그래 맞아. 우리 아들 똑똑하기도 하지.”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너무 포근해서… 느껴지는 기분이 너무 황홀해서… 계속 듣고 싶었다. 평생 그토록 다정한 음성은 처음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리아는 눈물이 났다.

이대로 영원히… 이 어둠 속에서 영원히… 나를 불러 줘요. 나를 한 번 더 불러 줘…

“리아! 이 바보야! 정신을 차리라고.”

누구지? 이 낯설지 않은 목소리는?

“기껏 살려놨더니 또 죽으려고 해? 너 미쳤어?”

발…레포르? 발레포르야? 리아는 그를 향해 입을 움직이려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눈을 뜨려고 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발레포르라니! 그토록 간절하게 불러대던 그 악마 놈이 나타났다니.

“맨날 그렇게 찾아대던 망할 발레포르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제 정신을 차려! 너 이렇게 내 앞에다 대놓고 욕할 기회는 앞으로 살면서 별로 없을 거라고!”

순간 욕의가 불끈 솟아올랐다. 이 망할 놈이 어떤 식으로 환생을 시켜줬는지… 그간의 개고생이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휘감으며… 배고픔에 울부짖고, 더러움에 기절초풍할 뻔한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이….”

“그래 나야! 나라고. 망할 발레포르라고!”

“이…이… 나쁜 새끼!”

오직 발레포르를 족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리아는 초인적인 힘을 냈다. 도무지 떠질 것 같지 않던 눈이 번쩍 떠지고 열리지 않던 입이 열렸다.

“으악!”

리아는 눈을 뜨자마자 닥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 비명을 질렀다. 뭐야. 왜 또 온 세상이 하얀 거야. 나 지금 또 죽었어?

“이게 뭐야….”

“안녕 리아.”

그동안 그토록 불러제꼈던 발레포르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리아는 앞에 서 있는 발레포르를 확인하자마자 주변이 온통 하얗다는 것도 잊고 곧바로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흐앗… 야야 제발….”

“너 진짜 죽을래?!”

“오랜만에 만나서 이게 무슨 짓이야!”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러는 거다! 너 진짜 미쳤지?”

“진정해….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리아의 손짓은 여전히 발레포르에게 조금의 고통도 안겨주지 못했지만 발레포르는 리아를 억지로 떼어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약했다.

“악마 놈아. 나 공주처럼 살게 해 준다면서… 이상한 세계에다가 두고 도망치면 어떻게 해!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기나 해?!”

발레포르를 만나면 따질 게 너무나도 많았다. 속여서 환생을 시킨 것도 그렇지만 하필이면 삶에 의욕 따위는 한 가닥도 없는 여자의 몸에 집어넣는 바람에….

“나도… 나도… 속아서 그랬다고!”

“뭐? 속아?”

“나도 이용당한 거야… 이용당했다고! 우선 이 손 좀 치워봐. 내가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줄 테니! 제발!”

“너 또 거짓말하면 죽는다. 알지?”

리아는 반신반의한 눈빛을 쏘아대며 발레포르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나 또 죽었어? 너 여기서도 능력 못 쓰고 그러는 거 아니지?”

“걱정 마. 너 죽은 거 아니야. 근데 내 능력은… 왜?”

엉망으로 헝클어진 앞섶을 정리하며 발레포르가 측은한 목소리를 냈다.

“다리 아프고 눈부셔. 나 하얀색에 트라우마 같은 거 있나 봐. 여기 너무 싫다. 막 도술 같은 거 부려서 하얀색도 없애고, 여기 의자라도 하나 만들어봐.”

역시 타고난 성격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리아는 거침없이 주문을 늘어놓으며 당당하게 명령을 내렸다. 발레포르가 군말 없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순식간에 두 사람이 서 있던 장소가 포근하고 따뜻한 오두막으로 바뀌었다.

리아에게는 이제 그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가장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빨갛게 불길이 타오르는 벽난로 안에는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오두막 안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너 막 거짓말로 변명하는 거면 진짜 오늘로 우리 관계는 끝이야!”

“어째 성질이 그대로냐. 그동안 조금이라도 변했기를 기대했는데….”

“몰라. 너도 살아봐. 더 나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헐… 그래서 지금 삶이 싫다고? 하나도, 전혀 행복하지 않아?”

발레포르의 질문에 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건 아니야… 싫은 건 아니야… 발레포르의 말을 듣는 순간 리아는 라이언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했던 나날들… 그와 함께 보낸 밤. 그를 사랑하게 되었던 시간들….

“뭐 그런 건… 아닌데….”

“그러면서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지금 삶에 만족하잖아. 너 잘사는 거 내가 다 안다고. 그리고 너 맨날 안 좋은 일 생길 때마다 ‘망할 발레포르 새끼’ 어쩌고 하면서 욕하는 거 나 다 들었어… 내가 흑… 얼마나 맘이 아팠는데… 흑흑… 그러니까 우리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자.”

발레포르가 우는 척을 하며 눈물을 훔쳤다. 커다란 악마의 뻔지르르한 얼굴을 보자니 리아는 다시 화가 솟구쳤다. 이것이 다 듣고도 모른 척을 해?

“너 죽을래? 이게 또 본질을 막 흐리고 그래.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그러니까 내 말 다 듣고도 안 나타났다는 말이지? 너 두고 보자. 셋 세기 전에 빨리 불어! 하나 둘….”

“알았어. 알았다고! 나 진짜 억울한 악마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속은 거야. 이용당한 거라고. 너도 날 불쌍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억울해? 말을 해 보란 말이야. 나 답답하게 하지 말고.”

그 뒤 한참 동안 발레포르는 리아에게 길고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부 믿기 어려울 만큼 황당하고 또 황당한 이야기를.

“미쳤어? 발레포르 너 미친 거 아니지?”

발레포르가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리아는 현실을 부정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걸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진짜야.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가기도 해. 그때 널 보고 그렇게 통제하기 어려운 소유욕이 느껴졌는지… 왜 그랬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진짜 공주라고?”

발레포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공주야 하는 표정을 가득 담아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이 그거야. 어떻게 날 그런 일에 이용할 수 있어? 너 훔치고 나서 들킬까 봐 마음 졸인 걸 생각하면… 아오 진짜.”

발레포르가 리아에게 해 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애초에 리아의 영혼을 훔친 것부터가 신들의 농간이었고 발레포르는 이용을 당한 것뿐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리아가 고아로 살아간 것부터가 그랬다.

엘리시아 왕국의 진정한 공주가 될 운명이었던 아이. 어머니의 배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불쌍한 공주. 그게 바로 리아였다.

죽음의 순간.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생각하는 어머니 앤의 간절한 염원은… 리아를 다른 차원, 다른 세계로 보낼 수 있었고 그렇게 꼬여버린 차원의 틈바구니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나머지 모든 일들은 행하여졌다.

리아의 죽음이 그 시초였다. 명부에도 없던 그 아이는 당연히 죽는 날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 불쌍한 아이가 죽었고, 신들은 회의에 들어갔다. 그 아이를 그냥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인가! 아니면 또 한 번의 기회를 줄 것인가!

그때 그들의 귓가에 또 한 명, 불쌍한 아이의 기도가 전해졌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에 의미가 없는 아이. 늘 죽음을 갈망하는 용서 받지 못한 여자 에리스의 딸. 죽어야 편안해질 수 있는 아이. 신들은 그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발레포르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에 홀린 듯 차원의 틈을 엿보게 되고 리아의 영혼을 훔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뒤 기적처럼 마법의 보석 라루체를 발견하게 되고 레오니의 기도를 듣게 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모든 것은 그들의 계획이야.”

“왜? 직접 하면 되는 걸 널 이용해서? 도대체 왜?”

“신들의 뜻은 아무도 몰라. 나도 거기까진 알 수 없어. 다만 모든 일은 그들이 계획한 대로, 하늘의 순리대로 흘러가는 거야. 네가 레오니의 몸속으로 들어간 것도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도… 모든 것이 다.”

리아는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알게 된 모든 사실들은 너무 벅차고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녀를 괴롭혔다. 고아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자신을 너무도 사랑했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렇게 순리를 따라 제자리를 찾기 위해 레오니의 몸속으로 들어왔다니….

리아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레오니라는 여리고 작은 여자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 그리고 그녀를 대신해 삶을 살아간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잠식해갔다.

“그러지 마.”

발레포르는 리아의 괴로움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다는 듯 그녀를 위로했다.

“넌 원래 네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이 여자는? 레오니의 자리는 어디야?”

“레오니는… 신들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구원은 죽음이었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거든. 만약 그녀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어쩌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레오니가 죽은 것은 네 탓이 아니야.”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레오니의 몸속에 환생시켜 줬다고 발레포르를 원망할 때가 더 좋지 않았을까? 리아는 지금에서야 알게 된 모든 사실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모든 일은 하늘의 뜻대로. 그들이 정한 순리대로 흘러간다….

리아는 차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머리는 복잡하고 마음은 쓰라리고 아픈데 발레포르가 만들어준 오두막은 너무 따뜻했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잠이 들것만 같아….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고 붉어진 눈 위로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어쩌면 좋을까? 처음에 들었던 그 다정한 음성이 그리웠다. ‘리아’ 하고 불러 주던 그 목소리가 진짜 어머니였다는 말이야? 나에게도 어머니가 있었어….

이대로 모든 것이 멈췄으면… 어머니의 포근한 품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리아는 그렇게 다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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