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사고
리아가 느낀 첫 번째 감각은 누군가 자신을 살며시 흔드는 손길이었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하고 조심스러워서 그녀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스며들었다.
“벌써 아침인가요?”
잠에 취한 리아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에도 없는데 벌써 아침이라니. 리아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주위를 살폈다. 아직 창밖은 어스름했다.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깨운 이유가 뭐야? 더 자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그를 향해 투덜댔다.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무슨 일 있나요?”
“몸은 괜찮은가?”
침대 바로 옆에 라이언이 서 있었다. 그는 다정스런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니 그녀의 투덜거림이 조금은 약해졌다. 그럴 만큼 그의 표정과 말투는 너무 친절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조금 뒤에 출발을 할 예정이야.”
이어지는 라이언의 말에 리아가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았다. 벌써 출발을 한다고? 그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해조차 뜨지 않았는데… 더군다나 그녀는 막 첫날밤을 치른 새신부나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셔대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 일어난 것인지 그는 벌써 옷을 다 갖춰 입고 있었다.
“당신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더 힘든 일과 마주하게 될지도 몰라.”
리아의 표정을 읽었는지 라이언이 말했다.
“더 힘든 일이 뭔가요?”
이보다 더 힘든 일이라니 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이곳에서 렌포드까지는 아침을 먹고 출발을 해도 반나절이면 도착을 한다고 했는데… 조금도 급할 것이 없는 거리였다. 뭐 때문에 저렇게 서두르는 건지….
“제임스, 그리고 페넬로페.”
라이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럼 지금 그들을 피해 먼저 출발을 하겠다는 거야?
“그들을 피하기 위해 일찍 출발을 하겠다는 거예요? 설마… 그게 다는 아니죠?”
“그게 다야.”
리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당신은 쉬어야 해. 그들에게 시달리게 둘 수는 없어. 일찍 출발을 해서 점심 전에 렌포드에 도착할 계획이야.”
어제 서로에게 매우 시달린 남매는 분명 함께 마차를 타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분명히 리아와 함께 마차를 탄다고 할 것인데, 그걸 가지고 된다, 안 된다 하며 언성을 높이는 것보다는 애초에 그럴 빌미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렌포드 행이 정해지고 일정을 짤 때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다만 그 계획 안에 여관에서 초야를 치른다는 것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녀와 밤을 보내고 나니 그는 더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렌포드 저택으로 데려다 놓고 싶었다. 여관방에서 참지 못하고 그녀를 안아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난밤 참을 수 없는 흥분에 거칠었던 그의 행동 탓에 그녀는 많이 지쳐 보였다.
“아침을 먹고 짐을 챙기시오. 삼십 분 후에 출발할 예정이니.”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리가 문을 두드렸다. 라이언은 그녀를 향해 시선을 한번 주더니 곧장 문을 열고 메리를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시종들과, 기사단원들은 미리 일정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메리는 이른 출발이 당연한 듯 그녀를 챙겼다.
리아는 여전히 잠에서 덜 깬 상태였다. 그녀는 메리가 가져온 아침을 그대로 침대 위에서 대충 챙겨 먹고는 바로 옷을 입었다.
그래, 다만 몇 시간일지라도 페넬로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은 그녀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미묘한 신경전 따위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말이다.
리아가 채비를 마치고 여관 마당에 내려왔을 때까지도 여전히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어서 그런지 주변은 서늘했다. 기사단은 조금의 소음도 내지 않으며 일사불란하게 출발을 준비했다.
“당신도 마차를 타고 갈 거죠?”
앞에 서 있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물었다. 그는 좀처럼 판단을 할 수 없는 남자였고, 어제만 해도 처음에는 마차를 탔다가 금방 또 말을 타고 혼자 가 버린 전적이 있었다. 리아는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고 싶었다. 그녀의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강요에 가까웠다. 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자는….
“당신이 원한다면.”
마차 문을 열며 라이언이 말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 리아는 그가 자신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갈 생각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아는 흡족한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메리와 존 역시 하인용 마차에 올라타고 출발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리아와 라이언이 마차에 올라타 막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기사단 중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공작 각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는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문 쪽을 향했다.
“무슨 일이지?”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길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길을 살피러 먼저 출발했던 단원 중 한 명이 돌아와 라이언을 찾았다. 아무래도 그가 나가 봐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리아를 향해 안개가 잠잠해질 때까지 말을 타고 선두에 서겠다고 말했다.
“그냥 천천히 출발하면 안 될까요?”
리아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여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임스와 페넬로페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여관 전체가 고요했다. 아직 부산스러운 아침이 오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더욱이 제임스는 지난밤 라이언과 함께 부어라 마셔라하며 과음을 했기에 쉽게 일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이 정도 안개쯤은 별거 아니야. 걱정 말고 편히 쉬고 있길….”
말을 마친 라이언이 고개를 앞쪽으로 내밀어 리아의 볼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리아는 당황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그가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나가고 한참 뒤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 리아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이 너무 달콤하고 설레어서 그녀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콩닥거렸다.
징조가 좋았다. 잘만 하면 그는 좋은 남편이 될 것 같기도 했다. 덜커덩거리며 렌포드를 향해 남은 여정을 출발하는 마차 안에서 리아는 입꼬리를 크게 말아 올리며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말에 올라탄 라이언은 행렬의 가장 앞쪽에 서서 길을 살피는 중이었다. 가시거리가 불과 30센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안개였다. 기사단들은 횃불을 밝혀 들었고 마차 뒤쪽에도 역시 횃불을 달아맸다.
괜히 고집을 부려 일찍 출발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후회를 하기에는 멀리 와 버린 뒤였다. 옅어질 줄 알았던 안개는 길을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길 앞쪽에 위치한 포트 강 탓에 안개는 더 짙어지고 있었다. 강을 건너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포트 강만 건너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라이언은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앞을 살폈다. 혹시나 엉뚱한 길로 들어서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다리를 건너고 나면 좀 쉬었다 간다!”
강가에 이르러 라이언이 소리쳤다. 안개가 유난히 자욱했던 이유는 며칠 전 폭우로 불어난 강물 때문이었다. 쏴아악- 하며 강물이 흘러내려 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다리 위로 올라서며 라이언은 단원들을 더 단속했다.
“앞사람을 보며 천천히 건넌다. 단 한 명의 이탈자도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나!”
“네!”
기사단들의 대답이 크게 메아리치자 마차 안에서 선잠이 들었던 리아가 깨어났다.
창문을 열어 밖을 보니 여전히 안개는 그대로였다. 물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자 그녀는 지금 마차가 렌포드 입구에 위치한 포트 강을 건너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물안개가 열린 창을 통해 마차 안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축축하지 않고 시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마차 안에서 숨이 막혔던 리아는 창문을 힘껏 밀어 열고 보이지도 않는 밖을 감상했다.
뿌연 안개 저 너머로 빛이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곧 안개가 걷히고 해가 뜰 모양이었다.
창밖을 쳐다보고 있자니 죽었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눈을 떴을 때 사방이 온통 하얗게 느껴졌던 그날의 기억. 꼭 그때 그 느낌이었다.
“발레포르 망할 놈아. 넌 도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리아는 나지막이 발레포르를 불렀다. 망할 놈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젠 뭐, 원망도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은 다 진실이었다. 공주처럼 살게 해 준다고 진짜 공주의 몸에 집어넣었고, 정말 부자는 부자였다.
다만 그것 말고 중요한 몇 가지를 말해 주지 않은 게 괘씸했지만… 이제 와서 따질 게 또 뭐야… 그냥 한번 보고 싶었다. 진짜 발레포르가 존재했던 건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점점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전생의 기억도, 발레포르와 보냈던 날들도….
적응은 빨랐고 원래부터 이 세계에 살고 있었던 사람처럼 금방 불편한 것 없었다.
리아 자신이 본래 레오니인 것처럼.
그리고 라이언.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랑이라는 오묘한 감정에 눈을 뜨게 한 남자. 그냥 남편과 아내라는 굴레에 묶여 만난 것뿐인데…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관계를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계로 만들어 놓은 남자.
이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첫 만남부터 너무나 강렬했던 남자. 어쩌면 이곳에… 레오니의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그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이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를 향한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라이언을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지난밤 초야를 치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 탓이었다. 이론과 실전은 참 다르다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 일깨워 주었다. 고통은 잠깐일 뿐, 매 순간이 달콤했다. 지금껏 그렇게 황홀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남녀가 서로 함께할 수밖에 없는 하늘의 이치를 조금은 깨달은 것도 같았다.
그때였다.
히이잉~ 히이잉~
갑자기 말이 우는 소리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들려왔다. 곧바로 마차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꺄아악!”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
라이언은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그가 새벽같이 길을 나서자고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새벽녘 일어난 사고를 떠올리니 다시 죄책감이 휘몰아쳤다.
만약 사고로 아내가 잘못되었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마차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덕분에 리아는 살아남았다. 아직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목숨은 건졌다.
어째서 갑자기 말이 날뛴 것일까? 사고원인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지만 안타깝게도 마부는 실종되고 말았다. 사고가 난 순간 리아의 안위를 살피느라 미처 마부까지 챙기지 못한 죄책감이 그를 더 괴롭히고 있었다.
곧바로 그와 기사단은 강으로 뛰어들어 리아를 찾았고 운 좋게도 마차에서 튕겨져 나와 강기슭으로 떠내려온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렌포드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몇 시간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는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뿐이라며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라이언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영영 감은 눈을 뜨지 않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각하, 매튜입니다.”
가만히 누워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리아의 옆에서 몇 시간째 그대로 앉아 있는 라이언을 향해 매튜가 인기척을 냈다.
“각하, 마차사고와 관련해 꼭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대답이 없는 라이언을 향해 매튜가 다시 말했다. 사고를 입에 올리자 그제야 라이언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매튜가 말을 망설이며 리아를 살폈다. 의식이 없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라이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매튜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말해 보게.”
“아무래도 고의적인 사고인 것 같습니다.”
“고의적인 사고?”
“네. 그렇습니다.”
순간 라이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고의적인 사고라니. 그렇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누군가 마차를 일부러 강물에 빠트렸다는 말인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확실한가?”
“진짜 마부가 금방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진짜 마부?”
“지금 막 브렌트 남작님 일행과 함께 도착했는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누군가의 피습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행렬은 다 출발하고 자신 혼자만 여관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피습?”
그 말은 곧 그를 피습한 누군가가 마부행세를 하며 일부러 마차를 강물에 빠트렸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실종된 마부는 아직도 찾지 못했나?”
“실종이 아닌 잠적이라면 현재로서는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라이언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히 검은 사자의 아내를 해하려는 자가 있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조건 잡아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무조건 밝혀내야 한다.
“찾아내게.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을 찾아내게. 그리고 마부 역시 다시 조사를 하게. 계획된 범죄란 말이지… 감히 내 아내를 죽이려고 했단 말이지….”
분노가 가득 담긴 라이언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다시 전쟁터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 듯 그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살기가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