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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50화 (50/116)

50화. 키스해줘요

페넬로페의 질문을 모른 척하고 방으로 올라간 지 30분이 지나지 않아 리아의 저녁 식사가 쟁반에 담겨 날라졌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생각을 애써 무시하며 아주 천천히 마지막 한 조각까지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여관 음식치고는 훌륭했다. 음식은 여관주인이 공작 부부의 방문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음식을 식당에서 먹지 못하고 이렇게 혼자 방 안에서 먹어야 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저녁을 다 먹도록 라이언은 소식이 없었다. 문 앞에서 철통 방위로 그녀를 지키고 있는 기사단에게 남편의 행적을 물어봤지만,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리아는 혼자서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밖은 위험하다며 출입을 통제하는 기사단원들을 향해 호통이라도 쳐 볼까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주인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고, 그 주인은 물론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이 분노한 이유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가 화내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서서 그 고주망태 망나니의 턱을 후려갈겼을지도 몰랐다. 사촌이라고?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는 검은 사자라고 불리는 치명적이고, 유혹적이고, 꼬시기 어렵고, 돈이 많은 공작이라는 것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곯아떨어질 듯 취해 있던 사촌이라는 망나니와 이토록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리가 없었다. 그녀가 보기엔 라이언은 사촌을 혐오하고 있었다. 뭐, 그 망나니가 그녀의 사촌이라도 그녀 역시 라이언과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목욕 준비를 하면서 메리는 분명 말했었다. 공작님이 돌아오셨다고. 그런데 목욕이 다 끝나고도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방으로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저녁을 먹는 시간을 고려한다고 해도 늦었다. 그것도 매우.

“첫날밤은 개뿔.”

그의 말에 설렜던 것이 이상하게 억울했다. 그렇게 끈적하게 속삭여놓고서 나타나지도 않는다니. 리아의 시선이 자꾸만 열리지 않는 문 쪽으로 향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물어 뭐할까.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있는 걸지도 몰라. 남자들이란 으레 그런 법이었다. 결국, 모든 일의 마무리는 술이었다. 기분이 좋아도, 나빠도, 슬퍼도, 짜증 나도, 화가 나도.

리아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화장대로 다가가 머리끈을 찾아 들었다. 머리 변태. 분명 취해서 들어오면 또 머리를 빗겨준다고 할 거야. 그녀는 손을 뒤로 올려 머리를 꼼꼼히 땋은 후 끈으로 질끈 동여 묶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침대로 돌아가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여관주인이 공작 부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와인이었다.

“이런 걸 갖다 놓으면 뭐 해. 마실 사람도 없는데.”

투덜대며 고개를 획 돌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실 사람이 없다니. 여기도 입이 하나 있는데! 리아는 다시 한번 문 쪽을 쳐다봤다. 꽉 닫혀있는 문은 열릴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였다.

리아는 주먹을 질끈 쥐고는 결심이라도 한 듯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힘겹게 마개를 따니 달콤한 향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스위트 와인이었다. 그녀는 크리스털 와인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어차피 혼자 마시는데 예의범절 따윈 개나 줘버리라지.

붉은 와인이 마치 그녀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와 같은 빛으로 반짝였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래 와인이라도 마시고 자야지 라이언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누워 있으니 온통 머릿속은 남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리아는 와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라이언이 리아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자정이 훌쩍 지나서였다. 패트릭을 보내고 여관으로 돌아와 가라앉지 않는 통증을 달래고자 제임스와 진탕 술을 마신 참이었다. 그는 당장 아내에게 상처를 만져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느라 평소보다 곱절은 더 술을 들이부었다. 취기가 올라와 몸이 살짝 비틀댔지만, 여전히 이마의 상처는 찌릿찌릿하게 울리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방안은 고요했다. 문을 열자마자 달콤한 향이 코끝을 자극하자 라이언의 굳어있던 얼굴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륵 풀어졌다.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저 아내가 있는 방에 들어온 것뿐인데.

방 한쪽 끝에 놓인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라이언은 곧장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당장 아내의 손을 자신의 상처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녀가 필요했다.

툭-

그런 그의 발끝에 무언가 부딪혔다. 라이언은 자신의 발끝에 채여 떼굴떼굴 굴러가는 무언가가 침대 발치에 부딪혀 멈춰 설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멈춰선 물건은 술병이었다.

“흐음.”

다시 방 안을 둘러보니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는 거의 다 마신 와인이 그 흔적을 살짝 남긴 채 살짝 묻어있었다. 혼자 술을 마신 걸까? 이 방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그와 리아 그리고 리아의 시녀 메리밖에 없었다. 메리가 술을 마셨을 리 없고, 그도 아니니 정답은 리아였다.

코끝을 맴돌던 달콤한 향기가 바로 리아가 마신 와인 향이었다.

“리아.”

웅그리고 잠들어 있는 아내를 향해 라이언이 말했다. 깊은 잠이 든 것인지 그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때 동글게 웅크리고 자던 리아가 자세가 불편했는지 잠결에 몸을 마구 뒤척였다. 그러자 이불이 그녀의 움직임에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그녀의 하얀 어깨와 뽀얀 다리가 그의 시선에 박혀 들었다.

“리아.”

그는 다시 한번 리아를 불렀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시선이 아내의 어깨와 다리로 향했다. 그녀는 너무 작고, 너무 보드라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만지고 싶을 만큼.

방 한가운데 우뚝 선 라이언은 지금까지 겪어왔던 그 어느 때보다 의지를 총동원했다. 입이 마르고 손바닥엔 땀이 났다. 그는 처음으로 알았다. 자신이 얼마나 성마른 사람이었는지를.

그는 결국 견뎌내지 못하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침대 위에는 밝혀놓은 붉은 조명 아래 옆으로 누워 잠이 든 아내의 몸이 곡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었다. 취기가 오른 탓에 더위를 참지 못하고 벗어놓은 가운은 침대 바로 옆에 엉망으로 떨어져 있었다. 얇고 작고 짧은 슬립 하나만을 입은 채로 누워 있는 그녀는 마치 그를 유혹하듯 요염했다.

얼굴이 보고 싶었다.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곡선은 황홀할 정도로 섹시했지만 라이언은 그보다 더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자신의 아내라는 여자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몽롱했다.

그는 침대 반대편을 걸음을 옮겼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 했다. 그녀가 진실로 맞는지. 지금 이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여인이 자신의 아내가 맞는지. 모든 것이 현실인 것인지.

다시 멈춰선 그의 시야에 작은 숨을 쌕쌕 몰아쉬며 잠들어 있는 리아의 조그마한 얼굴이 들어왔다. 레드와인을 마셨다는 걸 티 내는 듯 입 주변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곧장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보송보송한 볼은 취기가 오른 것인지 붉었다. 평소보다 유독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은 앙증맞은 귀 뒤로 얌전하게 넘겨져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라이언은 눈을 감았다. 유혹적인 그녀의 모습에 넘어가 버릴 것만 같아서. 그렇지만 그의 행동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눈을 감아도 그는 그녀가 보였다. 더 선명하고 더 가깝게.

끓어오르는 욕망에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결혼한 이후 단 한 번도 여자를 안은 적이 없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딱히 욕정을 일으킬만한 상대도 없었다. 그에게 성욕쯤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 잠들어 있는 아내 앞에서 그는 끓어오르는 성욕에 몸부림쳤다. 취한 탓이야. 평소보다 몇 배는 취했기 때문일 거야.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해 보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취한 탓이 아니라는 것을. 그 정도 술에 흔들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취한 게 아니라 취한 척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라이언은 자신도 모르게 보드라운 그녀의 볼을 향해 손을 뻗다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취한 여자를 상대로 뭐 하는 짓이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했다. 아내는 그의 욕망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천진하게 잠들어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발정이 난 듯 몸부림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순간 술이 확 깼다. 이건 아니야. 이를 악문 라이언이 그녀를 애써 외면하며 몸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아가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 몸을 일으켜 앉은 것이었다.

“어? 뭐지?”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라이언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했다.

“뭐야. 남편이잖아. 너 언제 왔니?”

너? 황당한 그녀의 말에 더 황당한 라이언은 ‘헛’ 하며 당황한 웃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취했다. 그녀는 취했고, 지금 그를 향해 주정을 부리려는 것 같았다. 작은 입술을 오물대며 또 무슨 이야기를 내뱉으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이 퍽 귀여웠다. 라이언은 아예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취했군.”

“나?”

“그래 당신.”

갑자기 리아가 히죽대며 웃더니 손바닥으로 부채질하며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러자 가뜩이나 짧은 그녀의 슬립이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 취했다. 어쩔래.”

감히 자신에게 반말에 막말이라니 무척 기분이 나빠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라이언은 기분이 좋았다. 유쾌했다. 그리고 그녀가 귀여웠다.

“지금 어쩔래? 라고 했나?”

“너 왜 지금 왔어?”

금방까지 웃던 리아가 이번에는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나쁜 놈.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밥도 나 혼자 먹고. 흐흑…히잉….”

순식간에 리아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덜어졌다. 그 모습을 본 라이언은 자석에 이끌리듯 침대 위로 올라가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문질렀다. 손끝에 느껴지는 눈물이 뜨거웠다. 놀란 그가 그녀에게서 손을 떼어내려고 하자 그 위로 그녀의 작은 손이 겹쳐져 그를 잡아당겼다.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마치 그 말이 주문처럼 그를 옭아매었다. 그가 가만히 있자 그녀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뜨거운 리아의 손가락은 까칠한 라이언의 턱 끝을 쓰다듬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른 입술을 문지르고 긴장한 코끝을 지나 굳은 미간 사이를 어루만지더니 눈썹 위 흉터 끝에 닿았다. 처음 리아가 그의 흉터를 만졌을 때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 그녀의 손길이 익숙해졌는지 그는 움찔하지도 않았다. 흉터 끝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녀의 손길이 감질날 뿐이었다.

라이언은 자신이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 흉터 위로 펼쳐 놓았다.

“만져줘.”

얼마나 그녀의 손길이 그리웠던가. 이렇게 쉬운 일을. 이토록 간단한 행동을 자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셔댔던가. 그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라이언은 다른 한 손을 들어 곱슬곱슬하게 말려있는 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자 마치 금실처럼 그녀의 머리가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를 휘감았다. 그가 머리카락을 만지자 리아가 갑자기 큭큭 댔다.

“역시 완전 변태.”

“뭐라고 했지?”

“그래서 좋아. 더 만져요”

이번엔 리아가 눈을 감았다. 침대 위에 마주 앉아서 그녀는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라이언은 자꾸만 말려 올라가는 그녀의 치마가 너무 신경 쓰였다. 움푹 패인 가슴 쪽도 다 드러난 어깨도 달콤한 숨결도. 그녀의 모든 것이 그의 온몸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밤이 늦었어.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드시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빼어내고는 자신의 이마 위에 그녀의 손도 끌어내렸다.

“새벽 일찍 출발해야 하니 그만 자는 게 좋겠어.”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욕망을 다스렸다. 취한 상태로 첫날밤을 치를 수는 없었다. 그건 아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그는 그녀를 차지하고 말 것이다. 아니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유혹적이었으므로.

“싫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리아가 투정을 부렸다.

“날 봐요.”

“자리에 누워.”

“키스해줘요.”

그녀의 말에 그의 온몸에 피가 들끓었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고 사정없이 입술을 문지르고 싶었다.

“당신은 취했어.”

“그리고 당신도 취했어.”

그녀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몸을 돌려버린 그의 곁에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는지 그녀의 온기가 온몸에 느껴졌다. 그는 마지막 남은 자제심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마시오.”

“바보, 멍청이.”

여전히 그녀에게서 몸을 돌린 채로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이번엔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겁쟁이.”

달콤하고 뜨거운 숨이 그의 귓가를 간질이며 온몸으로 퍼지자 그의 인내심은 결국 바닥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흐읍.”

그가 거칠게 그녀를 잡아당겨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으며 키스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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