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과거의 망령
‘첫날밤을 기대해도 되겠지?’
리아는 머릿속을 정신없이 헤집고 돌아다니는 라이언의 말과 사정없이 쿵쿵대는 심장을 간신히 모른 척 진정시키며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식당을 향해 내려갔다.
여관은 렌포드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 놓인 장소이니만큼 상시 손님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방은 진즉에 만실이었고, 뒤늦게 도착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가엾은 말을 몰아내고 마구간까지 차지했다.
복잡한 건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식당은 굳이 하룻밤을 머물지 않아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장소이기에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여관의 방문객이 이렇게 폭주한 이유는 모두 리아와 라이언의 방문 탓이었다. 집사 넬슨은 여관주인에게 확실하게 주의하라고 경고하기 위해 베드포드 공작 부부가 머물 방이란 것을 명시했고, 그 사실은 순식간에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공작 부부가 방문한다는 것만으로 특별히 맛집도 관광지 근처도 아닌 그저 렌포드 입구에 있는 평범한 여관이 엘리시아의 최대 명소로 떠오른 것이다.
여관주인은 위대하신 검은 사자 베드포드 공작의 방문을 매우 영광스럽게 여긴 나머지 지난밤 집사 넬슨이 떠나자마자 식당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예약석으로 비워놓았다. 문제는 그 가장 좋은 자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안성맞춤인 제일 가운데에 위치했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와 식당 입구에 들어서자 여관 안팎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검은 사자와 그의 부인인 공주의 등장으로 매우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살면서 이토록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몇 번이나 될까? 검은 사자와 엘리시아의 하나뿐인 공주를 볼 기회가!
식당 안쪽 테이블을 차지한 사람은 대부분이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그 치열한 경쟁을 뚫지 못하고 식당 입구나, 창가 주변을 둘러쌓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 뿐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엘리시아의 공주. 그리고 그 공주의 남편인 전설의 검은 사자. 두 사람을 봤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평생을 가져갈 자랑거리가 하나 생길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라이언도 자신의 등장으로 달라진 식당의 공기를 눈치챘다. 아니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따가울 정도로 집중된 시선, 그리고 갑작스러운 정적. 그가 식당 입구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온 세상이 멈춘 듯 주위가 고요해졌다. 식기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다들 나를 보러 온 건가? 아니면 당신을?”
라이언이 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음… 제가 볼 때는 아마도 당신?”
“나?”
라이언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고개가 돌아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빠르게 다른 곳으로 분산되었다.
“봐봐 맞죠?”
리아가 고개를 숙이며 큭큭 댔다. 사실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이 익숙했다. 어딜 가나 주목받는 직업이었고 또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았었다. 그랬기에 지금의 상황도 별스럽지 않았다. 또 그들의 관심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리아는 그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가 사정없이 이마를 찌푸려서 사람들을 겁주기 전에 빨리 밥을 먹고 이 정신없는 식당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이런, 이게 누구야? 위대하신 검은 사자 아니신가?”
걸걸한 목소리에서부터 취기가 물씬 느껴졌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라이언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한 남자가 비틀대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술을 마셨는지 타이는 풀어져 떨어지기 직전이고, 셔츠는 가운데 단추 몇 개만 잠근 채로 바지 밖으로 다 삐져나와 있었다. 물론 재킷은 흔적조차 없었다. 부츠는 흙탕물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 얼룩으로 가득했고 머리는 헝클어져서 까치집을 지었고 눈은 흐리멍텅했다.
누구지? 라이언의 기억 속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리아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몸쪽으로 가까이 잡아당겼다.
“누구지?”
검은 사자의 음산하고 짙은 목소리가 식당의 고요함을 타고 울려 퍼졌다. 감히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의 앞에 대고 위대하신 검은 사자 어쩌고 하며 빈정대는 소리를 내다니. 식당 안의 사람들은 이제 고요함을 넘어서 얼어붙기 직전이었다. 침조차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라이언의 강한 힘으로 그에게 한껏 달라붙어 매달린 꼴이 된 리아는 지금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파악하기 위해 눈알을 굴리며 취객과 라이언을 번갈아 살폈다.
“이럴 수가. 날 기억 못 하는 건가? 이거 섭섭해서 살 수가 없군. 내가 아무리 살이 좀 쪘다고 해도….”
취객은 비틀대며 라이언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인의 위험을 감지한 기사단이 재빠르게 칼을 챙겨 들고 식당 입구로 들어오는 것을 본 라이언은 손짓으로 그들을 물렸다. 좋은 날 소란을 떨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취객 따윈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고,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와 부산을 떤다면 식당 분위기가 어떻게 변할지 안 봐도 뻔했다.
라이언은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남자를 자세히 살폈다. 얼마나 취했는지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남자는 그에게로 걸어오다 옆 테이블을 잡고 비틀댔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남자를 향해 혐오의 눈빛을 보냈으나 그보다는 그와 라이언 사이의 관계가 더 궁금했으므로 애써 그를 견뎌냈다.
며칠을 감지 않은 듯 기름져 뭉쳐있는 남자의 머리는 금발이었다. 퉁퉁하게 살집이 오른 얼굴은 번들거렸고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턱 주변이 거뭇거뭇했다.
“아는 사람이에요?”
“다시 보니 그런 것도 같군.”
살이 조금 찐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찐 것이라면 말이다. 라이언에게 늘 빈정거리고 건방졌던 사촌 패트릭 니콜라이. 어린 시절 내내 악몽처럼 따라다니며 그를 질투와 분노 그리고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몸서리치게 하였던 인물. 어린 천사라고 불리며 사랑스러운 외모를 자랑했던 그가 엉망으로 변한 채 라이언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패트릭 니콜라이. 조금이 아니라 많이 변했군.”
패트릭을 보니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라이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하하, 애송이 라이언이 드디어 이 몸을 기억해낸 모양이군.”
패트릭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비열한 웃음을 흘리자 주변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어냈다. 감히 베드포드 공작에게 애송이라니.
“애송이요?”
놀란 것은 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애송이라는 남자의 말에도 아무렇지 않은 라이언의 태도였다. 패트릭은 어느새 비틀대는 걸음으로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옆에 아가씨는 누군가?”
흐리멍텅한 줄 알았던 패트릭의 눈이 순간 음흉해 지면서 리아를 아래위로 훑었다. 라이언은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고 인상을 썼다.
“많이 취한 것 같군.”
그러나 그뿐이었다. 라이언은 패트릭에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이 다시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패트릭 앞에 서면 늘 주눅이 들었던 어린 시절 그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처럼.
“공작부인이신가? 자네가 결혼했다는 소리는 내 익히 들었는데… 아니지….”
말을 하다말고 패트릭은 머리를 긁적였다. 기름진 머리가 끈덕이며 그의 손끝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광경을 보며 리아는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걸 애써 참아냈다.
“자네가 공작부인과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없지. 그럼 애인?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내가 미인을 알아보는 눈은 정확하지… 이런 미인을 정부로 두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군.”
패트릭의 극악무도한 발언이 계속될 때마다 라이언의 표정 또한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아무리 패트릭에게 약한 라이언이었지만 그건 과거일 뿐 현재는 아니었다. 잠시나마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선뜻 움직이지 못했던 그는 패트릭이 리아를 언급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라이언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닌듯한 표정이었다. 죽음의 사자란 별명에 걸맞은 냉혹하고 잔인한. 그의 품에 안겨 있다시피 붙어 있던 리아는 온몸으로 그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팔 위로 손을 올렸다.
“라이언.”
차분한 리아의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안타깝게도 내 옆에 이 숙녀분이 바로 공작부인이라네.”
라이언은 바로 리아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참았다는 표정으로.
“부인, 내 사촌 패트릭 니콜라이를 소개하겠소.”
리아가 패트릭을 쳐다보며 인사를 막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푸하하하하하.”
갑자기 패트릭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 광경에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마른침을 꼴깍 삼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행동이나 하는 말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라이언, 불쌍한 라이언. 겁쟁이 라이언.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가. 내가 모를 거로 생각하는 건가? 쯧쯧쯧쯧… 아내라니, 공작부인이라니. 그렇게 나한테 넘겨주기가 싫은 건가? 하긴 자넨 늘 나한테 뺏기는 걸 싫어했지. 그렇지만 어쩌겠나! 결국, 모두 다 내 차지가 되고 마는데.”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라이언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찌릿하고 이마의 상처가 아려오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여기서 통증이 시작되는 것이라면 정말 최악이었다. 당장이래도 패트릭의 멱살을 잡아끌고 밖에 대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놈이 더 입을 나불거리게 둘 수는 없었다. 리아의 표정을 살피며 라이언이 패트릭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더 이상의 실수는 하지 말게. 나는 지금 내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온 거야. 오랜만에 반가웠네. 그럼 이만.”
아내라는 말에 또박또박 힘을 주며 말을 마친 라이언이 일방적인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
“왜? 실수라도 하면 날 죽일 텐가? 다들 자네 앞에 서면 무서워서 벌벌 떤다며? 검은 사자가 칼 한번 휘두르면 한방에 우수수 죽어 나간다는데….”
라이언의 자제력이 점점 더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간신히 참아 넘겼던 분노가 다시 그의 전신을 타고 사람들을 향해 퍼져나갔다.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오직 만취한 패트릭뿐이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최악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리아는 두리번거리며 제임스를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먼저 식당에 내려간 게 아니었어? 금방이라도 라이언이 뛰어나가 저 망할 놈을 두 동강 낼 것만 같았다.
“패트릭 니콜라이 씨. 처음 뵙겠어요. 안타깝게도 제가 라이언의 아내가 맞답니다.”
상황을 조금이라도 모면해 보고자 리아가 나섰다. 화가 난 라이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가 나서서 싸우는 것보다야 나았다. 오늘은 그녀가 정한 두 사람의 진정한 결혼식 날이었다. 그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뻥 치지 말아요. 공작부인이 미쳤다는 걸 모를까 봐? 내가 아무리 끈 떨어진 귀족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알아. 미친 부인 대신 당신더러 공작부인 행세를 하라고 라이언이 얼마를 줬지? 내가 그 두 배를 줄 테니 오늘 밤 나랑 찐하게 어때?”
패트릭의 막말에 리아는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이제는 뭘 어떻게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상황은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녀는 라이언의 눈치를 살폈다.
“방으로 가시오.”
“네?”
라이언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라이언이 손을 크게 들었다. 그러자 그 즉시 기사단 중 한 명이 그의 앞으로 달려 나와 무릎을 꿇었다.
“공작부인을 방으로 모시게.”
“라이언. 무슨 말이에요? 당신 사촌은 지금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에요. 자고로 취한 사람은 상대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지금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를 거예요. 무시해요. 그냥 무시하고 저녁이나 먹어요.”
그때였다. 식당 입구로 제임스와 페넬로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리아는 그들의 등장이 너무 반가워서 마구 손을 흔들었다.
“뭐? 무시해? 상대를 안 해? 라이언. 이년이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계속 이렇게 나한테 건방을 떨게 둘 건가?”
라이언의 인내심이 드디어 바닥이 나고야 말았다.
“아니지. 이런 건방진 년은 내가 한번 찍어 눌러주면….”
퍽-
라이언의 주먹이 패트릭의 턱을 무자비하게 가격했다. 패트릭은 단번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결국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라이언의 손에 멱살이 잡힌 채로 밖으로 끌려나갔다.
리아는 곧바로 라이언을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그가 미리 불러놓은 기사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뒤늦게 리아의 곁에 도착한 제임스와 페넬로페는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내 제임스는 엉망인 상황을 파악하고 라이언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역시… 또다시 역사는 반복된다. 유쾌한 결혼식의 마지막을 꿈꿨던 리아의 바람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첫날밤은 개뿔. 인생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네. 어디서 취한 개뼈다귀 같은 게 뜬금없이 튀어나와서는…
무슨 일이냐고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페넬로페를 남겨두고 리아는 천천히 식당을 벗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식당 안은 돈을 주고도 못 볼 구경을 한 사람들의 쑥덕거림으로 난장판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