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테사
패트릭 맥클라이. 그는 귀족 가의 소문난 망나니였다. 한때는 반반한 얼굴을 무기 삼아 귀족 영애는 물론이요 눈에 띄는 모든 여자들을 희롱하고 다녔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어떤 여자든 한번 자고 나면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 뒤처리 또한 더럽기로 유명했는데 자신과 관계를 맺은 여자들을 대놓고 공개하고 다녔다. 그게 갓 데뷔를 한 어린 영애든, 유부녀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지나친 기행과 만행은 곧 사교계에서의 추방을 불러왔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그의 외모에 끌려 그를 추종했던 사람들도 여자를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방종한 여자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방탕한 생활로 그의 유일한 자랑이었던 외모조차 변해버렸기에 더 이상 그를 따르는 여자는 없었다.
사교계에서 추방당하자 그가 눈을 돌린 것은 도박이었다. 술과 도박 그리고 창녀들. 그가 지난 몇 년간 반복해 온 일과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것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마르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재산은 그도 모르는 사이 바닥이 났다. 돈 많은 귀부인을 꼬셔보려고 했지만 몇 배나 불어버린 몸과, 찌든 얼굴은 과거의 외모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그는 자신의 저택을 저당 잡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돈마저 떨어지고 집은 도박 빚을 갚지 못해 넘어가 버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엉망으로 변한 몸뚱이뿐이었다.
그런 그의 귀에 라이언의 소식이 들려왔다. 렌포드로 향하는 길목, 어느 작은 여관에 베드포드 공작이 하루 머물러 갈 것이라는 소문이.
그동안 라이언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 쳐대던 그였다. 술자리에서 여러 번 라이언과 자신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아무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는 할 일이 아주 많았으니까. 도박도, 술도, 여자도 차고 넘쳐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라이언의 돈이 필요했다. 어마어마하다는 라이언의 재산이. 그가 기억하는 과거대로라면 베드포드 공작에게 돈을 뜯어내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라이언을 만나기 위해 도착한 여관에서 그는 방조차 잡을 수 없었다. 베드포드 공작과의 친분을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우겨대며 방을 달라고 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의 말은 무시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식당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감히 자신에게 이런 대접을 하다니. 그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뒤바뀐 서로의 관계가 그를 비틀어지게 만들었다.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인사를 하고 사정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술을 마시기 전까진 말이다.
라이언은 패트릭의 멱살을 잡아끌고 여관 뒤편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여관은 앞마당까지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곳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관계는 아니었다.
달빛이 고요한 공터에 도착한 라이언은 질질 끌고 온 패트릭을 바닥에 집에 던졌다. 술기운과 라이언에게 얻어맞은 턱의 통증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는 그대로 기절을 했다.
“찬물을 가져와.”
라이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뒤편에서 조용히 그를 따라오던 기사단 중 한 명이 재빠르게 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나머지 기사들은 라이언의 주위로 횃불을 밝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찬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가 라이언의 앞에 놓였다.
“모두 내려가서 공작부인을 지키도록.”
이제 공터에는 라이언과 패트릭만이 남았다. 라이언은 천천히 바닥에 엎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패트릭을 살펴봤다. 자세히 보면 어릴 적의 모습이 아주 조금은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투실투실 살이 오른 패트릭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기억이 다시 슬금슬금 그의 발끝을 타고 올라와 이마로 향하기 시작했다.
테사. 어머니라 불리기를 거부했던 여자. 라이언에게 어머니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라고 명령했던 여자. 그런 그녀가 제 아들보다 더 사랑했던 아이. 마틴 맥클라이의 아들. 그게 바로 패트릭이었다.
라이언보다 20개월 늦게 태어난 패트릭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미를 잃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마틴과 함께 베드포드 성으로 들어왔다. 마틴은 라이언의 어머니 테사의 외사촌 오빠였다.
테사가 라이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마틴과 패트릭이 베드포드 성을 떠나면서부터였다. 처음에 라이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신보다 어머니에게 사랑받았던 패트릭이 떠나버린 것이 기뻤다. 이제 어머니가 패트릭이 아닌 자신을 봐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다.
그 모든 것은 라이언의 착각이었다. 패트릭이 떠난 후 라이언은 오히려 어머니란 호칭을 잃고야 말았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하루가 멀다 하고 매질을 당하던 어느 날 그는 듣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 테사와 마틴, 그리고 아버지 아놀프의 관계를.
사촌지간인 테사와 마틴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엘리시아는 8촌 이내 친족간의 결혼이 엄격하게 금지된 나라였고 그들의 사랑은 축복받을 수 없는 관계였다. 테사의 부모님은 그 사실을 알자마자 오랜 시간 테사를 짝사랑했던 베드포드 공작과 그녀를 강제로 결혼시켰다.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지내던 아놀프는 우연히 무도회장에서 테사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야 말았다. 무려 20살이라는 나이 차가 무색하도록 그는 속절없이 테사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공작이라는 자신의 작위를 이용하여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접근을 했다. 철없는 딸의 사랑 타령에 애가 탔던 테사의 부모 입장에게는 부유한 공작 아놀프의 등장이 하늘이 주신 기회처럼 느껴졌다. 그의 나이가 자신들과 비슷하다는 것도 상관이 없을 만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마틴 맥클라이와 나이를 빼면 작위부터 재산까지 무엇 하나 나무랄 것이 없는 아놀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물론 테사는 절대 결혼할 수 없다며 반항을 했다. 하지만 이미 아놀프의 돈과 작위에 취할 만큼 취해 있던 테사의 부모 귀에는 그녀의 반항 따윈 하찮을 뿐이었다.
아놀프는 테사 부모의 빚을 모두 갚아 주고, 살 집도 구해주었다. 그리고 부유한 생활을 하도록 뒤를 봐주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딸을 무조건 베드포드 공작과 결혼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반항하는 딸에게 약을 먹였다. 그리고 아놀프와 합방을 시켰다. 그렇게 생긴 아이가 바로 라이언이었다. 임신과 함께 자신의 부모가 아놀프에게 받아왔던 혜택을 모두 알게 된 테사는 눈물을 머금고 아놀프와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라이언이 태어났다. 그리고 테사는 아무 죄 없는 라이언을 원망했다. 배 속에 아이만 없었다면 몇 번이고 마틴과 도망을 갔을 것이다. 라이언이 생기지 않았다면….
아놀프는 그저 테사를 사랑한 죄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테사를 사랑한 죄. 테사의 부모가 테사에게 최음제를 먹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녀와 밤을 보낸 죄. 심지어 그는 마틴과 테사의 관계조차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자신의 어린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일찍이 사별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아내의 사촌 마틴을 자신의 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마틴과 테사는 무려 8년이나 아놀프의 눈을 피해 한집에서 밀회를 즐겼다. 그러는 동안 라이언과 패트릭은 함께 자랐다. 테사는 패트릭에게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리고 친아들인 라이언보다 패트릭을 늘 싸고돌았다. 어린 패트릭이 거만한 아이로 자란 것은 모두 테사의 탓이었다.
어머니의 품은 언제나 패트릭 차지였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밤에도 테사의 품으로 파고든 것은 라이언이 아닌 패트릭이었다. 어린 라이언은 견딜 수 없는 질투와 패배감으로 늘 열등감에 시달렸다.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칭찬을 받기 위해, 사랑을 받기 위해, 늘 필사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애정 어린 어머니의 눈길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어쩌면 패트릭과 함께였던 때가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지옥은 패트릭과 마틴이 떠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 테사와 밀회를 즐기던 마틴은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둘의 관계를 꿈에도 알지 못했던 아놀프는 언제나 어린 아내의 친한 사촌인 마틴을 챙겼고 그에게 부유한 미망인을 소개해 주었다. 언제까지 테사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틴은 패트릭을 데리고 베드포드 성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테사는 혼자 남겨졌다.
마틴이 떠난 것이 모두 남편 탓이라고 여긴 테사는 남편에게 대놓고 표출할 수 없는 분노를 라이언에게 풀었다. 패트릭이 떠난 이후 라이언에게 어머니란 호칭을 부르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이였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도 트집을 잡아 폭력을 행사했다. 라이언만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이토록 꼬이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어린 라이언은 테사에게 매질을 당할 때마다 그녀의 말을 잊고 자꾸만 어머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그럴 때마다 몇 번이고 몽둥이가 더 날아들었다.
처음엔 아놀프도 그런 테사의 폭력을 저지했었다. 말리는 아놀프를 멈추게 만든 것은 테사의 고백이었다. 처음 그와 보냈던 밤이 최음제 탓이었다는 고백. 라이언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을 아이라는 원망. 그리고 당신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고 오직 저주할 뿐이라는 울부짖음. 그 뒤 아놀프는 급격히 늙어버렸다.
“으….”
과거를 떠올리니 어김없이 이마의 상처가 마구 쑤셔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패트릭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라이언은 그런 패트릭의 얼굴 위로 양동이 안에 가득 담긴 차가운 물을 쏟아버렸다.
“흐음….”
“일어나.”
갑작스러운 물벼락에 정신을 차린 패트릭이 꿈틀댔다. 조끔씩 취기가 가시는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껌뻑이는 모습이 우스웠다.
“패트릭 맥클라이.”
라이언이 이름을 부르자 패트릭은 애써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마구 머리를 쥐어뜯었다. 라이언을 구슬려 돈을 뜯어내려고 찾아온 것인데 그걸 다 망쳐버렸으니…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그냥 우연히 여관에 들렀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말해.”
라이언은 그의 방문이 의도적이라는 걸 훤히 꿰고 있었다.
“그게….”
그의 행색을 가만히 살피던 라이언이 다시 말했다.
“돈이 필요한가?”
“아니 뭐 내가 꼭 그 이유로 자네를 찾은 건 아니고….”
패트릭이 그를 찾아올 이유는 돈 아니면 없었다. 라이언도 그의 방탕한 생활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돌아가. 돌아가서 기다리면 내 비서가 널 찾아갈 거다.”
라이언의 말에 패트릭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물벼락을 맞았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린 채로 라이언에게 다가갔다. 반갑게 껴안을 요량으로.
“꺼져.”
차가운 라이언의 말에 패트릭은 자리에 멈춰 섰다. 술에서 깨고 보니 두려움이 몰려온 까닭이었다. 라이언의 애송이 시절만을 기억했던 그에게는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산과 같은 라이언의 모습은 매우 낯설고 겁이 나는 존재였다. 그는 애써 라이언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뭘 그렇게 인상을 쓰고 그러나. 우리가 보통 사이야? 어머니가 하늘에서 들으시면 서운해하시겠네.”
패트릭이 어머니를 입에 올리자 다시 이마의 상처가 아려왔다.
“헛소리 그만하고 꺼지게. 내 맘이 변하기 전에.”
“워워. 진정하게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우리 같이 가서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회포를 풀자고. 그러고 보니 아까 자네 옆에 있던 예쁜이는 어디로 보냈나? 어디서 데려왔는지 제법 귀부인 흉내를 잘 내더군….”
여전히 리아가 공작부인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패트릭이 주둥이를 또 나불대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요염하게 흔드는 꼴이 보니까 남자 여럿… 허어…윽!”
라이언의 주먹이 패트릭의 배로 날아들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에 그는 배를 부여잡고 뒷걸음질을 치다 자빠졌다.
“아무래도 정신을 차리긴 어려울 것 같군.”
“라…라이언… 으으윽….”
그냥 곱게 보내 줄 때 꺼졌으면 서로에게 얼마나 좋았을까? 라이언은 이마의 상처를 꾹 문지르고는 패트릭을 향해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분명 내 아내라고 했을 텐데.”
다가오는 라이언의 냉혹한 표정을 바라보며 패트릭은 몰려오는 두려움에 턱을 달달 떨었다. 전쟁터를 피바다로 만들었다는 자비 없는 검은 사자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오르며 숨이 막혔다. 그는 변명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아니라… 자네와 겨, 결혼했다는 공주는… 미쳤다고… 들…어서….”
라이언은 벌써 그의 발치에 다가와 있었다.
“뚱뚱한 귓구멍 열고 잘 들어. 오늘부터 단 한 번이라도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다닌다면 네놈은 그 순간 죽어. 공작부인을 그 더러운 입에 올리는 순간 그길로 내가 널 찾아가 온몸을 다 찢어발길 거야. 알겠나?”
패트릭은 라이언의 눈빛을 받아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그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더는 애송이 라이언이 아니었다. 전쟁의 신. 죽음의 사자. 그따위는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존재. 그게 라이언이었다. 갑자기 바지춤이 뜨거워졌다. 과도한 두려움에 그도 모르는 사이에 다리에 힘이 풀려 참을 겨를도 없이 소변이 흘러나와 바지를 적시고 발밑으로 흘러내렸다. 패트릭의 변화를 알아챈 라이언이 고개를 흔들며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를 냈다.
“꺼져.”
패트릭은 뒷걸음을 치며 그에게서 벗어나 정신없이 언덕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